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의 분위기
박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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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박민정 작가의 출세작, 최신작이 모두 수록된 대망의 소설집을 드디어 읽었다. 일찍이 인상 깊게 읽었던 '세실, 주희'와 '모르그 디오라마', 그리고 표제작인 '바비의 분위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밖에 다른 작품들은 기대에 못 미쳤으나 만듦새나 공통된 주제의식은 높이 살 만했다. 아쉽게도 패턴이나 주인공의 캐릭터성이 비슷했던 게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문학이 은근히 획일적인 경향이 있다는 주장의 슬픈 반증이란 생각도 든다. 이 발언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특히 박민정 작가의 경우는 꽤 다양한 시도를 보이는 작가이므로 이런 평가가 부당하다고 여겨질 수 있겠지만, 국경 밖 사례와 인물들을 통해 조명한 여성 문제가 처음엔 신선하다가도 매 단편마다 조금씩 반복되고 닮아있으니 끝에 가선 질리게 됐다. 같은 소설집의 수록작들이므로 공통점이 있는 건 그러려니 했지만, 대신 이 다음 작품들을 주목해봐야 할 듯하다. 이 다음에도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면 매너리즘을 의심해봐야 한다. 이것이 내 쓸데없이 과한 기우이길 바란다. 



 '세실, 주희' 


 이 작품은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작가의 작품이기도 하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처음 접했고 아마 이번이 세 번째 읽은 것일 텐데 읽을 때마다 감탄스럽다. 다른 작품에 비하면 주제의식이 꽤 뻔하게 읽히지만 오히려 그 단선적인 구조가 마음에 든다. 소위 문학 좀 한다는 사람들이 숨기는 것이 훨씬 세련된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드러낼 때는 확실히 드러내는 것도 능력이라 생각한다. 그런 내 평소 지론에 대단히 잘 부합하는 소설이 바로 '세실, 주희'였다. 

 맹목적인 반일 감정을 앞세우지도 않고 반대로 친일적인 내용도 없다. 국가 감정을 조장하지 않고 서로가 자기 아는 범위 안에서만 개념적이고 남들에게 폭력적일 수 있는 이 시대의 아이러니를 잘 강조했다. 아무래도 내가 한국인이므로 세실이 상대적으로 탐탁지 않게 비쳐질 만했으나 내가 봤을 때 주희도 나름의 딱한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이 가지 않았다. 세실을 향한 은근히 탐탁치 않아 하는 속내가 그다지 모범적으로 보이지 않은 탓이다. 이 정도면 양반이라 생각이 들다가도 작가의 주제의식,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사람들의 관계가 과연 괜찮은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면 끝까지 수동적인 주희도 결국엔 작가이 비판 대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주희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걸 의미했던 것도 같고. 


 '모르그 디오라마' 


 사진과 영상 기술의 발달로 인한 여성 폭력의 교묘한 진화에 대해 심도 깊게 들여다본 작품. 주인공이 과거에 당한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살짝 모호하게 묘사된 게 답답했지만, 또 무언가 큰일을 당한 것치고 은근히 멀쩡하게 대학 나오고 회사까지 다니네 싶었지만, 사실 그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험한 꼴을 당해 회생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숨기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정말 많지 않을까 하는 반문이 들기도 했다. 죽어서도 구경거리로 전락한 파리의 모르그 거리의 시체들처럼 사진과 영상 기술 특유의 대상을 영원히 박제시키는 듯한 기능은 사람에 따라서 정말 위험한 무기로 악용될 수 있음을 다시금 명심하게 만들었다. 요즘 세상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소재와 접근 방식이란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바비의 분위기' 


 사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나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크게 새로울 게 없었지만 특유의 정신 나간 설정과 분위기, 그리고 개연성 때문에 뒷맛이 씁쓸하면서 강렬했던 작품이다. 여성을 인간이 아닌 하나의 판타지의 대상으로 대하는 남자가 전공을 살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대목은 쓴웃음을 넘어 소름을 끼치게 만들었다. 같은 남성이 보기에도 역겨운데 여성분들은 오죽할까. 새삼 여성분들이 느끼는 공포감이 무엇인지 실감이 갔다. 혐오해 마땅한 쓰레기가 죗값을 치르지 않고 오히려 인정 받는 세상, 그게 어쩌면 진정한 공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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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01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별 관심없이 제쳐두었던 책인데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광골의 꿈 - 하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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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스포일러 : 거의 없음 


 전편 <망량의 상자>보다 한층 더 난해해진 시리즈 3편이다. 돌이켜 보니 <우부메의 여름>은 꽤 괜찮은 입문작이었구나 싶다. 종교의 폐해, 전근대적인 가치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란 기본적인 맥락은 그대로인데 취향 좀 타는 일본의 요괴 설화와 짜증날 정도로 울적한 심성의 캐릭터들의 향연, 사건의 가닥이 잡히지 않으면서 형이상학적 얘기만 해대는 전개 때문에 몇 번이고 포기할 생각을 했다. 코믹스로 먼저 접하지 않았더라면 이야기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코믹스는 꽤 괜찮았는데. 

 그렇게 좋은 방식의 독서는 아니라 생각하지만, <우부메의 여름>을 제외한 교고쿠도 시리즈는 시미즈 아키의 코믹스판을 먼저 접하고 원작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시각적인 정보에 기대지 않고서는 인물들의 장광설을 - 교고쿠도 혼자서 떠드는 1편이 훨씬 나았다. - 견디기 힘들 테니까. 후반부에서 이런 전개가 있으리란 기대 없이 과연 몇 명의 독자들이 이탈하지 않을 수 있으려나? 일본 독자들은 그래도 자국의 요괴 이야기가 나오니 덜 난해할 수 있겠지만 한국의 독자들은 경우가 다르다. 온갖 마니악한 내용들로 점철돼서 이걸 번역한 역자가 우러러 보일 정도다. 


 출연이 상당히 늦긴 했지만, 게다가 입을 떼자마자 이야기를 한참이나 돌려서 말하는 통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지만 - 교고쿠도는 다 필요한 작업이라고 말하지만 그 말이 나올 때마다 기바슈에 빙의해 교고쿠도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 멘탈이 붕괴되는 캐릭터들의 모습과 반전이 드러날 때의 연출 덕에 은근히 읽는 맛이 나쁘지 않았다. 코믹스의 연출이 훨씬 멋들어졌지만 원작도 그에 못지않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아무튼 지금껏 쌓아온 수수께끼를 어쨌든 명쾌하게 해결해 추리소설의 구색은 갖춘 것이 참으로 다행으로 여겨졌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애당초 이런 혼선이 벌어진다는 게 너무 작위적이고 우연에 기댄 감이 적잖았지만 그렇게 문제 삼고 싶지 않다. 이 세상에는 일어날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법이라고 교고쿠도가 늘상 강조하는 거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뭐. 

 그나저나 이 시리즈를 계속 읽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다음 작품인 <철서의 우리> 상중하 세 권으로 이뤄졌다. 두 권도 벅찬데 세 권이나 이 난해한 세계관을 따라갈 자신이 없다. 사람들이 <광골의 꿈>을 분기점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더 읽을 것인가, 그나마 좋은 기억을 안고 이탈할 것인가. 고민 좀 된다. 나는 답을 유보한 채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려고 한다. 이 작가는 '교고쿠도' 시리즈 말고도 유명 문학상을 받은 걸출한 작품을 많이 집필했던데 그 중 한 작품을 골라야겠다. 아마 <웃는 이에몬> 아니면 <엿보는 고헤이지>가 될 듯하다. 그 작품들은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이 작품들도 겁난다. 


 p.s 자꾸 코믹스 얘기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또 까다롭지만 오히려 원작을 초월할 정도로 깔끔하고 인상적인 연출을 선보였던 게 떠올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시미즈 아키라는 만화가는 정말 대단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어마어마한 독해력을 가졌거나 팬심이 대단하거나, 둘 중 하나거나 아니면 둘 다겠지. 

구제는 항상, 하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이 문제인 걸세. 사람은 사람을 재판할 수는 없지만, 구할 수는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해서 구원받는다면, 그것 또한 신의 의지겠지. - 하권 2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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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소울 2
가키네 료스케 지음, 정태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9 





 스포일러 : 15% 


 <와일드 소울>은 대충 지은 듯한 제목과 국내 한정으로 대충 만든 듯한 표지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비운의 작품이다. 명색이 일본에서 3개 문학상을 수상한 초대형 작품임에도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 너무 대충 홍보되고 디자인된 감이 없잖아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제라도 두 권을 한 권으로 합본시키고 멋들어진 표지로 재출간되기를 바란다. 

 예전에 읽었을 땐 제목도 시원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읽으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최선의 제목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꽤 함축적으로 잘 담아내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황폐한 야성의 상태, 일명 와일드한 상태에 처한 존재는 비단 주인공 일행만이 아니다. 케이의 말마따나 가난 냄새를 풍기는 일본, 정확히는 과거에 무수한 죄를 저지른 주제에 운 좋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던 일본 정부 역시 와일드하다. 겉보기에 세계 2~3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국이지만 속은 엄청나게 시커멓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우리나라 독자들은 특히 케이의 말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대놓고 일본 정부를 겨냥해 복수를 다짐하는 소수의 테러리스트들의 이야기인 <와일드 소울>은 그 제목 못지않게 단순하고 흡입력이 넘치며 읽히기도 엄청 빨리 읽힌다. 7백페이지면 제법 분량이 되지만 읽는 시간은 거의 3~4백 페이지 책과 흡사할 정도다. 오해하면 안 되는 게 그만큼 내용이 가볍다는 게 아니다. 분명히 밀도 있고 캐릭터들의 내적 성장을 묘사하는 구절은 사뭇 심오해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절륜했다. 출중한 가독성과 메시지, 대중 소설로 이만한 장점도 없을 텐데 그렇다 보니 3개 문학상 수상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됐다. 

 그래도 다시 읽어 보니 몇몇 부분에선 다른 인상을 받았는데, 우선 이야기의 전개와 주인공 일행의 계획이 다소 단조롭고 순조롭게 풀리는 경향이 있던 것, 그리고 케이의 캐릭터성이 신의 한 수이면서 독자에 따라 호불호 갈리겠구나 하는 감상이었다. 6년 전에 이 소설을 접할 때는 일본에 대한 인상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 19년부터 이어진 일본 정부의 만행을 몇 차례 경험하고서 이 작품을 읽으니 작중 일본 정부가 최소한 잘못이란 걸 시인하기라도 한다는 게 실로 어색하게 비쳐졌다. 작가가 그린 결말이 순진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만큼 일본 정부가 인간적인 도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니 그전에 현실에서 케이 일행처럼 공명정대한 테러를 펼친다 한들 과연 정부 차원에서 잘못을 시인할 국가가 과연 몇이나 되려나? 작품의 바람직한 결말에 감동 받은 한편으로 새삼 세상에 대한 환멸 또한 커졌다. 


 이 작품은 유수의 일본 추리 문학상과 랭킹에서 성과를 거두고 제목이 거론됐지만 통상적인 추리소설에 기대하는 트릭의 놀라움 같은 것을 기대해선 곤란하다. 앞서 언급했듯 이야기 구조도 단순하고 전개도 단조로운 등 완전 범죄의 묘미나 서스펜스가 압도적이지도 않다. 주제의식도 해석의 여지가 적은 등 기본 골자가 단선적인 작품이다. 내가 봤을 때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복수극의 진행 양상보다 케이라는 예측불허한 캐릭터의 행보에 있지 않은가 싶었다. 겉으로만 일본인일 뿐 속은 완전히 브라질인인 케이는 여느 일본 문학 속 캐릭터와는 확연히 이질적인 캐릭터성을 자랑하는데 이 느긋하고 호색한에다가 범죄를 저지를 때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특유의 모습은 자칫 지루할 수 있던 이야기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 넣었다. 

 특유의 호색한의 면모 때문에, 이를테면 다카코에게 접근한 방식 때문에 눈살 찌푸릴 독자가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케이가 워낙에 일관적으로 뻔뻔한 인물인 터라 이러면 안 되는데 싶다가도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데에 이견의 여지가 적어 보인다. 적어도 케이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된 인물이고 자신의 사랑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어서 남자인 내가 봐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죽하면 여자에게 접근하는 방식과 성적 자유분방함을 제외하면 케이를 내 롤모델로 삼고 싶었을 정도니 정말 말 다했다. 


 실제로 작가가 콜롬비아와 브라질로 취재를 다녀와서 그런지 남미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는데 - 그도 그럴 것이 취미가 무려 앵글로색슨계 나라를 제외한 해외여행이라니까... - 일부 낭만적인 시선을 차치하더라도 케이 같은 이방인의 매력을 극한으로 잘 끌어내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너무 케이 얘기만 해서 그렇지 그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 에토나 마쓰오, 다카코를 비롯해 다른 조연들도 비중을 막론하고 다 매력적이었는데 그중 처음 언급한 세 캐릭터가 맞이하는 결말이 모두 인상적이었다. 복수를 끝마친 뒤에 공허함은커녕 해방감을 느낀 에토와 벗어날 길 없어 보였던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는 마쓰오, 그리고 일을 정리하고 케이와 다시 이어지는 다카코... 

 작가는 과거의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일본이라는 나라가 조금은 괜찮은 나라가 되리라고 일말의 희망을 품은 것처럼 다른 캐릭터들 역시 일련의 사건 이후 희망적인 미래를 맞이할 것을 암시한다. 마치 아마존이란 밀림을 어느 정도 개척한 인간의 위대함을 찬양하듯 매서우리 만큼 쨍쨍한 햇빛을 내리쬔다. 암울하고 억울함의 극치였던 이야기 초반부에 비하면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산뜻하고 행복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꼭 내 영혼이 구원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껍데기만 따라다니는 인간도 평범한 성공은 거둘 수 있지. 현상을 보고서 그 대처법을 경험으로 알아나가기만 하면. 그런 경험을 통해 미래를 대처해 가는 거지. 약간만 똑똑한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그들의 의식 수준은 언제나 그런 정도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야. 즉, 처세술에 지나지 않은 거지. 그것은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나 나라가 바뀌거나, 또는 하는 일이 바뀌면 그대로 끝나버리는 거지. 그때까지 통했던 방법은 더는 통하지 않아. 하지만 그 껍데기에서 사물의 이치를 끌어내는 사람은 다른 세계에 가서도 살아남는 거야. - 1권 161p



마지막에 완성될 옷의 전체 모습을 언제나 머릿속에 떠올리고서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 전체 모습에 맞추어 세세한 부분을 맞춰나가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것만 있으면 솜씨는 좀 서툴더라도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떤 형태가 될 지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의식해야 합니다. 그러한 상상력을 갖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하지요. 영어로는 이것을 이미징이라고 합니다. 이미징이란 결국 센스라고 할 수 있겠지요. - 2권 152p



너희들이 말한 대로다. 복수에 불타고 증오를 증오로 철저히 덧칠한 끝에, 그 앞에 비로소 한 사람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적도 동지도 없다. 인종도 없다. 피의 색도 없다. 피부색도 없다. - 2권 330~331p



거대한 악의 싹은 언제나 커다란 사회의 물결 가운데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억지로 말려들게 한다. - 2권 3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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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택시 기사의 문화 관찰기 - 백인 사회의 뒷모습
지성수 지음 / 생각비행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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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지난 번에 읽은 <불편한 미술관>이 명화를 통해 인권 문제를 들여다봤다면, 이 책은 시드니에서 택시 기사로 일하는 저자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인권 문제를 들여다본다.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인문학적 해석도 겸비돼 있어 저자의 몇몇 치우쳐진 발언도 신빙성 있게 읽힌다. 이 책의 문제점이라고 하면 무슨 얘기를 하든 한국에 대한 찬양과 외국, 특히 백인 문화에 대한 환멸로 요약되는 저자의 이분법적인 논조와 결론일 텐데 이는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듯 타향살이가 오래 된 탓에, 그리고 실제로 백인 승객들을 상대로 직접 보고 겪은 일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중요한 건 실화가 갖는 무게의 힘과 이런 논조가 나올 만큼 모든 인종이 평등한 사회란 꿈만 같은 것이며 우리는 그 사실을 직시해야 그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일일 테다. 

 저자가 말하는 백인들의 어떤 점이 환멸스럽고 이민자로 구성된 나라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등을 무조건 불편하다는 이유로 등한시하면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똑같이 당황하거나 혹은 더더욱 다른 인종을 헐뜯으려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호주나 미국처럼 다양한 인종으로 이뤄진 국가가 될 리 없겠지만 예년에 비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늘어나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반목하지 않고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단일 민족 운운할수록 그런 노력은 절실하다. 단일 민족도 좋지만 그에 취해 언제까지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면 국제 사회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해 고립되는 건 신간 문제일 테니. 


 아까도 말했듯 직전에 읽은 책 <불편한 미술관>과 여러모로 대비되는 책이었는데, 그 책의 내용도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명화를 통해 이야기를 할 뿐이라 계몽적인 발언들이 상당 부분 호소력이 옅게 느껴진 반면에 이 책은 일부 편향되거나 꼰대스러운 부분이 없잖음에도 실화가 갖는 힘과 저자의 필력 덕에 훨씬 그럴싸하게 다가왔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에 알 수 있는 것도 있다지만 그래도 직접 겪은 사유와 깨달음의 위력은 무시하지 못하겠다. 저자의 깨달음이나 작중 내용이 뭐 대단히 신선하진 않았지만, 인종에 관련된 스테레오타입이란 비판을 크게 개의치 않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의 이면에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적나라하게 얘기하는 자세는 분명 신선했다. 

 이런 태도는 저자가 단순히 연세가 있으셔서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기 보다는 연륜이 쌓여 눈치를 보는 것이 부질없다는 걸 일찍이 깨달은 덕분으로 여겨졌다. 같은 말인 것 같다고? 전자는 그냥 나이만 먹은 거고 후자는 그저 나이만 먹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어쩌면 타향살이, 그것도 호주라는 선진국에서 - 저자는 선진국이라는 호칭을 그리 달갑게 듣지 않겠지만. - 지내왔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책의 내용 중에 한국 사회는 부모나 가족들이 나서서 두들겨 패서라도 훈육시키는 반면 호주 사회는 자유롭게 방임하다가도 사회 부적응자, 특히 알코올 중독자에 한해서는 가차 없이 외면한다는데 내가 봤을 때는 이런 내용을 다룸에 있어서 두 사회의 장단을 모두 조명한 저자가 두 사회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엄연히 백인이 주류인 호주 사회를 비판하면서 타인에 대한 과도한 간섭은 지양하고 한국 사회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폐쇄성을 씹으면서도 호주의 냉정하고 정 없는 분위기에 불편함을 느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완벽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어느 한쪽에 일방적인 찬양 혹은 비난을 보내는 건 부당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의 논조가 일관되게 백인들의 문제점을 꼬집는 등 이분법적인 것 같으면서도 한 꺼풀 더 들여다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아서 읽으면서 계속 정신을 차려야 했다. 

 후반부에 집필을 급하게 마무리 짓는 감이 있던 걸 제외하면 나무랄 게 없는 책이었다. 마지막 소제목인 '우리는 남이다'는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이유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데, 우리는 남이지만 그럼에도 어울릴 수 있다는 일종의 희망을 표현한 제목이지 않은가 싶다. 반대로 우리는 남이 아니라고 말하면 그 괴리감에 더 어울릴 수 없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변호사야말로 모두 지옥 갈 놈들이라고 하지만 나는 지옥이야말로 변호사가 많이 필요한 곳이라고 본다. 자기가 지옥에 오게 된 것이 부당하다고 변호를 요청할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 184p



무슬림 이민자가 많은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도 속으로는 "우리는 남이고 말고..." 하면서 감시와 견제를 강화한다. 반면 무슬림은 겉으로는 "우리는 남이 아니지 않은가?" 하면서도 속으로는 " 우리는 남인데..." 하고 중얼거린다. 이처럼 양 편이 모두 어색한 연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국제사회의 현실이다. - 198~1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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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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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저자가 서두에서 겸손을 떨었던 것치고 다루는 작품이나 주제의 다양성 면에서 실로 비범했던 미술책이다. 만화가가 집필한 미술책이란 게 사람에 따라서 전문성이 좀 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 난 오히려 그림을 직접 그리는 사람인 만큼 더 전문적일 듯한데. - 출신을 떠나서, 미술에 대한 저자의 관심이나 애정이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어 놀란 적이 많아 행여 만화가란 직업을 얕본 사람이 있으면 그 편견, 이 책을 통해 직접 깨보길 바란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 만한 고흐나 피카소 얘기만 할 줄 알았더니 생소한 화가, 사진 작가의 작품도 많이 인용하거나 유명 화가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도 다뤄 이래저래 신선하게 읽혔다. 오토 딕스, 조지 크룩생크, 노먼 록웰처럼 이름도 처음 듣는 독특한 화가들을 소개받은 것은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여권 문제, 장애인 인권 문제, 이민자 문제, 성소수자 문제 등 각각의 인권 감수성 키워드와 연관됐다고 저자 나름대로 선정한 그림들을 살펴본다.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첫째 당시 그림을 그린 화가가 문제 의식을 갖고 붓을 움직인 그림, 둘째 화가가 아무 생각 없이 붓을 놀렸다가 지금 시점에 와서 보니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 세 번째는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일부 몰상식한 관람객에 의해 훼손된 그림으로 나뉜다. 첫째는 도미에나 쿠르베, 딕스처럼 확고한 의지로 사회 문제를 정면에서 마주한 화가들이, 둘째는 크룩생크나 록웰처럼 좋게 말하면 지금과 다른 시대상을 엿볼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고리타분한 시선을 가진 화가들, 셋째로는 해석에 따라 인상이 확 변하는 벨라스케스 같은 화가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중요한 건 이 세 부류의 작가들의 작품 모두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며 이렇게 다양한 시대의 작가들을 동일한 키워드로 묶어 짧게나마 인권 문제를 조명한 저자의 구성과 글솜씨가 흡입력이 있다는 것이다. 


 굳이 불만을 꼽자면 내용들이 다양한 것에 비해 비교적 짧다는 것과 인권 문제를 오직 그림을 통해 들여다보는 터라 내용들의 호소력이 여느 페미니즘, 인권 감수성 도서에 비해서 옅게 느껴진다는 것이겠다. 저자의 전달력엔 문제가 없었고 도리어 작정하고 그림을 통해 현대에 중요하게 대두된 사회 문제를 살펴보는 게 참신하기도 했으나 예상 독자층이 조금 애매하다는 것은 짚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주 전문적인 미술책을 기대한 독자에겐 파트마다 계몽적인 문장으로 결말을 맺는 것에 질릴 수도 있고 또 아주 페미니즘적인 내용을 기대한 독자들 중 몇 명은 회화나 사진 감상에 별 관심이 없어 작가가 예상한 만큼 큰 감흥이 일지 않을 듯하다. 

 저자는 그림이나 인권 문제나 꽤 쉽고 거부감 없이 저술하긴 했지만 책의 내용 자체가 어떻게 보면 하이브리드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므로 어색함 내지는 불편함을 느낄 것도 같다. 그림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바라본다는 게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그렇게 일반적인 관념은 아닌 듯해서... 내가 너무 우리나라 독자들을 깎아내리는 것일까? 그림의 아름다움이 아닌 그림의 불편함을 주목하는 이 책의 주제가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와 닿을 것인지는 솔직히 반신반의하게 된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불편하고 불쾌한 거라면 덮어놓고 거부감을 보이는 사례들이 적잖기에 하는 말이다. 이는 이 책의 내용만 보더라도 익히 나오고도 남을 감상이다. 얼마나 많은 그림들이 그런 사람들에 의해 못 볼 꼴을 당했는지 원... 


 김태권 작가의 책은 이번에 처음 접했는데, 알고 보니 저서의 양이 제법 되는 터라 다른 책은 또 어떨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중 <히틀러의 성공 시대>라는 제목의 책에 눈길이 가는데, 이번에 읽은 책에서 드러난 작가의 역사 의식이 괜찮았던 기억이 나 그 책도 기대가 된다. 작가가 글을 쓰는 태도, 문제에 다가가는 솔직한 태도에도 좋은 인상을 받았던 터라 다른 저서를 읽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다. 



 p.s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미술과 건축으로 걷다, 스페인>을 시작으로 연달아 세 번째 접하다 보니 직관하고 싶어졌다. 언젠가 프라도 미술관에 가서 <시녀들>을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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