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9.9







 성장문학의 불문율 중 하나로 애늙은이 같은 주인공을 들 수 있겠다. 그들은 어른 못지 않은 통찰력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기에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 다시 말하지만 성장문학이라고 하면 꼭 공유하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만날 때마다 질린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만날 때마다 경이롭고 다른 그 어떤 주인공들보다 처절하다. 유독 이 작품이 그랬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하자면, 내가 일본 소설을 많이 읽는 걸 보고 변태 같은 소설임을 상정하고서 말을 거는 사람들이 꼭 있다.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닌데, 한 번이라도 우리나라 소설을 읽어보긴 했는지 진지하게 따지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진짜 뭘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쏘아붙이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정도다. 절대적이지 않지만, 우리나라 소설도 정말 일본 못지않게 변태 같다는 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특히 성姓을 묘사함에 있어서는 그 농도가 지저분하기 그지없다. 일본 소설은 차라리 해맑기라도 하지.


 상투적이지만 작품을 읽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었다는 얘기부터 꺼내겠다. 처음엔 가난한 소년이 나오길래 수없이 답습한 비극의 일종이겠니 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누나가 주인공을 거두어들이자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가난은 우리나라 소설에서 안 다뤄지는 게 더 이상한 낯익은 소재긴 하지만 다루는 방식에 따라 와 닿거나 지루하게만 여겨질 수 있는 법이다. 이 소설에선 1억의 빚을 진 주인공의 누나가 포주인 남자 밑에서 어떤 식으로 빚을 갚는지, 그리고 주인공은 그런 누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묘사하는데 아이의 눈을 거쳤음에도 잔혹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작품 속 문체가 투박한 게 상당히 독특했다. 흡사 번역 소설인 듯 주어 동사 목적어를 꼬박꼬박 넣어서 나열되는 등장인물들 대사가 어색하면서도 제법 느낌 있었다. 글쎄, 뭐라 말은 못하겠는데 이 문장이 가식은 개나 준 작품에 미치도록 잘 어울리긴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가난한 적이, 더욱이 이 작품의 주인공처럼 가난했던 경험이 없는데 나와 같은 모든 사람들은 이 작품의 이야기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말이 궁금해서 고통스럽지만 읽어나가야만 했다. 페이지가 줄어들어도 끝없이 고통스럽고 어두컴컴해서 불안한 와중에도 말이다. 날 것 그대로의 정경을 머리에 피도 마르기 전에 깨우쳐서 조금도 아이답지 않은 서술이 내 불안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위에 애늙은이 주인공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얘는 처음에 스스로 밝힌 것처럼 '늙은 소년'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 단순하면서도 모순된 단어가 그렇게 어울릴 수 없다.

 미래에 대한 꿈도 뭣도 없이 너나 할 것 없는 비정한 현실 속에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섥혔을 뿐이다. 하나같이 동정이 가고 하나같이 한숨이 나오는 행색들이다. 빚을 진 누나나 그 누나의 몸을 팔아 돈을 버는 포주나 누나를 사랑하고 만 공원이나 포르노 만화를 그리기 싫어 콜택시 기사로 연명하는 아저씨나 자신을 늙은 소년이라고 부르며 지나치게 냉랭한 주인공... 말할 필요도 없다. 실은 전부 외면하고 싶지만 이 작품은 그걸 허용하지 못하게끔 그들의 삶에 관여하게 만들어버린다. 제3자가 뭐 어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무력감, 마치 주인공이 겪는 것처럼.


 모르고 지나쳤더라면 정말 후회했을 작품이다. 물론 이 표현에는 어폐가 있지만, 말이 안 되는 표현을 써가면서 이제서야 읽은 나 자신을 꾸짖고 싶다. 불쾌한 작품이었지만 몰라선 안 될 불쾌함이기 때문이다.

너는 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지?

증오하니까요.

그건 사탄의 마음이야.

맞아요. 사탄의 마음이에요. 나는 사탄이 좋아요. 사탄은 맨날 지고, 욕만 먹고, 쫓겨 다니기만 하잖아요. 선생님은 맨날 천사처럼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천사는 가난하지도 않고, 더러운 옷도 입지 않고, 저 하늘 위에서 웃을 일밖에 없는데 왜 제가 천사를 좋아해야 하죠?

(중략)그때, 나는 내 머리를 온통 지배했던 막연했던 감정의 정체를 알았다. 그건 증오였다. - 25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우가 잠든 숲 1 스토리콜렉터 5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박종대 옮김 / 북로드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0








 고등학교 시절에 자기소개를 할 때 누가 자기 부모님을 존경하는 이유로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점을 들어 폭소를 유발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 참 엉뚱한 친구긴 한데 사실 그렇게 포복절도할 대목은 아니었다. 느닷없긴 하지만 공과 사를 구분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한때 대통령이었던 누구는 이 부분에 있어서 모두를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뭐, 굳이 전 대통령을 거론할 것도 없이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확실한 건 나는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을 짓는다고 단언하는 사람은 이제까지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게 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일까. 마치 고등학교 시절에 포복절도한 우리들처럼.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 8번째 작품이 나왔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필두로 독일 추리소설을 흥행시킨 작가의 신작이다. 거두절미하자면 난 서구권 추리소설, 특히 독일 추리소설은 취향에 맞지 않는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남들이 다 공감할 수 있게끔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정말 별다른 이유가 없다. 반쯤은 정이 들어서, 또 반쯤은 의무감으로 읽었을 뿐이라고 미리 공지한다. 이 작품을 읽은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이건 정말이지 내 취향에 따른 감상일 게 자명하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분량도 방대해지고 등장인물도 많아졌지만 - 그 많은 인물이 정말 다 필요했는지 의문이 들지만 -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출판사의 어마어마한 푸시 덕에 시리즈의 팬이라면 감탄할 아기자기한 편집은 눈에 띄지만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은 여전하다. 딱 하나, 보덴슈타인의 과거사가 개입됨으로 인해 수사에 변수가 생겼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에서 주인공의 개인사가 사건에 개입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유독 서구권 추리소설에는 이런 게 극심한데 주인공에게 사건의 해결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의 역할까지 부여하는 것 같아 읽을 때마다 당혹스러워 헛웃음마저 나온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주인공이 자기 스스로가 사건의 초반부터 얽혀있단 것을 아는 것과 사건 해결 말미에 도달해서야 얽혀있단 것을 깨닫는 두 가지 패턴이 있을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전자였다. 보덴슈타인이 40여년 전에 겪은 어떤 사건이 현재의 자신과 자신의 지인들을 다시 찾아와 마주한다는 얘기는 그런대로 읽을만 했다.


 긴 시간 동안 묻어둔 공포스런 기억이 찾아오자 겁에 질려 입을 다무는 마을 사람들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보덴슈타인처럼 공과 사를 좀처럼 구분 짓지 못해 진땀 빼는 인물 역시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의 일화가 떠올랐다. 새삼스럽게도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게 누군가에겐 죽기보다 어려울 수 있고 누군가는 당연히 구분하지 않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갈팡질팡하다 이도저도 아닌 채 물러나기도 한다. 공과 사를 구분 짓자고 읽은 소설은 아니었지만 작가인 넬레 노이하우스의 노림수가 어느 정도는 적중하지 않았나 싶다. 보덴슈타인에 대한 서비스... 라 부르긴 좀 그렇지만 아무튼 유독 이 캐릭터에 감정 이입이 된 건 사실이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헬프 2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5






 <헬프>는 작년에 본 가장 좋았던 영화 - 어디까지나 작년에 본 영화지 작년에 개봉한 영화는 아니다. - 중 하나다. 보통은 원작 소설이 있으면 소설을 먼저 읽고 그 뒤에 영화를 접했는데 얼떨결에 영화를 먼저 보고 말았다. 다행히 영화를 먼저 본 덕분에 소설을 좀 더 재밌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최근 <분노>라는 영화를 봤는데 지금 할 얘기의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겠다. 그 영화는 원작 소설보다 더욱 흡입력 있게 연출됐는데 차라리 영화를 먼저 봤더라면 소설을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헬프>를 소설로 먼저 접했다면 마찬가지의 감상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간혹 영화를 먼저 보는 게 괜찮은 경우가 있는데 연달아 접하니 얼떨떨하다.


 이 작품이 그렇게 허접하다는 뜻은 아니다. 어쩌면 영화를 너무 의식했는지 모르겠다. 일부 각색을 제외하곤 내용면에서 판이한 부분은 없는데 아무래도 문장의 문제가 컸던 것 같다. 내가 번역 가지고 뭐라고 할 주제는 못 된다고 생각하지만 읽는 내내 원래 작가의 문체가 이렇게 딱딱한 것인지 - 작가의 데뷔작이니 그걸 가능성도 높다. - 아니면 번역의 문젠지 적잖이 궁금했다. 특이하게도 이 작품에선 굵은 글씨를 사용해 서술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그게 너무 빈번히 사용되다 보니 가독성을 헤쳤다. 충분히 묘사로 처리할 수 있는 부분도 굵은 글씨를 남발해 읽으면 읽을수록 작품에 대한 신뢰감이 떨어졌다.

 개인적으로 영화만 봐도 상관 없다고 보지만 그래도 역시 좋은 내용이라서 그렇게까지 저평가하긴 주저된다. 분명한 건 문장만으로 훼손될 수 없는 주제의식을 이 작품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빌린과 미니, 그리고 스키터로 구성된 3명의 주인공들의 시점이 교차되며 진행되니 나름 매력적이었다. 그게 장면 전환이 빠른 영화와는 차별적인 기능을 한다고 보긴 어렵지만 영화가 미처 담지 못했거나 생략했던 디테일한 묘사가 있으므로 - 그 어떤 매체도 디테일 면에선 소설을 따라올 수 없다. - 그것대로 의미가 있었다.


 영화와 비교만 하다 글을 마무지 짓기도 뭐하니 지난 영화 포스팅 때 정리 못한 이야길 이어 써보겠다.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차별이란 것이 어째서 가져선 안 되는가를 여지없이 깨달을 수 있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에 이런 장면이 있다. 나치의 한 장교가 영사기를 돌리는 작업을 베테랑 기사에게 시키지 말라며 교묘히 명령한다. 왜냐하면 그 베테랑 기사는 흑인이었는데 히틀러가 볼 영화를 어떻게 흑인이... 여기까지 쓰겠다. 아무튼 이 장면에서 우리는 나치가 비단 유대인만 아니라 그저 자신과 다른 인종을 차별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헬프>는 흑인에 대한 극심한 차별이 만연했던 미국 남부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둔 작품이다. 흑인들도 이런 풍토에 거의 체념했고 오히려 스키터가 흑인의 인권에 대한 책을 쓰려고 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음을 넘어 목숨이 위험해질 지경의 행위로 비춰진다. 그렇다 보니 작품 속에선 흑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을 둔 인물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데 하나하나 살펴보면 인성들이 아주 가관이다. 여자란 자고로 남편 잘 만나 가사와 육아 등 내조에 전념하는 게 최고라 믿는 친구나 일을 구해 독립하겠다는 딸을 두고 한심하다는 듯 치장에나 신경 쓰라며 잔소릴 해대는 스키터의 엄마, 자기 자식에 애정을 쏟지 못하고 방치하는 여자부터 자기 전남친하고 결혼했다는 이유 때문에 한 여자를 마을로부터 왕따시키는 치졸함이나 자기 가정부를 교묘하게 감옥에 넣는 소인배 등 눈뜨고 못 봐줄 지경이다.


 차별이란 연쇄 작용이 있는 것이지 않을까.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수적인 생각에 자신의 고집을 불어넣어 차별을 공고히 다지려는 사람은 여타 문제에 관해서도 차별적 언동을 이 작품에서 유감없이 보이곤 하지 않았는가.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가 흑인도 싫어하듯 흑인을 차별하는 사람들이 전근대적 여성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에 휘둘려 일상 속에서도 폭력을 휘두르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이건 굉장히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작품의 장치, 이른바 밉상 캐릭터를 더 밉상으로 보이게 하려는 작가의 노림수에 걸려든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법 일리가 있는 이야기지 않냐며 반문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차별 속에 내제된 심리를 간과할 수 없으니 꼭 검토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이미 봤지만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한두 번 감상하고 끝낼 작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접하게 될 것 같다.



http://blog.naver.com/jimesking/220764360807 

 이건 영화 <헬프>의 포스팅.



 p.s 영화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어떤 인물의 대사가 소설에선 나오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그 대사는 다분히 신파적으로 영화로면 노릴 법한 대사였다. 신파적이든 뭐든 좋은 게 좋은 거지만.

문제를 일으키려는 게 아니야, 스튜어트. 문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어. - 24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망노트
우타노 쇼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8.9







 지금은 좀 시들해졌지만 우타노 쇼고는 서점가에서 꽤 인기 있던 작가였다. 작가의 작풍을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다. 오타쿠, 싸이코, 변태...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의 온갖 안 좋은 유형의 인물이 대거 등장하는 작가의 작품들 - 국내에 제일 먼저 소개된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제법 이질적인 작품이었구나 싶다. - 은 그리 환영받을 만한 내용들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수요가 많은 작가였고 그에 응답하듯 많은 작품이 국내에 소개됐다.

 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사실 모두가 다 안다. 우타노 쇼고가 뭘 쓰건 잘 쓰는 작가라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쓴다... 우타노 쇼고는 정말 잘 쓰는 작가가 아니던가. 본격이든 사회파든 서술 트릭이든 추리소설로는 더할 나위 없는 작품들을 써냈으며 하나같이 수준급의 몰입도를 자랑한다. 개중에는 범작도 있고 너무 막장이라 눈살 다 찌뿌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우타노 쇼고의 작품만 읽으면 이 작가는 진짜 잘 쓴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곤 한다.


 참 좋아하는 작가였지만 최근 몇 년간 국내에 소개된 작품들이 기대 이하라서 잠시 관심을 거뒀다가 정말 오랜만에 집어든 게 바로 이 작품이다. 평점을 보면 알 수 있듯 아주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내가 왜 우타노 쇼고를 좋아했는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최근 오쿠다 히데오의 <침묵의 거리에서>를 읽은 참이라 집단 괴롭힘 소재를 또 접하기는 거부감이 들었다. 더구나 주인공의 일기가 분량의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초반 주인공의 어투가 중학생답게 직설적이고 감정적인 경향이 있어서 이런 문장이 계속 이어지면 힘들겠다고 지레짐작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정공법으로 파고드는 작품인데 그 점에서 작가의 진가가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예상 가능하게 흘러가지만 깊이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이건 좀... 더도 덜도 말고 정말 잘 쓰는 작가라는 생각만 든 채 통째로 삼키듯 읽어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를 솟구치게 만드는 한심한 아빠, 생활고에 시달려 알게 모르게 아들에게 무관심한 엄마, 존 레논에 미쳐 사는 아빠 때문에 붙혀진 이름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된 숀 - 존 레논의 아들 이름이 숀. 숀의 엄마 이름은 요코... 이 존 레논이라는 키워드를 이렇게 무궁무진하게 다루다니, 이건 오쿠다 히데오도 몰랐을 것이다. - 은 자신이 겪은 폭력의 일상을 '절망노트'에 적는다. 노트 전면을 '절망'이라는 글자로 도배시킨 이 절망노트는 이름에서처럼 감정의 심연을 톡톡히 선보인다. 교묘하고도 도저히 구제할 길 없어 보이는 교실에서의 괴롭힘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기분 한 번 울적하게 만드는데 폭력이 심화될수록 긴장감은 더욱 커진다.

 인간이 신을 찾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이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돌파구로써 매달리는 대상이기에 기도를 드린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신들은 실존하지도 않고 책임감도 없으며 기도하는 당사자도 절박하지만 기대는 안 하기에 일종의 퍼포먼스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 기도가 정말 이뤄진다면 어떻게 될까? 작가는 이를 집단 괴롭힘 문제에 대입해 풀어낸다.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법한 단순한 발상이지만 작가 나름의 개성으로, 더욱이 필력으로 파고든다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작가는 이 난제를 제대로 풀어낸다. 반전이 망쳐버리지만.


 우타노 쇼고의 진가는 반전에 있다고 하는데 이번 작품은 전개 부분이 훨씬 좋았다. 추리소설이 반전 하나만 바라본다는 야유를 듣는 반면 우타노 쇼고의 추리소설은 반전만큼이나 전개에서의 복선이나 몰입도가 탄탄하기로 정평이 났다. 이것 때문에 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번 작품에선 반전이 작품을 망쳤고 반전 이전까지의 내용이 무진장 좋았기에 아쉽기 그지없었다.

 작중의 여러 반전이 작가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놀랍긴 했지만 작품 내용과 겉돈 게 문제였다. 사회적 문제인 집단 괴롭힘 문제를 숀의 심리와 맞물려 그토록 잘 파고들었으면서 정작 풀어낸 것들을 다 내팽개치는 마무리라니... 그렇게 허무할 수 없었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반전과 주제의식과 소재가 아주 잘 들어맞아서 지금도 최고의 작품으로 꼽을 정도고 누가 추리소설 좀 추천해달라고 하면 두 손가락 안에 꼽는 작품이기까지 하다. 이 작품도 반전 직전까진 그 작품에 근접하게 전율하며 읽었는데 계속 말했듯 그놈의 반전 때문에...... 반전에 치중하지 말라는 말이 이렇게 진심으로 우러나온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기껏 느낀 전율이 다 가라앉았지만 한편으론 반전의 내용이 아주 무익한 통찰도 아니라서 결론적으로는 기분 나쁘게 책장을 덮거나 하진 않았다. 이다지도 어둡고 막장이지만 능숙하게 소화해내는 작가 덕분인지 결점조차도 스스로 변론하게 된다... 아무튼 정말 오랜만에 작가의 작품을 읽었는데 그동안 잊고 있던 작가의 필력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전에 읽은 작가의 작품들도 다시 읽고 싶어졌다.



 p.s 제목이 <데스노트>를 연상시킨다. 나만 그런가? 어떻게 보면 비슷한 내용이기도 하...네.

그들만이 아니라 세상의 누구도 괴롭히고 싶지는 않다. 그럴 까닭이 없다.

이렇단 말은, 나는 괴롭히는 무리로 갈 수 없다는 것. 이렇단 말은, 나는 이대로 죽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도 당하지도 않는 위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두 부류밖에 없으니까. 괴롭히느냐, 괴롭힘을 당하느냐.

이상하다. 이런 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 정신상태가 이상하다.

말인즉 ‘인간은 두 타입으로 나뉜다‘는 전제는 틀렸다. 틀린 방정식에 대입해서 사물을 판단해봐야 이상한 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인간을 두 타입으로 분류하려고 하다니, 원. 사람의 행위라는 것은 복잡다단한 것이다. - 26p




뭔가를 손에 넣으려면 때로는 스스로가 광대가 될 줄도 알아야 해. - 54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키나와의 눈물 -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메도루마 슌이 전하는 오키나와 '전후'제로년
메도루마 슌 지음, 안행순 옮김 / 논형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9.9







 최근에 본 영화 <분노>에서 오키나와의 문제가 주요 소재로 다뤄졌다. 문득 오키나와의 미군 문제에 관심이 생겨 이 책을 읽게 됐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오키나와는 동양의 하와이로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 나와 유명해진 여행지일 것이다.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에서 주인공네 가족이 튀는 '남쪽'도 바로 오키나와다. 4년 전에 가족끼리 여행간 곳이기도 하다. 그때는 마냥 좋기만 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오키나와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분노>에서 받은 충격을 훨씬 능가한다.

 네이버 책에는 저자 이름이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데... 저자는 <물방울>이란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메도루마 슌이다. 오키나와 출생이며 오키나와의 현실을 작품 속에 풀어내는 저명한 작가이자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오키나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아직 작가의 소설은 접해보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으니 궁금증이 생긴다. 오키나와에 대한 작가의 주장이 이렇게나 울려 퍼진 걸 보면 작품을 보통 잘 쓴 게 아니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오키나와는 일본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변방이고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부로부터 외면당하다시피 한 곳일 텐데.


 오키나와가 피로 점철된 땅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만 작가가 자신의 증조부모, 조부모,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들은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서술된 오키나와의 근대사는 남다른 몰입감을 자아낸다. 오키나와의 근대사는 우리나라 제주도의 근대사와 흡사한데 - 위치나 사람들의 인식 등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 오키나와는 전범 국가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하단 점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오키나와는 본래 '류큐'라는 이름의 별개의 나라였다. 이 말은 문화, 언어 등이 달랐던 하나의 나라를 일본이 침략해 자기 나라 영토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일제 강점기 시절의 우리나라처럼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얘긴데 이 과정에서 류큐인들은 일본인이 되고자 부던히 노력했다. 정작 일본의 '본토인'은 이런 류큐인들을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이나 우리나라의 '조센징'처럼 차별 어린 시선으로 대했지만... 이후 2차 세계대전 때 위치 때문에 미군과의 격전지가 된 오키나와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을 위해 입대하지만 실상은 일본군의 총알받이 신세거나 포로가 됐을 시 자결할 것을 세뇌받는 등 대우가 말이 아니었고 미군에게는 학살당하는 등 이래저래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이 책은 전후 60년, 1945년에서 60년이 지난 2005년에 출간됐으며 첫 장의 내용은 '전후'라는 단어가 오키나와에 있어 얼마나 부적절한 표현인가에 대한 작가의 주장이다. 전후라 함은 분명 전쟁이 끝난 후를 가리킬 텐데 오키나와는 아직도 전쟁 중이라는 것이다. 이는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가 휴전 중인 것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야기다. 일본의 그 어떤 곳보다 미군이 많이 주둔한 오키나와는 특히 기지 주변에서 성폭행 등 갖은 문제가 여전히 속출하고 예상할 수 있듯 부조리한 판결 때문에 인권이 유린 당해왔으며 그렇다고 일본 본토에서 대우받지도 못하며 오히려 차별의 대상이라는 내용이 전개된다.

 일본 본토가 괜히 오키나와의 분노를 돌리고자 휴양지와 관광지로서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등 사탕만 물리려는 모습이 얼마나 속 뒤집어지는 일인지도 상세히 저술되어 있는데 읽으면서 많이 뜨끔했던 부분이다. 오키나와에 대한 기분 좋은 추억만 갖고 있는 나 역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있어 결코 환영 받지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왜 오키나와가 그토록 일본에게서 독립하고 미군을 철수시키려고 시위를 하는지 한 번이라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스스로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 땅의 역사에 무지한 채 편협한 이미지만 주목하며 수박 겉 핥는 수준의 관심만 보인 게 못내 부끄러웠다. 이 책을 이제서야 읽었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가 오키나와에 가기 며칠 전엔가 출간된 책이었는데...


 체험담과 작가의 통찰, 거기에 면밀한 자료가 뒷받침된 아주 유익한 책이었다. 오키나와에 대해 제대로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이만한 의식 있는 사람이 쓰는 소설은 또 어떨지 정말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