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지음 / 귤프레스 / 2018년 1월
평점 :
9.6
아마 우리나라, 아니 전세계에서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도서 중 접근성이나 세련됨이란 측면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대비되는 서늘하고 섬뜩한 묘사가 은근히 압박감이 넘쳐서, 며느리의 부당한 처지를 깨닫는 사린의 심정을 독자들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성 독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남편이나 자식들, 시어머니들도 느끼는 바가 상당하리라 본다. 시아버지들은 글쎄.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만약 우리나라에서 펼쳐졌고 그때 꼭 하나의 문화는 없어져야 한다고 가정을 해본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제사 문화를 희생양으로 내놓을 것이다. 성함이나 나와의 관계도 모르겠는 조상을 위해, 없을 것이 확실한 사후 세계를 향해 모처럼 쉬는 명절에 음식을 해야 하는 것도 부당하거니와 그걸 여자들을 비롯한 아랫사람이 도맡아야 하는 것도 이상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의도 자체는 괜찮은데 그 행사를 이뤄나가는 기성 세대의 방식이 지나치게 무지성적이고 철저하게 남성 위주로 설계됐다는 것이 문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되짚기도 까마득할 만큼 뿌리 깊은 문제인 터라 없던 두통도 생길 지경이다.
물론 작중에선 명절만 주요한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린이 해외로 장기간 출장을 간다니까 남편 두고 출장 가는 새색시가 어딨냐며 자기 아들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하는 시어머니나 그런 시어머니한테 '회사 생활 한 번도 못해본 티 내지 말라' 며 꼽주는 시아버지나 결국엔 아내가 출장을 간 동안에만 잠시 친가에서 출퇴근하며 밥을 먹겠다는 철없는 남편 등;;; 캐릭터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암을 유발한다. 아기자기한 그림체가 무색할 정도로 현실적인 작풍이 실로 압권이었다.
주인공 사린이도 시가 사람들 못지않게 답답했다. 허나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며느리는 서열상 최하층에 속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사린이 마치 입에 재갈이 물린 것처럼 구는 모습이 씁쓸하지만 이해가 되기도 했다. 사린도 나중에 혼자 있을 때나 남편 구영한테 자신의 답답한 처지에 대해 한탄을 쏟는데, 나는 치졸한 변명이나 해대는 구영과 달리 사린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란 걸 먼저 강조하며 그녀를 달랬을 것이다. 며느리를 답답하게 만드는 가부장적 분위기가 문제라고 말이다.
어제 메가박스에 영화를 보러 갔더니 벽 한편에 '관객들한테 답을 던지는 영화는 극장을 나서는 순간 끝나지만 관객들한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극장을 나서는 순간 시작된다'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난 <며느라기>도 독자들한테 질문을 던지는 측면에서 무척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내세운 작품들이 대체로 명확하고 사이다에 치중한 결말을 내는 것에 반해 이 작품은 열린 결말로 연출해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줬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며느라기'는 사린의 상사에 의해 새로이 정의된다. 단순히 며느리+아기의 뜻이 아닌 착한 며느리로 지내고 싶어하는 시기를 뜻할 수도 있으며, 1년 안에 그 시기를 벗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그 시기에 못 벗어나는 사람도 있더라는 사린의 직장 상사가 한 말은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였다.
위의 말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면서 관점에 따라선 소름 끼쳤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어떤 며느리가 되고 어떻게 결혼 생활을 영위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렸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각자도생이라 이건가.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연대해서 대항하기엔 이 사회의 가부장적 분위기는 너무 만연하고 미묘해 쉽지 않단 것을 작가가 통찰한 듯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감탄이 다 나온다.
가령 자신에게 대리 효도를 부탁하는 듯한 구영의 태도는 문제투성이지만 사람 자체는 마냥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덮어놓고 이혼하잔 얘기를 못 꺼내는 사린처럼 - 작품의 후속작이라 부를 수 있는 <노땡큐>에서 둘은 아직도 이혼하지 않았고 구영은 여전히 답답하다;; - 실제로 현실에선 심리적 장벽이 많고 또 두껍다. 이런 장벽 때문에 우리 사회의 며느리에 대한 부당한 인식이 구조적으로 개선될 여지는 무척 적어 보인다. 누구나 사린의 동서 혜린처럼 똑부러지면 좋겠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기에 정말 생각이 많아지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추석을 보내다가 생각이 난 김에 오랜만에 펼쳐든 작품인데 다시 읽어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고 5년 전보다 세상이 딱히 바뀐 게 없어 보여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 집도 명절 때마다 난리가 나서... 명절이면 가정이 화목해지긴커녕 화만 발생하는 것만큼 아이러니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 이유를 깨달아야 할 텐데, 그 '누군가'에 속한 몇몇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못 깨달을 수도, 아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할 듯해 그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