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드 러브 ㅣ 메타포 8
엘렌 위트링거 지음, 김율희 옮김 / 메타포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9.2
부모님은 이혼했고 편모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 존은 제법 냉소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아빠는 향락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함께 살고 있는 엄마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 등 전반적으로 부모가 치명적인 결함은 없는데 자식으로서 기댈 만한 위인들이 아니다. 그나마 엄마는 아빠라는 나쁜 남자에 데여 아들에게도 마음의 벽을 느끼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에 갈팡질팡하며 호들갑을 있는 대로 떠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어쨌든 주인공의 나이대가 사춘기, 한마디로 중2병 걸리기 딱 좋은 즈음이라 이러한 자신의 성장 배경에 냉소를 넘어 환멸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읽는 입장에서 청승 떠는 것 같은 느낌도 없잖았지만 글을 쓰는 캐릭터라 그런지 기본적으로 몰입을 유발하는 캐릭터였다.
그런 냉소적인 성격의 존이 우연히 연상의 멋진 여자인 마리솔에게 반하게 되는데 하필 그 여자애가 레즈비언이란 것이 이 작품의 주요한 골자다. 어쩌다 보니 마리솔과 대화하게 되지만 자신의 성정체성으로 대놓고 철벽을 치니 존은 자신 또한 성정체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식으로 상대의 의심을 무마해 친분을 유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존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시작으로 이름부터 세부적인 사항까지 거짓말을 하는 반면 마리솔은 자신이 레즈비언이며 그 사실 때문에 부모님과 사이가 틀어진 것 등 솔직하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는다. 이런 태도의 차이가 예정대로 둘의 관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존은 거짓말을 넘어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글을 편집해 발간하는 1인 잡지라는 설정도 흥미로우며 1인 잡지를 계기로 만나는 두 남녀가 태생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관계인 것도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거기다 존이 들이댈수록 존 못지않게 냉소적으로 굴면서도 순순히 응해주는 마리솔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이는 성정체성이 칼로 나뉘듯 딱 정해지는 게 아님을 반영한 전개인 듯하다. 영화 <캐롤>에 나온 '여성이어서 좋아한 것이 아닌 좋아한 사람이 여성이었더라'는 대사처럼 마리솔 역시 처음엔 존에 대한 감정을 우정이라 느꼈지만 독자인 나는 우정과 사랑 그 중간 어디에 있는 감정으로 존을 대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국 존의 사랑은 그가 원하는 형태로 결실을 맺지 않아 참으로 안타까웠다.
하지만 꼭 결실을 맺어야지 사랑인가. 때론 좌절도 사랑이고 성장이며, 짧은 시간이나마 마리솔이란 좋은 인연을 가졌으니 무의미한 일이라곤 볼 수 없다. 오히려 사랑을 냉소적으로 바라봤던 태도만큼은 자신이 몸소 사랑에 빠짐으로써 버리게 됐잖은가. 다소 가혹한 형태의 성장이긴 하나 자신이 이를 통해 성장을 했고 벽을 넘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는 것으로도 박수를 칠 만한 일이다. 마리솔의 조언으로 부모나 친구와의 관계도 개선되고 자신이 환멸을 갖던 주변 사람의 소중함도 깨달았으니 비록 연인 관계로 발전하진 못했으나 마리솔의 등장이 존의 인생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연임은 부정할 수 없겠다.
글을 통해 맺어진 인연이라 둘의 대화 내용도 깊이 있고 30년 가까이 전에 출간된 작품치고 성정체성에 대한 통찰도 예리해 여러모로 곱씹으며 읽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성장 소설은 다시 읽으면 내용을 떠나서 문체가 유치하고 사건의 규모나 깊이가 얕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이야기의 규모 자체는 작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나 좌절하는 과정은 실로 보편적이고 진지한 주제인 터라 서른이 넘어 다시 읽어도 변함없이 몰입하고 음미하며 읽을 수 있었다. 오히려 존과 마리솔의 사유나 마리솔을 향한 존의 사랑이 워낙 진지해 십 년 뒤에 다시 읽어도 더 원숙한 맛이 느껴지리란 생각마저 들었다. 아마 진짜로 십 년 뒤에 찾아 읽게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