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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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0 







 2편에서 드러난 이 작품의 전개 방식을 생각하면 1편은 사실상 캐릭터 소개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다음 작품인 <벌집을 발로 찬 소녀>를 생각한다면 1권의 내용은 이질적인 편이다. 1권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약간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느낌을 선사했다면 2편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부터 하드보일드 그 자체다. 물론 기자 출신인 작가가 전달하고자 한 사회 문제,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대한 묘사는 건재하다. 오히려 더욱 진화한 느낌이다. 특히 미카엘이 아닌 리스베트가 이야기의 주역으로 본격적으로 교체됨으로써 그러한 경향이 훨씬 짙어졌다. 

 이 소설의 배경, 그러니까 작가가 소설을 집필하던 당시는 2000년대 초반으로 아직까지 스웨덴이 매춘과 관련된 사회 문제와 전쟁을 벌이던 시점이었다. 역자의 주에 따르면 현재에 이르러선 포주들과 성매매 남성들을 철저히 벌하면서 제법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지만 - 그런데 이 말도 어디까지 믿어야 할는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성매매 산업은 남성의 그 죽일 놈의 성욕 때문에 필요악이랍시고 자취를 감추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자가 말한 '현재'란 2010년대다. 지금은 어떠려나. - 어쨌든 저자가 집필하던 당시엔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정부의 정책의 성공 여부에 회의적인 사람도 적잖았고 저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총 세 가지 종류의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리스베트가 누명을 쓰는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드러나는 그녀의 과거, 리스베트의 무고함을 믿는 지인들과 리스베트를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사회 부적응자라는 정부의 기록 때문에 선입견을 갖고 수사에 임하는 경찰들 사이의 대립, 그리고 주변에서 부는 피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홀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리스베트의 독주가 흥미롭게 얽히며 전개된다. 이야기의 발동은 전편보다 더 늦게 걸려 인내심이 요구됐지만 그래도 중반부부터, 1권 후반부부터는 몰입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저자가 초반에 지루하게 전개시킨 초반부가 대단히 촘촘했다거나 필수불가결했다거나 하다 못해 빌드 업이 잘 이뤄졌다고는 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만회를 잘하지 않았나 싶다. 결말은 대놓고 3편을 읽고는 못 베길 정도로 감질나지만 3편의 분량이 2편보다 긴 걸 떠올리면 오히려 적절한 끝맺음이란 생각도 든다. 3편도 다시 읽기까지 시간이 걸릴 테지만 그래도 벌써부터 읽을 날이 기다려진다. 

 대놓고 감질나는 결말이었다는 말은 사실상 본편에서의 갈등이 상당수 갈무리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리스베트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사건의 진상을 쫓는 리스베트의 지인이나 경찰들은 아직까지 이야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사실상 리스베트의 원맨쇼에 가까운 등 단일 작품으로서 아쉬운 결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뭐 아무튼 전편의 주역인 미카엘조차 이 작품에선 완벽한 조연에 머무르는데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묘하게 정이 가지 않는 캐릭터인 터라 - 기자 정신을 강조하는 모습은 그래도 멋지긴 하다. - 이러한 작가의 취급이 퍽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이럴 거면 1편에서부터 리스베트 단독 주인공으로 설정하면 어땠을까 싶지만, 작가가 강조하고픈 기자 정신이라든가 사건을 합법적인 부분에서 접근하려는 어딘지 순진하지만 정의롭기 그지없는 캐릭터 역시 이 세계관엔 필요한 터라 묘하게 정이 가지 않는 것과 별개로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오는 여자 막지 않고 여자들이 알아서 달라붙는 마성의 남자라는 캐릭터성은 10년 전에나 10년이 지난 지금에나 헛웃음을 유발하지만 말이다. 


 한때 '성인들의 해리 포터'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밀레니엄' 시리즈는 미카엘이나 리스베트나 성인은 돼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파격적인 캐릭터성을 보유하고 있다. 유럽에서라면 몰라도 아시아권에선 여자 주인공이 양성애자라거나 남자 주인공은 불륜을 저질러 이혼당했다는 설정은 2000년대 초반에선 쉽게 접하기 힘들었고 지금이라고 아주 쉽게 받아들여지는 설정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이 시리즈의 분위기나 컨셉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그야말로 모두가 쉬쉬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우리 사회에 생각보다 많은 아웃사이더들, 사회 부적응자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이 국가 최대 규모의 범죄 집단, 성매매라는 이름의 비즈니스에 맞서 싸운다는 시리즈의 컨셉은 그 자체로 정제되지 않았으면서 독한 기운의 주제의식으로 중무장했다. 그렇기에 호불호를 떠나 일정 수준 이상의 쾌감이 보장되고 선사되는 것일 테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두껍고 진입 장벽 높고 인내심이 요구되는 지루한 도입부의 소설이 큰 인기를 끈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단순히 노벨상 수상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비롯해 수많은 독자가 추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따라 읽었다기엔 이 작품만의 분위기나 설정, 주제의식은 확실히 독보적인 구석이 있다. 새삼스럽지만 역시 얕볼 수 없는 시리즈란 생각이 들었다. 


 자꾸 얕볼 수 없다느니 설명이 안 된다느니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는 이번 2편의 도입부가 참 인내심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 아마 1편을 건너뛰고 2편 먼저 읽은 것이었다면 50페이지 안에 때려쳤을 정도로 지루했다. 내가 원체 싫증을 잘 느끼는 편이지만 이건 좀... - 그에 반해 결말은 후속작 기대하기 딱 좋은 결말인 터라 어지간하면 포기하지 않고 완독하길 바란다. 게다가 중반부부터 액션, 가령 권투 장면이나 총격 장면도 많이 묘사되는 등 눈길을 끄는 요소가 많다. 물론 액션 때문에 보는 작품도 아니고 그 장면들도 곰곰이 생각하면 허술하고 개연성 떨어지게 전개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은 점에서나 예측 불허한 부분도 많았기에 이래저래 실보다 득이 많았다. 내 기억엔 이런 액션 장면이 3권에선 더 적어지는데... 작가가 표현하고픈 하드보일드한 액션을 이 작품 중후반부에 몰아서 묘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3편 <벌집을 발로 찬 소녀>에선 국가 규모의 압박과 고통이 쉴 틈 없이 리스베트를 향해 끊임없이 쏟아진다. 태생적으로 거기에 아랑곳할 리스베트는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타인의 도움 없이도 홀로 살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힘을 가진 사람은 극히 적은 법. 리스베트는 지인들에게 큰 도움을 받고 성매매로 인한 피해자들도 완벽하지 않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 구원을 받는다. 2권 중반부부터 미흡하게 묘사된 감이 있던 주제의식,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더욱 직접적으로 잘 드러난 수작인 터라 다시 읽는 그 날이 기다려진다. 3편은 꼭 스웨덴에 여행갔을 때 읽고 싶은데... 이런 낙관적인 바람을 언급하는 것도 점점 지친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미래는 도통 알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설마 코로나 이상으로 절망적인 시국이 펼쳐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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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욜로욜로 시리즈
라헐 판 코에이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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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는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에 등장하는 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소설이다. <시녀들>은 언젠가 꼭 직관하고픈 그림 중 하나인데 이렇게 소설로나마 간접적으로 그 그림의 탄생 배경을 접할 수 있던 게 흥미로웠다. 더불어 작가의 상상력이나 소재를 찾는 능력, 그리고 17세기의 스페인 마드리드라는 무대를 실감 나게 재현한 필력도 즐겁기 그지없는 요소였다. 작가가 오스트리아 사람이던데, 작가 입장에서 외국인 스페인을 배경으로 삼았으니 소설 집필을 끝마치기까지 적잖은 노력이 들어갔을 것이다. 자국의 사극도 힘든데 외국의 사극이라니... 나로서는 정말 엄두도 나지 않는 작업이다. 

 장애가 곧 죄나 다름없던 시대에 태어난 꼽추 바르톨로메가 더 나은 미래로 향한 실마릴 찾는 여정이 담긴 이 소설은 총 2부로 이뤄져 있다. 1부는 바르톨로메가 엘 프리모 같은 서기가 되기 위해 자신을 없는 자식 취급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글을 배우는 이야기가, 2부에선 비참하게도 '개'로 취급당하는 수모를 겪던 바르톨로메가 그의 재능을 인정는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기사회생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스포일러를 극도로 제한하는 이유는 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남의 입이 아닌 직접 읽으며 감상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고 장애인의 형편이 유달리 나아졌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극소수의 장애인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장애인이 광대 아니면 놀림감, 그걸 거부하면 남는 것은 비참한 여생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시대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바르톨로메의 처지는 나로 하여금 참으로 복잡미묘한 감정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일단 동정이 앞섰지만, 직장에서 장애인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꾀를 부리는 사람도 떠올라 장애인이 사회에서 얼마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한 번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장애인도 갖고 있는 장애의 성질이 다 다르잖은가. 단순히 장애의 힘겨움이나 또는 '장애인'이라는 호칭으로는 묶어내기 힘들 만큼 개개인마다 성정과 능력도 다르고 말이다. 이 작품의 바르톨로메 같은 경우엔 인체 비율에 능통한 벨라스케스 같은 화가가 보기에도 헉 소리가 나올 만큼 흉측한 외관의 꼽추이지만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티 없이 맑은 눈동자와 목소리를 갖고 있고 지적 능력, 예술적 능력도 탁월하다. 그 덕분에 온갖 수모를 겪었지만 재능도 인정받았고 앞으로도 비장애인에 비하면 아주 밝지만은 않은 미래가 예상됨에도 어쨌든 당대 장애인의 처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꽃길이 펼쳐지리라는 기대 역시 가능한 것일 터다. 

 하지만 모든 장애인이 다 바르톨로메처럼 티 없이 맑거나 재능이 남다른 것은 아니다. 장애 때문이든 그냥 기본적인 능력이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든 간에 작금의 장애인은 가족이나 사회의 관용적인 시선, 장애인 할당제 같은 제도가 아니면 살아가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장애인이 제아무리 비장애인들보다 배로 노력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외면당하기 십상이고 때론 장애인들 전체를 선입견 갖고 바라보게끔 만드는 몰상식하고 그 자체로 짐이 될 뿐인 장애인들, 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의 가족이 단지 가족이란 이유로 강요당하기도 하는 장애인에 대한 사랑, 헌신, 주변으로부터 받는 시선은 당사자가 아니면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어 장애인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무리 시간을 투자해도 꼭 답보 상태에 그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모든 장애인이 바르톨로메처럼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장애인을 바르톨로메처럼 대우하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다. 장애인이 편한 사회가 곧 모든 사람이 편한 사회라지만, 비장애인들끼리의 경쟁이 워낙 치열하고 각박해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거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장애인 예술가가 등장하지 않으면 장애인에 대해 생각하기 힘든 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민낯이 아닐까 싶다. 


 17세기를 배경이란 걸 감안한다면 주인공 바르톨로메는 아버지나 막내 동생을 제외한 다른 가족 모두로부터 비호를 많이 받았고 그 덕에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고등 교육이랄 수 있는 글과 그림을 공부하게 된다. 장애인의 입장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무게가 느껴졌던 것, 그리고 17세기에서의 글과 그림의 위상이 지금과 완전히 판이하다는 것도 제법 감동적이고 신선했다.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거의 0%이고 물감도 옛날처럼 고가가 아니니 간과하기 쉬운데 글과 그림이 17세기 사람들 사이에서 갖는 위상과 중요도가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라 - 비유하자면 글을 알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것이 컴퓨터를 어마어마하게 잘하는 수준의 재능으로 여겨진다. - 이 소설의 내용이 참으로 가슴 설렌 기분으로 읽혀졌다.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그들이 당하는 폭력과 외면의 수위가 약해졌을 뿐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느껴져 씁쓸함이 감돌았다면 글과 그림이 지금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살기 좋아졌고 소중한 것들로 가득하다는 걸 깨닫게 해 막판엔 심지어 감사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게 됐다. 

 이 작품이 얼마나 고증이 잘 이뤄졌는지 모르겠지만 뒤로 갈수록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흥미진진해 아주 만족하며 읽은 작품이다. 벨라스케스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도 매력적이었고 장애인 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왕족이나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이래저래 가능성이 제한되는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재능처럼 무형의 가치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보다 훨씬 높이 평가받는 분위기가 제대로 느껴진 것도 인상적이었다. 희로애락과 더불어 인간이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안목엔 시공을 초월하는 구석이 있음을 깨달을 즈음에 작가 나름대로 재구성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다뤄진다. 장애인의 인권을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방식으로 타협하되 그 안에서 개연성 있게, 또 최선이자 최고의 방식으로 표현해낸 전개가 아닐 수 없었는데, '<시녀들>의 개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이라는 설명에선 도저히 연상되지 않는 감동이 담겨 있어 꽤나 감탄했다. 엉뚱한 발상에서 출발한 이 소설의 만듦새가 실로 예사롭지 않아 새삼스럽지만 소설은 정말 대단한 예술이란 탄식을 뱉기에 이르렀다. 여느 좋은 소설이 그렇듯 이 소설도 나를 채찍질하는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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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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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이름 때문에 '한때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소설가'라는 농담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실제로 서머셋 몸은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높았는지는 몰라도 꽤나 탑클래스에 속한 문인인 것은 분명하다. <달과 6펜스>는 몸의 출세작으로 이 작품의 성공 덕에 그의 이전 작품인 <인간의 굴레에서>까지 재조명됐다고도 한다. 출간된 해가 무려 1919년에 나온 소설로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실제로 읽어보긴 처음이었다. 독특한 제목 때문에 늘 읽어야지 생각만 했었는데 막상 다 읽으니 본문만으론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없어 하마터면 대단히 실망할 뻔했다. 제목의 의미는 역자 후기에서 밝혀지는데... 은근히 기대하며 읽었던 것에 비해 당혹스럽고 불쾌한 내용의 작품이라 제목의 의미라도 알 수 있던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달(정신적인 가치)과 6펜스(세속적인 가치)라니... 잘 지은 제목이다. 

 스트릭랜드처럼 위대한 사람이라는 화자의 발언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시종 위대함에 대한 화자의 생각을 다소 두서 없고 장황하게 설명한 탓에 인내심이 심심찮게 요구됐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중이 아닌 집에서 읽었더라면 분명 책장에 도로 넣고 다른 책을 펼쳤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두의 내용이 꽤 중요한 편이었지만 어쨌든 서두치고 흡입력은 많이 떨어졌다. 아무튼 이야기의 시동은 화자가 파리로 가출한 스트릭랜드를 찾아내 가출의 이유를 따지는 장면에서부터 걸리게 된다. 뜬금없이 화가가 되고 싶다고 안정적인 직업과 처자식마저 내팽개친 것도 모자라 그에 대해 조금도 뉘우치거나 나 몰라라 하는 스트릭랜드의 태도가 보는 사람 기가 막히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뭐 기가 막힌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초반에 화자가 장황하게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에 대해 애기했기에 문제가 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어 의구심이 드는 한편 뒤가 궁금해졌다. 화자가 스트릭랜드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달라질 정도의 사건이 뒤에 펼쳐진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그 외면하기 힘든 궁금증 때문에 이래저래 밥맛인 스트릭랜드와 어째 시원시원한 맛이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는 화자 등 누구 하나 마음에 드는 인물이 없음에도 모처럼 시간을 내 인내심을 최대로 발휘해 하루 안에 완독해냈다. 그래서 결과는, 나에겐 끝내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이란 것이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굳이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예술가가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선 얼마간 부도덕한 일이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은근히 많다. 좋은 예술 작품이 분명 여러 사람의 영혼을 구하긴 하지만 그 예술 작품의 탄생을 위해 예술가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줘야 하는 것인지는 난 잘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어림도 없으며 그런 부도덕한 행위나 일탈에 기대지 않고서 예술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다면 예술가이기 이전에 정상적인 직업인으로서 대우받을 자격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극악한 범죄 행위를 제외하고, 때론 그런 행위들마저 포함시켜서, 인간에겐 누구나 권력에 대한 선망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스트릭랜드는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해 위악적인 태도를 유지한 건 아닌지 의심도 해봤지만 계속 읽어나가니 딱히 그렇지도 않고 그냥 타고난 도덕적 해이인 것 같아 다른 식으로 스트릭랜드의 됨됨이에 접근해봤다.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이라면 단연 그 예술성 덕분에 주변 인물들이 온갖 기행, 비행이 묵인해주는 것일 텐데 스트릭랜드는 이런 권력을 신인 시절부터 아낌없이 행사한 인물이다. 처음엔 모두가 코웃음을 치지만 이내 모두 호구인가 싶을 정도로 스트릭랜드의 재능과 매력 반해 몸과 마음을 바친다. 스트릭랜드는 그러한 사람들의 태도가 자신의 권력, 아니 특권이라 여기는지 후에 주변 사람들의 삶이 망가지고 그 원흉이 전적으로 자기자신임에도 죄책감도 갖지 않는다. 심지어 그 모습을 힐난하는 화자에게 대는 변명도 가관이라 과연 그에게서 '위대함'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장면이 뒤에 나올지 진심으로 걱정됐다. 그리고 그 걱정은 어느 정도 그대로 들어맞았다. 

 스트릭랜드는 고갱을 모델로 삼고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고흐는 어느 정도 알아도 고갱은 이름만 들어봤지 의외로 잘 모르는 화가였는데, 듣자하니 작중의 스트릭랜드는 고갱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며 실제 고갱의 삶은 그보다 저질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환상적인 문체로 미화 내지는 돌려 까였던 스트릭랜드와는 다르게 - 묘하게 돌려 까는 듯한 주제의식 전달 방법이 채만식의 '치숙'을 연상시켰다. - 현실의 예술가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이상하고 저질인 자들이 아주 많다. 달리도 기이하기 짝이 없고 피카소나 로댕, 디에고 리베라는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이 질색하는 작자들이다. 자의든 타의든 범죄 없이 평탄하게 산 화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화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가의 사생활의 난잡함, 그럼에도 그들의 '위대한' 업적에 그 사생활들이 묻히는 것은 결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니 위대함 운운하는 것이 나에겐 돌려 까기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아무래도 스트릭랜드가 화가라서 그랬던 걸까? 직접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봤더라면 또 모를까, 화자의 묘사만으로 상상하려니까 내가 소설을 읽으며 쌓아왔던 스트릭랜드의 부정적 인상이 방해해 그의 위대함이 화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만큼 내게 전달되지 못했다. 일부러 필력이 딸리는 화자인 척 작가가 의도하며 글을 쓴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 정도 필력의 저자인 것인지는 저자의 다른 대표작 <인간의 굴레에서>를 통해 확인해야 될 부분이지만... 적어도 이 작품만으론 내겐 '비인간적인 인간이 아이러니하게도 도달할 수 있던 위대함'보단 '위대한 예술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고평가를 받아온 밥맛 인간을 비꼬는' 한편의 블랙유머 소설로 읽혔다.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가급적 저지르지 않았으면 싶은 짓을 최소한의 망설임도 없이 척척 저지르니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예술가 지망생의 불굴의 의지라며 교훈을 얻기에도 참 거리감이 느껴졌다. 특히, 위대한 예술가와 좋은 인간은 양립하기 어렵다는 전제를 깐 것 같아서 말이다. 여담이지만 좋은 군인과 좋은 인간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호불호 갈리는 작품이지만 그만큼 이야깃거리도 풍부하고 읽는 사람의 가치관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라서 그 자체로는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내게 거의 확실하게 불호였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스트릭랜드한테 반감이 드는 것이 내 글이 시원하게 써지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떠올리게 하며 왜 나는 스트릭랜드만큼 단호하게 꿈을 향해 매진하지 못하는지 반문하게 만드는 등 그에게 모종의 질투와 열등감의 발로가 아닌가 하고. 글쎄, 내가 잘 풀리는 소설가라고 해서 스트릭랜드에게 퍽 공감했을 것 같지 않지만, 다른 건 몰라도 질투와 열등감은 지금의 나로선 정말 무시하기 힘든 민낯인 것 같다. 이 질투와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각고의 노력 말고는 답이 없겠지. 하지만 스트릭랜드와 같은 짓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몸소 증명하겠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 몰랐다. - 56p



여자는 말이오.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용서하지. 하지만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해. - 2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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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미식가 - 솔로 미식가의 도쿄 맛집 산책, 증보판 고독한 미식가 1
구스미 마사유키 원작, 다니구치 지로 지음, 박정임 옮김 / 이숲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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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초창기에 발매된 버전이 아닌 증보판을 드디어 읽게 됐다. 병원 밥마저 맛있게 먹는 고로의 에피소드와 저자들의 대담이 추가된 증보판은 비록 기존 발매 버전과의 차이가 적긴 하나 팬으로서 그 차이마저 놓칠 수 없었다. 

 드라마는 배우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시즌을 이어나갈 것 같지만 원작 만화는 더 이상 내용이 이어질 수 없다. 그림을 담당한 다니구치 지로가 몇 년 전에 별세했기 때문이다. 이 증보판에 새로 실린 대담에서 다니구치 지로의 생전 모습을 짧게나마 볼 수 있어 그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아직 살아계셨다면 3권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한편으로 드라마와 달리 만화는 2권에서 딱 멈춘 게 오히려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2권은 드라마 속 고로의 모습을 너무 의식해 기존의 고독한 모습보다 조금 해맑은 모습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1권에서의 냉소적이고 보수적인 모습이 나름대로 매력적인 요소였는데 그 미묘하고도 중요한 지점이 흔들린 것 같아서 차라리 2권에서 멈춘 게 다행이지 않은가 싶었다. 물론 그 이유가 그림 작가가 별세했기 때문이란 건 실로 애석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 1권에서와 같은 분위기라면 3권에선 그림이 달라져도 볼 의향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건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가 바뀌는 것관 차원이 다른 일이다. 만화 <고독한 미식가>는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이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본의 아니긴 해도 이 시리즈가 박수칠 때 우리 곁을 떠난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화는 드라마보다 훨씬 다채로운 식당 방문기가 담겨 있다. 드라마보다 메뉴가 다채롭진 않지만 식당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들, 가령 드라마에선 사실상 한 번밖에 다루지 않았던 실패담마저 만화에선 심심찮게 그린 편이다. 화려하지 않고 맛도 그냥저냥이지만 분위기나 가게 점원이 친절해서 기분 좋게 가게 문을 나서는 경우도 있잖은가? 반대로 음식 맛은 출중해도 사장이 밥맛이라 한바탕 싸우는 경우도 우리네 삶에서 적지만 분명 존재한다. 만화는 식당에서 겪을 수 있는 희로애락 거의 대부분을 그려냈고 간단히 길에서 먹는 간식을 비롯해 먹방물에서 다루지 않을 법한 야구장 식당이나 편의점, 심지어 맛이 없다는 병원에서 먹는 밥까지도 소재로 다룬다. 꼭 잘 차려진 음식이 아닌 단순히 뭔가를 먹는다는 행위 자체를 이렇게 사소한 순간 하나까지 진지하게 그린 작품이 또 있을까 싶어 황당하면서 정감이 간다. 

 그래서 진짜 별 내용이 없긴 하고 실제로 읽을 때도 가벼운 기분으로 읽지만 고로가 식당에서 메뉴 고민을 하거나 메뉴 선정 실패로 혀를 차는 모습이 공감이 가 기분 좋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뭐 이런 일상적인 내용을 만화로 다 그렸을까 하면서 도리어 그런 꾸밈없음과 과하지 않음에 매료된다. 작가가 생각하는 좋은 식당의 요소를 이 작품이 똑같이 갖고 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이른바 틈새시장을 잘 공략한 작품이라며 감탄스럽기도 했다. 이런 감성의 이야길 만화로 그려내겠다는 생각이 어떤 의미에선 혁명이니까. 


 아, 참고로 책 뒤에 실린 후기도 은근히 재밌다. 드라마에서 본 작가는 완전히 외향적인 사람이었는데 글로 접한 작가는 생각보다 쭈뼛거리며 어딘지 답답한 구석도 있어 과연 동일인물인가 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만화도 그리고 글도 쓰고 연주도 하고 간간히 연기도 하는 등 - <도쿄타워>를 쓴 릴리 프랭키가 연상된다. - 다재다능한 양반이 처음 간 지방의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식당이나 직원들에게 묘하게 쩔쩔매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웃기고 공감이 가는지 모르겠다. 

 최근 드라마도 별로 덜 고독해지는 마당에 사실상 진짜 '고독한' 미식가는 1권의 고로가 마지막이란 생각이 드는데 그런 점에서 이 1권은 더욱 귀중하다. 먹방이 주는 특유의 먹음직스러운 묘사는 당연히 드라마에 비해 떨어지지만 나름대로의 사유와 분위기가 압도하는 지라 드라마 못지않게 주기적으로 챙겨볼 듯하다. 그리고 다니구치 지로와 더불어 쿠스미 마사유키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어야겠다. 특히 쿠스미 마사유키의 경우 다른 작품을 접한 적이 없어 더욱 궁금하다. 

먹는 사람이 편안하고 안락하게 음식을 즐길 수 없다면, 최고의 요리라 한들 무슨 소용이오? 방해받지 않고, 혼자 조용히 식사할 수 없다면. - 1권 12화



음식을 먹을 때, 고독하게 혼자 무언가를 먹을 때, 나는 이노가시라 고로가 자유로웠다고 믿는다. 그는 그 순간 자유로웠다. 마음대로 행동하고, 시간이나 사회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허기를 채움으로써, 현대의 원시인으로 변하여 왜곡되었던 자신을 치유한 것은 아닐까. - 1권 작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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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이르는 병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8.7 







 철학 서적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책의 제목을 보고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일본 추리소설 좀 좋아하는 분이라면 <살육에 이르는 병>을 떠올릴 제목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직 읽지 못해서 비교는 못하겠지만 <살육에 이르는 병>을 읽은 나로선 이 책의 제목은 단순히 패러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너무 막 지은 제목이란 뜻은 아니고, 단지... 유명 책의 제목을 센스 있게 비틀어 저자 자신이 연쇄살인자에 대해 갖는 태도를 드러낸다는 게 은근히 재밌게 다가왔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하고 범죄는 개개인의 잘못이 아닌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병폐일 수 있다는 의견이 내가 알기로는 일본에선 80년대 후반에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긴 하겠으나 범죄자는 환경이 아닌 유전에서 더 많이 비롯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난 둘의 주장을 맹신하긴 그렇고 정확히 반반씩 맞는 얘기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 원인을 들여다보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 평소 내 지론이었는데 이 작품 <사형에 이르는 병>은 내 평소 생각을 그대로 실현시켜줘 꽤나 반가운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어둡고 가독성 떨어지는 이야기일지언정 말이다.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특징으로 타인을 자기 입맛대로 조종하는 특성이 정말 소름 끼치도록 잘 구현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공만이 아니라 독자인 나마저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는데 특히 사람의 성질이 서서히 폭력적으로 변질되어 가는 작중의 몇몇 사례로 인해 착잡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다. 결국 폭력성이란 타인이 심어주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내제됐는데 명분이 생기면 지체 없이 터지게 되는 것인가. 작품의 최종 반전에 비하면 이런 질문은 사사로운 수준에 불과하겠으나, 폭력이란 게 정말 주먹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실제로 가격하는 것만이 아닌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도 해당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됐다. 절대로 물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는 개가 없듯 사람 역시 경우에 따라서 동물보다 훨씬 충동적일 수 있기에 '폭력적인 생각을 품는 것의 위험성'이 전에 없이 와 닿은 것 같다. 

 물론 그 자제력 없는 몇몇 문제 있는 인간들 때문에 이 작품을 비롯한 추리소설, 폭력을 다룬 모든 창작물이 검열에 들어가는 건 또 다른 차원의 폭력이라 생각하고 나는 실제로 늘 그렇게 주변에 주장해왔다. 물론 이 작품의 주인공처럼 연쇄살인범의 일대기를 엿봄으로써 희색이 만면해지며 활력 있게 살아가는 골때리는 경우도 있지만, 이 작품의 반전을 생각해본다면 그조차도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한 결과이니 섣불리 '폭력성을 부추기는 작품'이란 근거로 창작물을 검열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도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린 이 작품의 소재와 이야길 통해 폭력의 위험성과 예측불허함에 대해 간과해선 안 되며 우리가 다소 폭력적일 수 있는 창작물을 정말 아무런 대가 없이 즐겨도 될 만큼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는 교훈도 얻었다. 


 쉽게 말해 이러한 작품의 내용은 픽션으로 즐기되 나중에 행여 문제가 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이런 책이나 보니까 저러지' 하고 주변에 책잡힐 만한 짓을 저지르거나 아니면 애꿎게 이런 책을 핑계로 내세우는 찌질한 짓은 제발 하지 말잔 것이다. 정말 과장 어린 교훈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이 작품의 불쾌함을 반면교사 삼으며 씻어내고 싶다. 그래, 반면교사... 어쩌면 높은 수위의 범죄를 다룬 창작물을 우리가 감상하는 이유는 단지 그 폭력에 매료당해서가 아닌 반면교사 삼으려고 접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른다.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감상을 이끌어내면 이보다 더한 교훈도 없으리라. 아, 그래서 작가가 이 책의 제목을 '사형에 이르는 병'이라 지은 건가? 그 병에 걸리지 말라고. 그 병에 걸리면 사람 목숨을 개미 목숨처럼 여기게 되지만 그러한 타락엔 끝이 있다고. 비꼬는 말이 아니라 정말 멋진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점점 더 마음에 드는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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