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 - 손으로 만든 표정의 말들 딴딴 시리즈 1
이미화 지음 / 인디고(글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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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제목이 수식어나 미사여구 없이 딱 '수어' 한 글자여서 수어에 대한 엄청난 성찰이 담겼겠거니 기대하고 읽었지만 얇은 분량에 맞게 기대보단 얄팍한 책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저자는 성실하게 자료도 조사해가며 열심히 글을 썼지만, 작가 본인이 인정하듯 아직 수어를 배우게 된 기간이 일천한 나머지 수어로 시작하다가 다른 얘기로 전개해버리는 탓에 책이 얇음에도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수어의 역사나 매력에 대해 얘기하거나 수어를 배우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맛깔나게 담긴 에세이일 줄 알고 읽었으나 수어에 얽힌 잡다한 이야기나 저자 자신의 뇌피셜 내지는 사회에서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겪는 소외감 등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얘기로 방향이 틀어져 애당초 이럴 거면 책의 제목을 왜 '수어'로 지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됐다. 큰 틀에선 다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지만 조금은 전문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길 듣고 싶었는데 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를, 저자 본인이 감명 깊게 읽거나 본 책과 영화를 소개하고 있어 이래저래 불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작가의 본래 직업이 영화 에세이스트라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소개하고 설득시키는 솜씨는 탁월했는데, 그 솜씨가 수어라는 키워드와 엮는 데엔 미치지 못해 뒤로 갈수록 시큰둥하게 읽혔다. 사실상 맨 뒤에 실린 몇몇 수어들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수어에 대한 내용은 적은 편이라... 이러니 제목을 잘 지어야 한다. 이렇게 미사여구 없이 단어 하나로 이뤄진 제목은 본인에게 조금 과분하리라 생각은 안 해봤는지 묻고 싶다.

 물론 한 분야에 완전히 통달한 작가만이 글을 쓸 자격이 주어진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제목이든 뭐가 됐든 속았다고 여긴 독자에게도 실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지 모른다. 책이 그닥이었으면 끝까지 읽지 않으면 될 일이니까. 글의 내용이 기대보다 전문적이지 않다고? 글이란 모름지기 전문적이어야 한다며 기대한 독자도 일정 부분 잘못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백 번 양보해서 그렇게 내 탓을 하며 넘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말만은 해야겠다. 다 좋은데, 수어를 공부하려는 작가의 포부나 인간애 넘치는 것도 다 좋은데, 결국 이 글이 독자들로 하여금 '나도 수어를 배우고 싶다'는 감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글인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가 어떤 계기에서건 수어에 관심을 갖고 배우기에 이르렀는가는 잘 알겠고 훌륭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 일을 독자에게 어필하기보다 내면의 이야길 꺼낸 것에 의의를 두고 있는 터라 아무래도 호소력이 부족했다.

 작가의 실제 경험보다 머릿속 생각이 비중을 많이 차지해 벌어진 안타까운 상황이 아닌가 싶다. 작가 소개란에 '수어 초급자'라 적혔을 때 미리 알아봐야 했는데...

이 세상에 가장 평화로운 단어가 있다면 그건 ‘누구나‘가 아닐까.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누구나 사랑할 수 있고, 누구나 살 수 있는 세상. - 1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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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R - Rossum's Universal Robots 로숨 유니버설 로봇
카테르지나 추포바 지음, 김규진 옮김, 카렐 차페크 원작 / 우물이있는집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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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카렐 차페크의 전설적인 희곡 <R.U.R>을 만화화한 작품, 아니 이 경우엔 그래픽 노블화했다고 말해야겠다. 책의 크기이나 가격, 작화의 퀄리티 등 전반적인 만듦새가 딱 그래픽 노블이다. 나도 정확히 그래픽 노블을 뭐라 정의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유명 소설이 원작이거나 일본이 아닌 서양 국적의 작가가 올컬러로 그린 다소 가격대가 나가는 만화를 흔히 그래픽 노블이라 부르지 않나 싶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런데, 나는 편의상 만화라고 호칭을 통일하겠다. 그래, 명칭은 둘째 문제고 중요한 건 그래픽 노블이라 칭해지는 책들은 하나같이 접근성은 높으나 읽었을 땐 대체로 그에 걸맞는 만족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 책의 만족도는 조금 미묘하다.

 원작이 100년이 훌쩍 넘은 과거에 집필됐고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 무대를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작중 상황이나 비주얼을 상상하기 까다로운 부분이 없잖았다. 그렇기에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의 세계는 어떨지 무척 기대됐다. 그런데 내 기억에 내용은 하나도 손댄 구석이 없고 희곡의 특성상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공장에서만 펼쳐지는 제한된 장소 제공조차도 변함이 없다. A부터 Z까지 원작과 판박이인데 원작의 서사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독자에겐 좋은 일이지만 원작과 색다른 연출을 기대했을 독자에겐 좀 멋없는 2차 창작이라 여길는지 모르겠다. 그림체가 워낙 독창적이고 유려해 눈은 즐겁지만 그게 다라면서 말이다.


 원작에서 의문이거나 아쉬웠던 부분, 헬레나가 도민의 청혼을 받아들인 부분이나 로봇을 만든 로숨의 과거가 짧게 설명되거나 하는 등 만화로 2차 창작되면서 충족되길 원했던 부분조차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진 건 김새는 부분이었고 후반부에 아담과 이브를 연상시키는 두 로봇 헬레나와 프리무스를 놓아주면서 알퀴스트가 쏟아내는 방백도 만화보다 희곡에서 더 전율과 웅장함이 느껴지게 연출됐다. 실제 무대에서 상연된 걸 보더라도 이런 느낌을 받으려나. 희곡의 집필할 때 반드시 무대에서 상연되는 걸 전제로 하니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연극보다 훨씬 표현의 자유가 폭넓은 만화이기에 희곡이 표현 못한 세계를 무궁하게 펼쳐주겠거니 기대했지만, 껍데기가 유려한 것 그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희곡보다 먼저 만화로 접했어도 그때도 똑같이 스토리에 갈증 비슷한 아쉬움을 느낄 테니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로봇에 의지해 생식 능력마저 잃은 인간의 종말도 신문 기사 몇 구절로 설명을 대신해버리는 이 여백 많은 세계관에 몰입하고 사유를 생성해내려면 그림으론 표현되지 않는 뭔가가 더 필요했으리라 본다.


 누군가는 이만하면 훌륭한 만화화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너무 원작을 그대로 재현해버리면 완성도와 별개로 늘 멋대가리 없는 일이라는 날것의 감상이 먼저 튀어나와버린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마지막화 같은 무리수만 아니라면 2차 창작은 언제든 환영인데... <R.U.R>을 원작으로 한 다른 2차 창작 작품으론 뭐가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더 있으면 좋으련만, 아니 있다면 그 작품만의 뭔가가 있길 바란다.

비생산성이 인류가 달성할 수 있는 마지막 과업이지요. - 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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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삐에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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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1


 많은 사람들이 <중력 삐에로>를 이사카 코타로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는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대사, 사유가 다소 장황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고 특히 신파를 신파스럽지 않게 전달하는 원숙미가 돋보여 그것만으로도 엄지를 치켜드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가족애, 특히 형제애가 압권인 이 소설은 작중 세세한 단점들을 모조리 뒤엎을 정도라 책장을 덮은 뒤에 몰려오는 여운이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굳이 세세한 단점들을 몇 가지 얘기해보자면, 우선 장황스럽고 개연성이 헐거운 전개를 들 수 있겠다. 분량도 긴데 초반부터 사건의 진상을 유추하는 것이 가능하단 점도 마이너스적인 요소고 이야기의 미스터리적 요소들이 허무하고 약간은 억지스러운 원리로 작동하고 있어 독자에 따라선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뭘 그렇게 논리니 개연성이니 따지냐, 그만하면 설득력 있지 하고 말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려나? 이에 대해선 확언하기가 어렵다.


 또 어떤 사람은 밝고 급하게 난 결말을 아쉬운 점으로 꼽던데, 나는 그 의견에 대해선 생각이 다르다. 감동과 여운이 남는다는 점에서 좋은 결말이라 생각하는데, 다만 몇몇 인물이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고 완수하는 일련의 전개가 지금껏 읽어온 추리소설들과는 다르게 허술하고 얼렁뚱땅식인 나머지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일이 그렇게 유리하고 깔끔하게 흘러갈 리 없는데... 그래서 어째 동화를 읽은 느낌까지 든다.

 희대의 강간마에 의해 자신과 씨다른 동생이 생긴 형 이즈미와 자신의 유전자를 증오하는 동생 하루,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하루도 아들로 키우는 형제의 아버지, 작중에선 이미 고인이 된 형제의 어머니 이 네 사람의 가족애를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 것은 <중력 삐에로>의 거룩한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후에 집필하는 또 다른 대표작 <골든 슬럼버>에서도 강간은 살인보다 악질적인 범죄라 일갈하는데 그때 그 구절은 <중력 삐에로>를 집필하면서 사유한 것이 그대로 반영된 구절일 것이다.


 강간을 저지르는 쓰레기의 쓰레기 같은 사고회로를 그럴싸하고 소름 끼치게 묘사한 작가는 여느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악을 묘사하는 탁월한 재능을 여지없이 뽐낸다. 기본적으로 유쾌한 작풍에다 등장인물도 유쾌하기에 이런 악인들의 등장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강간이 나쁘지 않은 이유가 다치는 건 상대방이고 나는 그걸 즐기기 때문이란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인간은, 아니 그보다 더한 인간이 현실에 무척 많을 듯해 읽으면서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이런 쓰레기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음에도 엇나가지 않은 사람도 있으며, 사람의 인생은 유전자로 전부 설명되지 않음을 작가는 온몸으로 역설하고 있다. 나 역시도 유전자가 모든 걸 설명하지 못하며 사람은 유전자보다 후천적인 성장 배경이 중요하다 믿기에 소설 속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접근에 몇 번을 고갤 끄덕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직도 과학자의 말보다 소설가의 말을 더 신뢰하는 이유를 책에서 읽어낼 수 있어 정말 더없이 반가웠다.


 제목만 봐선 무슨 이야기인지 유추가 되지 않는데 개인적으로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중력 삐에로>은 엉뚱함과 진지함을 둘 다 겸비한 작가만이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동화이자 복수극이었다. 어쩌면 작품의 제목은 엉뚱함과 진지함 두 개념을 겨냥하며 지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정말로 심각한 것은 밝게! 이 작가는 거의 신인 시절부터 이런 어마어마한 스킬을 작품을 녹여낸 것이다. 새삼 천재가 괜히 천재가 불리는 게 아니구나 하고 감탄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다음엔 작가의 신작을 읽게 될는지, 아니면 이전에 읽은 작품을 다시 읽을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 작품도 적잖이 기대된다.

인간을 공평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기가 죽는 법이다. - 14p


자신을 천재라 부르는 천재는 별 볼일 없어. - 54p


정말로 심각한 것은 밝게 전해야 하는 거야. - 109p


근거 같은 걸로 자신감을 가지면, 좀 비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 2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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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마카롱 수수께끼 소시민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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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시민' 시리즈는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고전부' 시리즈와 닮았으면도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 주인공이 자신의 추리력에 대한 자신감이나 다뤄지는 사건의 스케일 등 두 시리즈는 차이가 뚜렷한 편이다. '고전부' 시리즈가 전형적인 일상 미스터리라면 '소시민' 시리즈가 더 강력한 사건이 다뤄진다. 그리고 또 하나 큰 차이로, '고전부' 시리즈는 꽤 많이 집필된 반면 '소시민' 시리즈는 다루는 사건이나 전개가 굵직하기 때문인지 당최 신작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들 수 있겠다. 시리즈 4편인 '겨울~'의 출간 소식 대신 단편 소식만 들리고 있다.

 전편인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을 읽은 지 꽤 돼서 주인공의 캐릭터성이 가물가물하던 와중에 읽게 된 내 눈에도 이번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는 시리즈에서 조금 이질적인 축에 들었다. 일단 스케일이 '고전부' 시리즈에 비견될 만큼 아기자기하며 그간 곁가지에 불과했던 디저트들이 이번 수록작들에선 보다 비중있게 다뤄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었던 '뉴욕 치즈 케이크 수수께끼'에선 아예 치즈 케이크 레시피의 한 부분이 작품의 핵심 트릭과 직결돼 남다른 쾌감을 선사하는 식으로 말이다. 내 기준에선 그 트릭이 퍽 기발해서 나도 한 번 시도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요리는 과학이라던데 정말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나저나 추리소설 중엔 저렇게 국명이나 지명이 앞에 나오고 그 다음에 키워드가 나오는 형태의 제목인 작품이 꽤 많다. 엘러리 퀸이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 처음 선보인 제목인데 후대의 작가들에 의해 곧잘 패러디되곤 한다.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의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제목에 들어가 있는 파리 마카롱이나 뉴욕 치즈 케이크, 베를린 튀김빵과 피렌체 슈크림이 작품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하는 역할이 천차만별인 것이 흥미롭다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디저트의 레시피가 아주 요긴하게 활용되는 경우는 극소수고 대개 사건 해결의 실마리보단 사건을 접한 계기 정도로 다뤄진다.

 이런 제목을 가진 추리소설이 의외로 제목이 흥미로운 것에 비해 내용은 그저그런 경우가 허다한데,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 정도면 적어도 반타작은 하지 않나 싶다. 시시한 단편 둘, 흥미로운 단편이 두 편 수록됐다.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는데, 다만 아쉬운 점을 굳이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시리즈의 스토리라인에 큰 전환점을 제시하지 못하는 아주 외전격인 내용들이었다는 것이다. 말인즉슨 오랜만에 나온 신작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란 것이다. 그렇게 기대를 하지 않은 나도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으니 다른 독자는 더욱 실망을...... 아닌가? 애당초 요네자와 호노부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시시함과 작은 스케일을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오히려 반색하려나? 글쎄, 이 부분은 애매하다. 내 경우엔 작가 특유의 사색 짙은 문장이 적어서 작가답지 못한 작품들이라 생각했는데... 독자마다 평가가 다를 것 같다.


 아무래도 빠른 시일 안에 시리즈 4편을 읽긴 힘들어 보이니 그 사이에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소시민' 시리즈의 전편을 재독하는 게 나을 듯하다. 시시하긴 했어도 오랜만에 읽으니 다시 정주행하고 싶어졌다. 아, 정말 여담이지만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과반수 이상이 나고야에서 진행된다. 내가 곧 나고야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 작중 배경이 반가웠고 다가올 여행이 퍽 기대됐다. 나고야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줄 알았으면 아예 현지에서 읽을 걸 그랬다고 짧게 후회도 하면서. 

훌륭한 파티스리와 제과 동호회를 함께 비교하는 건 시시한 일이야. 백 엔짜리 초콜릿을 먹으면서 고디바 초콜릿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건 우스꽝스럽잖아.

파티스리는 파티스리에 어울리게, 홈메이드는 홈메이드답게, 주전부리 과자는 주전부리로 훌륭하다면 그걸로 족한 거야. 언제나 최고의 디저트를 원하는 건 구도자 같아서 멋져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뭘 먹어도 ‘거기에 비하면‘이라고 말하는 속물에 지나지 않아. - 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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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 변주곡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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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찬호께이의 단편은 <풍선인간> 이후로 오랜만에 접했다. 이 작가는 대체로 <13.67>처럼 500페이지는 거뜬히 넘기는 분량의 책을 집필하곤 하는데 과연 단편에서도 솜씨를 뽐낼 수 있을까? 장편에 능한 작가가 단편에서 죽을 쑤는 경우는 흔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안고 책장을 펼쳤다.

 첫 수록작부터 그저 그래서 이 작가가 역시 단편은 약하구나 싶었다. 가끔은 중편도 섞였는데, 첫 수록작인 '파랑을 엿보는 파랑'은 반전이 있긴 해도 분위기가 딱 전형적인 싸이코 스릴러였던 터라 읽으면서 큰 감흥이 일지 않았고 이색적인 배경이나 설정, 장르를 내세운 단편은 대개 기대보다 두세 단계 아래의 만족도를 안겨줬다. 이토록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 작가란 감탄이 나오기보단 그냥 이번 책은 작가의 습작을 짜깁기한 책이라고 멋대로 단정하고 읽어내려갔다. 전율을 안겨줬던 <풍선인간>과 달리 연작 소설집이 아니다 보니 모처럼 재밌는 단편을 읽어 흥미가 생겨도 그 다음에 사라지고... 흥미가 생기다 말기를 반복해 전반적으로 전율 없이 담담하게 읽혔다.


 그래도 마음에 든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커피와 담배' 같은 일상적인 소재를 미스터리하게 풀어나가는 아이디어를 대단히 좋아하며 의미심장한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찬호께이의 작품엔 이렇게 정신적인 이유든 뭐든 억울한 처지에 놓인 화자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이 많은 것 같은데 단편에서도 주인공의 절박함이 임팩트 있게 잘 녹아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만약 내가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상상만 해도 식은 땀이 난다.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과 마지막 수록작인 '숨어 있는 X'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내용의 작품들이라 함께 얘기하고 싶다. 일단 전자는 읽으면서 기분만 나빴고 결말은 더욱 기분 나빴던 반면 후자는 집중력이 가장 저고조였음에도 순식간에 몰입하며 읽었던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이었다. 전자는 추리소설가로 등단하기 위해 이유 없는 살인을 범하려는 추리소설가 지망생의 이야기고 후자는 피 한 방울 튀기지 않으면서 추리소설의 진면목을 그려나가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추리소설 읽기 교양 수업에서 벌어지는 추리 게임이 이토록 지루하지 않게 읽히다니... 대학교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작가의 <염소가 웃는 순간>이 연상됐는데 그 작품보다도 적어도 천 배는 더 괜찮은 소설이었다. 차라리 이 작품으로 장편을 내주지. 만약 후속작이 나온다면 무조건 읽을 것이다.

 두 작품은 추리소설이나 추리 게임을 주제로 삼았음에도 분위기와 지향점이 완전히 반대라는 점에 눈길이 간다.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은 우타노 쇼고의 <밀실살인게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인륜을 저버린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미쳤다는 것 외엔 별다른 감상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재의 참신함에도 안쓰러움이 느껴진 반면 '숨어 있는 X'는 추리소설이라면 모름지기 살인사건이 다뤄지는 법이라는 선입견을 반박함으로써 <밀실살인게임>이나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의 살인광을 죄다 우스꽝스러운 꼴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은 추리소설의 지적 쾌감이니 뭐니 떠들지만 실은 그저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데 추리소설을 핑계로 삼는 싸이코에 불과하며, 완전범죄를 저질러야만 추리소설을 잘 쓸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음을 주장하는 듯했다.

 이 마지막 수록작 한 편을 읽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구입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다. 결말까지 산뜻해 아주 좋았고 실제로 작중에 묘사된 추리소설 교양 강좌를 나도 수강 신청하고 싶었다. 나도 이렇게 재밌게 학교를 다녔으면 참 좋았을 텐데. 과거에 딱히 미련이 없는 나로 하여금 학창 시절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추리소설뿐 아니라 일종의 청춘소설로써의 완성도도 뛰어났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작품은 몰라도 마지막 수록작은 꼭 읽었으면 좋겠다. 불리한 전략일 수 있지만, 가장 뛰어난 작품이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게 단편 소설집의 만족도를 크게 향상시키는 것 같다. 덕분에 작가의 묵직한 장편 못지않게 이 책도 좋게 기억에 남게 될 것 같다. 작가의 단편집이 몇 권 더 출간됐던데 그 책들도 찾아 읽어보려고 한다. 이 책과 같은 완성도이길 바란다. 


만약 누군가 돈 때문에, 혹은 고통을 회피하려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팔아버렸다면......, 자네는 그 사람이 멍청하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그 사람을 ‘멍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네. 하지만 1만 글자 분량의 단편소설로 한 사람의 일생을 묘사해버리는 일처럼 참 재미없다고 생각하겠지. - 122p


증명할 수 없는 추리라는 건 연예면의 가십 기사 같은 거야. 들으면 재미있지만 나하고는 눈꼽만큼도 관련이 없지. - 410p


한 사람의 작가에게는 유명해지고 큰 돈을 버는 것보다 나무통 안에 숨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쓰는 게 더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 4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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