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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소울 2
가키네 료스케 지음, 정태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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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스포일러 : 15%
<와일드 소울>은 대충 지은 듯한 제목과 국내 한정으로 대충 만든 듯한 표지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비운의 작품이다. 명색이 일본에서 3개 문학상을 수상한 초대형 작품임에도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 너무 대충 홍보되고 디자인된 감이 없잖아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제라도 두 권을 한 권으로 합본시키고 멋들어진 표지로 재출간되기를 바란다.
예전에 읽었을 땐 제목도 시원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읽으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최선의 제목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꽤 함축적으로 잘 담아내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황폐한 야성의 상태, 일명 와일드한 상태에 처한 존재는 비단 주인공 일행만이 아니다. 케이의 말마따나 가난 냄새를 풍기는 일본, 정확히는 과거에 무수한 죄를 저지른 주제에 운 좋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던 일본 정부 역시 와일드하다. 겉보기에 세계 2~3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국이지만 속은 엄청나게 시커멓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우리나라 독자들은 특히 케이의 말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대놓고 일본 정부를 겨냥해 복수를 다짐하는 소수의 테러리스트들의 이야기인 <와일드 소울>은 그 제목 못지않게 단순하고 흡입력이 넘치며 읽히기도 엄청 빨리 읽힌다. 7백페이지면 제법 분량이 되지만 읽는 시간은 거의 3~4백 페이지 책과 흡사할 정도다. 오해하면 안 되는 게 그만큼 내용이 가볍다는 게 아니다. 분명히 밀도 있고 캐릭터들의 내적 성장을 묘사하는 구절은 사뭇 심오해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절륜했다. 출중한 가독성과 메시지, 대중 소설로 이만한 장점도 없을 텐데 그렇다 보니 3개 문학상 수상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됐다.
그래도 다시 읽어 보니 몇몇 부분에선 다른 인상을 받았는데, 우선 이야기의 전개와 주인공 일행의 계획이 다소 단조롭고 순조롭게 풀리는 경향이 있던 것, 그리고 케이의 캐릭터성이 신의 한 수이면서 독자에 따라 호불호 갈리겠구나 하는 감상이었다. 6년 전에 이 소설을 접할 때는 일본에 대한 인상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 19년부터 이어진 일본 정부의 만행을 몇 차례 경험하고서 이 작품을 읽으니 작중 일본 정부가 최소한 잘못이란 걸 시인하기라도 한다는 게 실로 어색하게 비쳐졌다. 작가가 그린 결말이 순진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만큼 일본 정부가 인간적인 도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니 그전에 현실에서 케이 일행처럼 공명정대한 테러를 펼친다 한들 과연 정부 차원에서 잘못을 시인할 국가가 과연 몇이나 되려나? 작품의 바람직한 결말에 감동 받은 한편으로 새삼 세상에 대한 환멸 또한 커졌다.
이 작품은 유수의 일본 추리 문학상과 랭킹에서 성과를 거두고 제목이 거론됐지만 통상적인 추리소설에 기대하는 트릭의 놀라움 같은 것을 기대해선 곤란하다. 앞서 언급했듯 이야기 구조도 단순하고 전개도 단조로운 등 완전 범죄의 묘미나 서스펜스가 압도적이지도 않다. 주제의식도 해석의 여지가 적은 등 기본 골자가 단선적인 작품이다. 내가 봤을 때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복수극의 진행 양상보다 케이라는 예측불허한 캐릭터의 행보에 있지 않은가 싶었다. 겉으로만 일본인일 뿐 속은 완전히 브라질인인 케이는 여느 일본 문학 속 캐릭터와는 확연히 이질적인 캐릭터성을 자랑하는데 이 느긋하고 호색한에다가 범죄를 저지를 때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특유의 모습은 자칫 지루할 수 있던 이야기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 넣었다.
특유의 호색한의 면모 때문에, 이를테면 다카코에게 접근한 방식 때문에 눈살 찌푸릴 독자가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케이가 워낙에 일관적으로 뻔뻔한 인물인 터라 이러면 안 되는데 싶다가도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데에 이견의 여지가 적어 보인다. 적어도 케이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된 인물이고 자신의 사랑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어서 남자인 내가 봐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죽하면 여자에게 접근하는 방식과 성적 자유분방함을 제외하면 케이를 내 롤모델로 삼고 싶었을 정도니 정말 말 다했다.
실제로 작가가 콜롬비아와 브라질로 취재를 다녀와서 그런지 남미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는데 - 그도 그럴 것이 취미가 무려 앵글로색슨계 나라를 제외한 해외여행이라니까... - 일부 낭만적인 시선을 차치하더라도 케이 같은 이방인의 매력을 극한으로 잘 끌어내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너무 케이 얘기만 해서 그렇지 그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 에토나 마쓰오, 다카코를 비롯해 다른 조연들도 비중을 막론하고 다 매력적이었는데 그중 처음 언급한 세 캐릭터가 맞이하는 결말이 모두 인상적이었다. 복수를 끝마친 뒤에 공허함은커녕 해방감을 느낀 에토와 벗어날 길 없어 보였던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는 마쓰오, 그리고 일을 정리하고 케이와 다시 이어지는 다카코...
작가는 과거의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일본이라는 나라가 조금은 괜찮은 나라가 되리라고 일말의 희망을 품은 것처럼 다른 캐릭터들 역시 일련의 사건 이후 희망적인 미래를 맞이할 것을 암시한다. 마치 아마존이란 밀림을 어느 정도 개척한 인간의 위대함을 찬양하듯 매서우리 만큼 쨍쨍한 햇빛을 내리쬔다. 암울하고 억울함의 극치였던 이야기 초반부에 비하면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산뜻하고 행복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꼭 내 영혼이 구원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껍데기만 따라다니는 인간도 평범한 성공은 거둘 수 있지. 현상을 보고서 그 대처법을 경험으로 알아나가기만 하면. 그런 경험을 통해 미래를 대처해 가는 거지. 약간만 똑똑한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그들의 의식 수준은 언제나 그런 정도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야. 즉, 처세술에 지나지 않은 거지. 그것은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나 나라가 바뀌거나, 또는 하는 일이 바뀌면 그대로 끝나버리는 거지. 그때까지 통했던 방법은 더는 통하지 않아. 하지만 그 껍데기에서 사물의 이치를 끌어내는 사람은 다른 세계에 가서도 살아남는 거야. - 1권 161p
마지막에 완성될 옷의 전체 모습을 언제나 머릿속에 떠올리고서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 전체 모습에 맞추어 세세한 부분을 맞춰나가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것만 있으면 솜씨는 좀 서툴더라도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떤 형태가 될 지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의식해야 합니다. 그러한 상상력을 갖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하지요. 영어로는 이것을 이미징이라고 합니다. 이미징이란 결국 센스라고 할 수 있겠지요. - 2권 152p
너희들이 말한 대로다. 복수에 불타고 증오를 증오로 철저히 덧칠한 끝에, 그 앞에 비로소 한 사람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적도 동지도 없다. 인종도 없다. 피의 색도 없다. 피부색도 없다. - 2권 330~331p
거대한 악의 싹은 언제나 커다란 사회의 물결 가운데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억지로 말려들게 한다. - 2권 3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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