쓴다면 재미있게 - 빠져드는 이야기를 위한 15가지 작법
벤저민 퍼시 지음, 이재경 옮김 / 홍시 / 201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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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대학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진로도 그쪽으로 정한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야기 창작엔 정답은 딱히 없지만 오답은 무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창작과 관련된 작법서를 읽지 않았다. 작법서 특유의 단정하듯 말하는 어투도 싫고 모두 알 만한 그저 그런 내용으로 페이지를 채우는 꼴도 보고 싶지 않다. 전자는 자신의 방식만 옳다 여기는 게 꼰대 같아서, 후자는 그걸 누가 몰라서 작법서를 펼치겠느냐는 반발심이 들어서다. 

 <쓴다면 재미있게>는 그런 내가 읽기에도 작가가 나름대로 치우치지 않은 위치에서 빠져드는 이야기의 공식이라 부를 만한 요소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짚어냈다고 여겨지는 작법서였다. 작가가 미국인이라 그런가 예시로 드는 소설이나 작품들이 주로 미국 중심이고 또 내가 그 작품들을 다 접해보지 못한 터라 예시를 든 정확한 목적이 확연히 와 닿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글 자체는 술술 읽혔다. 적당히 꼰대스럽고 적당히 자신감에 차있고 적당히 겸손하고 솔직한 작가의 태도가 무엇보다 신뢰할 만했는데, 특히 어렸을 때는 용과 흡혈귀가 나오는 소설만 탐독하다가 이후에 다른 종류의 소설에 독서 편력을 확장하게 됐더라는 내용의 도입부가 눈길을 끌었다. 가벼운 소설, 문장에 치우쳐진 소설 어느 한 쪽의 편만 들었다면 난 이 책을 더 읽지 않았을 테지만 작가는 상반된 형태의 두 소설의 장점에 모두 주목하자는 식으로 사고가 전개된 건 독자 입장에서 퍽 안도하며 읽을 수 있는 요소였다. 작가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독서는 위험하지만 분명 편하긴 하다. 난 그 편함을 제공한 작가의 필력에 일단 경의를 표하겠다. 


 어쩌면 가장 아쉬운 부분은 정작 벤저민 퍼시라는 작가가 이런 작법서를 쓸 수 있을 만한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를 안겨준 소설들을 접해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야 이 작가가 이론만 빠삭한 입만 산 작가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데...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할 말이겠지만 사실 책의 내용 중 특기할 만한 구절은 딱히 - 굳이 얘기할 만한 게 있다면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가의 소제목 짓는 센스다. - 없었다. 반박하려면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겠지만 대체로 설득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어쨌든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바는 서두에 명확히 밝혔고 뒤의 내용은 그 내용에다가 살을 더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읽는 이유, 그런 이야기를 쓰기 들여야 할 노력과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을 철저한 분석과 본인의 경험을 통해 디테일하게 풀어냈다. 

 예전에 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 가끔 교수들이 본인이 쓴 글로 강의 내용을 채운 적도 있었는데, 이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그 우를 범하지 않은 건 굉장히 칭찬할 만한 부분이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얘기를 해봤자 그 작품을 집필할 때 들인 노력 정도지 자기 글의 완성도에 자화자찬하는 내용은 내 기억에 없었다. 대신 익히 알려진 명작이나 그렇지 않은 숨은 작품을 제목을 언급하며 예시로 든 건 좋았다. 좋은 작품을 추천 받았고 또 가끔 명작이 왜 명작 대우를 받는지 이유를 실감했던 적도 있었다. 이건 여담이지만, 예전엔 누군가 내게 명작이 위대하다면서 추천하면 꼰대인 것 같았고 굉장히 독서량이 적은 사람이라고도 여겼는데 요새는 또 생각이 달라졌다. 이 작가처럼 명작이 왜 명작인지 명확히 설명하는 사람을 몇 명 만나니까 편협한 세상 속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 책에 대해 얘기하는 내 말투에서 일말이라도 부정적인 뉘앙스가 풍겨졌다면, 내가 아직 편협한 세상 속에 있어서 이 책의 몇몇 내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탓일 것이다. 상술했던 '이야기 창작엔 정답은 딱히 없지만 오답은 무수하다'라는 말은 일종의 핑계일 수 있다. 내가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문단에 편입하지 못해 튕겨져 나오는 것에 대한 두터운 방어 기제라고 보여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입만 산 소설가 지망생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더디 걸리더라도 결국엔 내 작품 세계를 펼치게 될 소설가로 남은 것인가. 이는 굉장히 민감하면서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이다. 당연히 후자를 원하지만 그게 마냥 내 뜻대로 될 리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런 희망은 이제 완전히 접었다. 그래서 평소에 외면했던 이런 작법서를 읽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괜찮은 변심이었던 것 같다.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적어도 책 말미에 나온 이 작가의 고생담을 접하니 내가 갖고 있는 질문들이 나만 유별나게 모자라서 하게 되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위안이 됐다. 물론 너무 위안 삼으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잠시 동안, 잠시 동안 숨은 좀 돌리려고 한다. 

호러는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작가로서 여러분의 사명은, 아무리 불편해도 가끔씩 그러나 책임감을 가지고, 인간 실존의 어두운 구석들에 피로 밝힌 램프를 들이대는 것이다. - 109p



인간은 모두 기본 설계가 같다. 여기 대퇴골이 있고 저기 간이 붙어 있는 건 똑같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모두 각양각색이다. 다 다르게 멍청하고 다 다르게 미련하다. - 1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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