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디리 dele 1
혼다 다카요시 지음, 박정임 옮김 / 살림 / 2021년 4월
평점 :
7.6
<디리>는 의뢰인의 사후에 데이터를 지워주는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을 다룬 작품이다. 의뢰인의 실제 사망 여부를 확인하는 것을 비롯한 현장 업무 전반은 유타로가, 유타로의 보고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데이터를 삭제하는 업무는 사장인 케이시가 담당하고 있다. 케이시는 데이터를 지우고자 했던 의뢰인의 유지를 받들어, 설령 법의 테두리에 걸쳐진 사안이라 할 지라도 망설임 없이 데이터를 지우려 하는 반면 휠체어 신세인 케이시 대신에 현장 업무를 맡고 있는 유타로는 고인인 의뢰인이 남긴 데이터의 진의가 궁금해 데이터의 내용을 확인은 해보자는 것으로 둘은 시종 의견 차이를 보인다.
의뢰인 입장에서야 당연히 케이시의 완고한 모습에 손을 들어주고 싶겠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종 자체에 의구심과 반감을 갖고 있다. 당장 업무의 한 축을 담당하는 유타로부터가 그렇잖은가. 그는 데이터의 내용을 확인했기에 오히려 의뢰인의 유지를 더욱 받들었다고 주장한다. 의뢰인의 유족들도 어떤 경로로든 디지털 장의사의 존재를 알고 찾아와 데이터를 지우지 말라며 시비를 걸거나 무엇이 고인을 위한 행동인지 이해해달라며 애걸복걸한다. 물론 케이시는 우직하게 거절하고, 유타로와 논쟁을 벌일 때도 굳이 데이터를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바뀌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단정한다.
유타로와 케이시의 주장은 각자 일리가 있어서 독자마다 달리 판단할 일일 테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안마다 다르므로 케이시의 태도는 답답하고 유치하기 그지없었다고 못을 박아두겠다. 그와 동시에 유타로가 엄청나게 오지랖이 넓어서 케이시와는 다른 느낌으로 답답했다. 뭐, 덕분에 밋밋하고 반복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윤택해졌지만 말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신선함과 준수한 완성도, 그리고 여운을 잘 연출한 수록작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에피소드와 '스토커 블루스', '인형의 꿈'이 기억나고 마지막 에피소드는 이야기와 세계관을 너무 싱겁게 갈무리하는 느낌이라 안 좋은 의미로 기억에 남았다. 앞선 세 작품은 혼다 다카요시의 감성이 디지털 장의사란 설정과 맞물려 대단한 시너지를 일으켰는데, 특히 '인형의 꿈'은 억지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교함이 돋보이는 반전과 감동이 있어 사뭇 감탄스러웠다. 무엇보다 오직 디지털 장의사란 설정을 통해서만 끌어낼 수 있는 감동이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을 듯하다.
반대로 마지막 에피소드인 '그림자 추적'은 유타로의 전임자인 나쓰메처럼 그간 언급만 됐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유타로의 과거를 풀어내는 대망의 에피소드였는데... 들인 분량에 비해 거둔 성과는 미미했다. 아니, 사실 떡밥 회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케이시의 정체에 얽힌 반전이 도리어 케이시의 캐릭터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던 것, 그리고 이 에피소드에서 유타로의 분노가 다소 맥없이 해소되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이 작품 하나만 놓고 보면 기승전결이며 완성도엔 문제가 없고 솔직히 수록작들 중 가장 몰입도가 있었지만, 금방 언급된 두 요소 때문에 뒷맛이 나빴다.
이는 아마 마지막 에피소드의 내용이 미리 구상되지 않고 작품이 시작됐다가 후에 급조된 설정이 반영돼 벌어진 사달인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의뢰인의 유지 운운하는 케이시의 태도가 지나치게 내로남불인 꼴이 되는데, 유타로 못지않게 나 역시 배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닌 터라 작가가 반전을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란 삐딱한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작품의 한 축을 담당하는 캐릭터의 캐릭터성 붕괴는 잘만 연출하면 호불호를 떠나 작품의 좋은 요소로 안착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엔 해당 사항 없는 얘기다. 의뢰인의 유지는 개뿔, 정말이지 자기기만이 따로 없잖은가.
간혹 몇몇 수록작에서 억지 감동을 끌어내려 한 것, 어딘지 모르게 중2병스러웠던 인물들의 말투까지 눈에 밟히는 요소가 자잘하게 있었지만 상술했던 케이시의 캐릭터성 붕괴 하나로 쌓였던 불만이 일제히 터져버렸다. 개개의 수록작은 나쁘지 않았는데 참... 어쨌든 마지막이 이렇게나 중요하단 걸 깨닫게 해준 터라 좋든 싫든 반면교사로는 확실히 각인이 됐다.
<디리>는 일본에선 드라마화까지 되는 등 제법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드라마가 잘 만들어졌나? 의뢰인의 유지를 받들어 데이터를 지우려는 케이시는 자주 '신뢰'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는데, 나에게 신뢰를 잃은 이 작품이 드라마로 각색된 버전이라고 해서 신뢰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지 않을 것 같은데 드라마를 볼 일은 결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