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출산
무라타 사야카 지음, 이영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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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7






 최근 쓰려고 하는 소설 때문에 참고 삼아 읽었는데 생각보다 충격적이라 멘탈이 살짝 흔들렸다. <편의점 인간> 때도 이상한 작가라고 생각했지만 이 작품에 비하면 그 작품을 쓸 때는 그나마 정상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작가 본인이 인정하듯 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만 실린 소설집이었는데 이것 참... 대단하긴 하다. 솔직히 어떤 의미에선 좀 감탄했다.



 '살인출산'


 표제작이자 중편으로 200페이지 되는 책에서 60%가 넘는 분량을 차지한, 이 소설집의 인상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약 100년 뒤의 미래를 배경으로 '10명을 출산하면 사람을 한 명 죽일 수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 세상은 완벽한 피임이 이뤄져 성 관계는 애정 행위일 뿐, 더 이상 어떤 우발적인 임신과 출산이 발생하지 않아서 인구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기는 인공 수정으로 낳을 수밖에 없어서 그 세계는 대리모의 역할을 - 남자도 인공 자궁을 통해 수행할 수 있다. - 사람들이 자원하게끔 저런 법률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을 낳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죽일 기회를 가진다, 이런 논리가 합리적이고 실로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가상의 미래는 우리 상식을 아득히 초월해 약간 역겹지만 나름의 논리가 있어 흥미롭기도 했다. 작가가 밝히기를 기존 우리들의 세상과 전혀 다른 사고를 가진 세상을 통해 상식과 평범의 전복을 꾀하면서 진정 상식과 평범이란 무엇인가 독자 스스로 반문하게끔 하는 게 작품을 쓴 이유라고 했다. 엄연히 디스토피아지만 원래 디스토피아가 작가가 말한 측면으로 읽기에 대단히 좋은 설정이라 나 역시 무리없이 읽어나갔는데... 지금 시점에서 비정상적인 사회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비정상적으로 여겨지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그나마 소설에 품고 있는 호감마저 다 날아가버렸다.


 출산을 10번 한다는 게 말은 쉽지만 최소 10년은 걸리는 일이다. 사산의 경우엔 카운트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더 걸릴 수 있는데, 여기서 궁금한 건 출산을 자원한 사람들에겐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살의를 유지시킬, 그 정도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출산자 - 작중 용어 - 들이 명예로운 일을 하고 있음에도 가족들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데 이유는 출산자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혹시 자기일까봐;;

 주인공의 언니도 약간 비슷한 취급을 당했는데 아기를 10명 낳고서 죽이고 싶다고 지목하는 사람이 정말 가관이었다. 여기서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용인돼 지목한 사람을 죽이는 장면까지는 가히 19세 미만 구독 불가 딱지가 붙고도 남을 만했다. 수위의 문제도 있지만 정말 그 세계 기준에 맞춰 살인 장면을 명예롭거니와 - 죽이는 사람은 물론 죽는 사람까지도! - 아름답게 묘사하는 방식이 소름 끼쳤다. 게다가 살인의 이유며 주인공의 선택은 아까 말했듯이 그 세계 기준에서도 일반적이지 않아 불쾌감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자연스런 상상력과 세계관의 SF를 기대하고 읽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읽기 전에 한번 고려해보는 것이 좋다. 엄밀히 말하면 자연스런 상상력과 세계관과는 거리가 머니까.

 그나저나 이 작품이 왜 센스오브젠더상 '저출산대책특별상'을 수상했는지 모르겠다. 어, 어딜 봐서...?



 '트리플'


 이후 수록된 작품은 다 짧아서 사실 작품보단 콩트나 소설 형태의 설정집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일단 '트리플'의 경우엔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가 떠올랐다. 그 작품도 세 명의 결혼 생활을 장편의 형식을 빌려서도 완벽히 그려내지 못했는데 '트리플'은 너무 많은 부분에서 특유의 논리를 비약시켜 당최 설득이 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에 다수와 연애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런 연애 방식이 유행하게 된 계기나 실제로 만나서 연애하는 과정이 생각만큼 당위성이 부족한 탓이다. 그냥 작중 핵심 등장인물 셋의 좀처럼 와 닿지 않는 애정 행각 정도로만 인식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롭지도 않은 게 문제였다. 내가 이해를 돕기 위해 <아내가 결혼했다>를 언급한 게 창피할 정도로.



 '청결한 결혼'


 이 작품은 비교적 평범했다. 성 관계를 전혀 하지 않는 부부가 어느 정도 일반화된 세상이 나오는데 어떻게 보면 파격적이지만 현 시점에서도 충분히 있을 만해서 그다지 참신하진 않았다. 물론 아기를 가지고 싶어 굳이 성 관계 없이 아기를 만드는 방법을 모색하다 열거되는 기상천외한 방법이나 각자의 성적 취향을 알게 되는 장면 등은 작가답게 가감없이 그려져서 재밌었지만.



 '여명'


 4페이지도 안 되는 작품. 자살 외엔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결국 셀프 자살이 유행하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죽을 장소를 찾아 약을 먹고 죽는다는 내용인데 분량이 너무 짧아 감상이 남고 자시고도 없었다. 성의가 없는 거 아닌가 하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당신이 옳다고 여기는 세상을 믿고 싶으면, 당신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세상을 믿는 사람을 용서할 수밖에 없어요. - 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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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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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아무래도 생판 모르는 작가도 아닌 무려 교수님의 책을 읽는다는 게 제법 부담스런 일이었지만 그런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도 너무 멋들어진 소설이라 새삼 내가 참 대단한 분에게 소설을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한 학기 동안이었지만 정말 영광스럽기 그지없다. 나도 이렇게 쓰고 싶은데.

 한 승무원의 자살에서 시작되는 소설은 내 예상과는 사뭇 다르면서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형태로 나아갔다. 승무원이 자살했다고 하면 요즘 말이 많은 항공사의 내부 상황에 지친 탓이라고 넘겨 짚기 마련인데 작품은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도의적인 차원에서 자살의 이유를 찾는다. 일찍이 젋은 작가상을 수상한 <세실, 주희>에서도 우리들의 심리 기저에 녹아든 민감한 감정선을 파고들었던 작가님이기에 - 교수님이라고 부르고 싶지만 이제부턴 작가님이라 부른다. - 충분히 짐작된 작풍이었으나 장편의 규모에 맞춰 깊이와 범위가 확장된 느낌이 강했다. 적잖은 수의 등장인물들의 시선과 다각도에서 보는 여러 사건들은 분명치 않지만 자살한 승무원 유나로 하여금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해줬다.


 소설을 읽으면서 놀랐던 건 승무원이나 항공사에 대한 묘사보다 사실감 넘쳤던 군인과 군대에 관한 묘사였다. 어떤 때는 남성 작가가 썼다고 헷갈릴 만큼 군대 문화의 핵심을 잘 건드렸는데 일부 피상적인 묘사로 흐를 법도 한 설정이, 가부장적이고 딸에게 무관심했던 못난 아빠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상징적이어서 쉬운 소재가 또 군인인 터라 외려 불안했던 설정이 생각 이상으로 잘 구현됐다며 감탄했었다. 작중 나오는 군대는 공군이고 장교와 그의 운전병이라는 위치와 보직의 사람들을 묘사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긴 했으나 그럼에도 서사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관된 소재라 묘사에 있어 부족함 없이 공을 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서 속에서 유나가 말을 거는 상대가 아버지인 만큼 생전에 아버지가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예상할 수 있겠는데 둘의 연결 고리가 꽤나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책 말미에 달린 해석에서와 달리 난 이 작품의 구성이 그렇게 특기할 만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처럼 추리소설을 좀 읽어본 독자라면 이런 구성이 가장 효과적이며 대안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특기할 만하지 않다고 감탄스럽지 않다는 얘긴 결코 아니다. 유나의 동창들의 시선과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인상이 흐릿했던 것을 제한다면 유나의 과거를 살펴보는 작품은 꽤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나라면 정말 항공사에 대해서만 얘기했거나 이렇게 근원적인 얘기를 하더라도 어린 시절부터 자살하기 직전까지 시간 순서를 순차적으로 진행시켰을 텐데 <미스 플라이트>는 상당히 복잡하고 불규칙하게 시점과 시간을 넘나든다. 그렇다고 이야기의 전체상이 헷갈리지도 않는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작품의 내용만을 두고 용케 장편으로 길게도 썼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내 경우엔 아이러니하게도 생각보다 일찍 결말이 나오는 걸 보고 그런 말이 나왔다. 이렇게 끝낼 것이었다면 너무 길게 쓴 것 아닌가 하고. 문득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단편의 매력은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무슨 엔딩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결말'이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나서 내심 길이만 긴 단편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소재나 이야기 자체의 규모완 달리 간혹 분량이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미스 플라이트>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하고. 하지만 그렇게 단정을 짓기 약간 애매하다.

 유나의 복합적인 심정을 내가 미약하나마 파악한 바에 따르면 유나는 가히 일본인에 버금갈 수준의 속죄 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얼핏 옆에서 보기엔 '왜 저런 상황에서 제3자인 본인이 불편해하고 죄송해하지?' 싶을 정도로 본인의 서사 이상으로 타인의 서사에 간접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유나의 이런 특성은 가족에게마저도 무심했던 아버지 정근에 대한 반발심의 발로일 수 있다. 혹은 선천적으로 몸 쓰는 일에 취약했다는 묘사가 있어 자연스레 타인의 아픔에 쉽게 공감하는 특성으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무튼 그와 같은 유나의 특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특별히 반전을 맞이하는 일도 없이 정해진 수순대로 유나의 자살로써 정리되는데 이러한 결말에 독자마다 의견이 분분할 듯하다. 처음 이 결말을 접한 나는 위에서 말했듯 허무함을 느꼈지만 가만 생각하니 내가 이 작품을 아직까지도 추리소설적인 잣대로 보고 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해 이 소설은 추리소설적 기법인 추적의 요소가 가미되긴 했으나 그 요소를 사용함으로써 추리소설을 지향하는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은 흥미롭고 스릴 넘치는 심리 소설인데 내가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던 듯하다. 이건 분명 나의 실책이었다.

 본격적이고 정통 문학에 취약한 독자라서 함정에 빠졌을 뿐, 소설 자체만으로 보면 서사적으로 깊이가 더해져 기승전결이 뚜렷한 작품이었다. 만약 장편의 분량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많은 등장인물이 나와서 유나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작가님의 후기를 읽어보니 작가로서 첫 장편 집필이었다는데 단순히 장/단편의 차이가 분량뿐 아니라 깊이까지 들 수 있다면 가히 괄목한 결과물이 나왔다고도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굉장한 수작이라 생각됐던 <세실, 주희>보다 인상적이었는데 여담이지만 저번 달에 장편을 쓸 때 이 작품을 참고했더라면 참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적잖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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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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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요번에 나가사키를 가게 되면서 드디어 엔도 슈사쿠의 <침묵>도 읽게 됐다. 2년 전 나가사키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형이 이 책을 읽고 나가사키에 왔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2년이 지난 다음에야 읽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사일런스>를 작년에 봐서 내용은 기억이 났지만 그래도 감회가 새로웠다. 여행 중인 장소가 나오는 책을 읽는 기분이란 그렇게 신기할 수 없다.

 생각해보니 종교소설은 처음 읽었는데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것으로 평가받는 작가의 위상에 아주 걸맞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영화 <사일런스>의 경우에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서스펜스 넘치게 찍어서 재밌었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원작이 뛰어나서 자연스레 영화도 뛰어난 완성도를 갖출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원작 소설도 영화처럼 중간에 신부가 막부에게 잡히고 나서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한다. 중반부까진 신부의 서간 문체로 진행되는 터라 굉장히 역동적인 내용이 전개됨에도 어딘지 경건하게 읽혔는데 이후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돼 보다 객관적으로 읽어나갈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시점의 변환이 작가가 작품 속에 추구하고 싶던 진지하고 객관적인 종교적 담론에 매우 적합한 연출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책의 인상 깊었던 구절이라고 하면 단연 키치지로가 신부에게 고해할 때 뱉은 대사들을 꼽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캐릭터가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상징하는 인물인 만큼 꽤나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세상은 왜 이리 살기 힘들고 악惡은 어째서 있는 것인가, 무릇 시련 속에서 선한 길을 찾아나가기 위함이라지만 애당초 신이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 모든 고통과 역경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라는 질문에 언제나 흔들리는 종교에겐 키치지로의 이중성은 특히 문제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의 반복되는 고해 성사에 어느덧 듣는 시늉만 하지 진지하게 듣지 않는 신부의 모습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공감이 가서 더욱 종교의 순수성, 나아가서는 믿음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거니와 종교를 잘 짜여지고 오랫동안 뿌리내려진 문화적 사기라 여겨서 본질적으로 작품 속 신부의 고난에 감정을 이입시킬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종교인 역시 인간이기에 설령 종교를 갖지 않은 나와 같은 독자에게도 그의 심적 세계가 울리는 바는 꽤 크리라 믿는다. 이 부분이 바로 <침묵>이 위대한 작품이라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종교라는 개념이 너무 거부감이 든다면 그보다 순한 '믿음'이란 단어로 치환하여 읽어보자. 믿음을 관철하려고 할 때 좌절되는 온갖 상황이란 맥락에서 보면 <침묵>처럼 절박하고 끝내 먹먹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선택을 한 신부, 살기 위해 신자들에게 배교를 종용하고 그 자신도 그토록 사랑해마지않던 예수의 얼굴에 발을 올려놓으면서 종지부를 찍은 신부는 스승인 페레이라와 같은 듯 다르다. 페레이라는 일본인이 기독교의 신을 받아들이기에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 여기고 환멸을 느껴 배교를 결심하게 됐다면 - 그럼에도 마음속 어딘가에선 신을 잊지 않았지만. 잠깐, 이건 영화의 설정이던가? -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 이후에도 고정적인 종교관에서 자유로워진 존재가 됨으로써 남모르게 믿음을 관철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세상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다 저마다 자기네들이 옳다고 목에 핏줄을 세우기도 하고 결국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신이란 최소한 사후엔 도달해야 확인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 저런 싸움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그들을 존중하려는 이유는 그들의 믿음과 더불어 그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논리, 그리고 도덕이 어쨌든 그들로 하여금 더 나은 존재가 되게끔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느님의 침묵에 지쳐 다른 방식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로드리고 신부는 교리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이지만 그를 무턱대고 비난할 수 없는 건 어쨌든 그가 좋은 일을 하고자 굴욕을 감내해서라도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전에 쓴 영화의 후기에도 비슷한 내용을 썼지만 이와 같은 자유로움을 종교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반대로 그럼 종교란 도대체 왜 존재해야 하느냐고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오직 교리가, 신의 말씀만 옳다면 그 사각지대에서 흐르는 피는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작중에서 로드리고 신부에게 들린 예수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의심됨에도 경청하게 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모름지기 우리는 자기 얼굴을 밟는 등 모욕하는 건 일도 아니란 식으로 어깨를 다독여줄 신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내용을 기독교 신자가 쓰다니, 다시 생각해도 참 대담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종교소설도 이 작품 같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https://blog.naver.com/jimesking/220971029168

 이건 영화의 포스팅.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 177p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 2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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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삼킨 소년 - 제37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수상작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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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잠시 관심이 멀어진 사이 인기 작가로 급부상한 야쿠마루 가쿠의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수상작을 읽어봤다. 처음 작가의 작품들을 접할 땐 계속 같은 주제에다 같은 작풍이 반복돼 자기 복제만 하는 것 같아 내심 시큰둥했지만 문학상의 심사위원인 누군가의 말마따나 하나의 주제를 천착한 작가다운, 과연 장인 정신이라 부를 만한 게 작가에게 녹아든 듯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침묵을 삼킨 소녀>은 확실히 야쿠마루 가쿠가 아니라면 이 정도 진정성이 배기 힘들었을 작품인 것 같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지금까지 읽은 작가의 작품들에 비하면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해 추리소설은 아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처럼 - 공교롭게 이 작품도 가해자의 유족에 관한 내용이다. - 추리소설가가 쓰는 일반 소설이란 게 의외라 생각될 수도 있을 텐데 읽다보면 그런 장르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것이다.

 그간 작가의 작품을 보면 피해자의 눈물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작품은 가해자의 부모의 시선에서 이야길 진행시킨다. 가해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갱생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중립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전망을 내보인 작가이기에 독자 입장에서 과감한 설정으로 느껴졌다. 전처와 함께 사는 아들이 친구를 죽인 상황에서 '제발 네가 했다고 하지 마렴, 제발.' 이라고 연신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초반에 주를 이루는데 그 묘사가 무척 현실적으로 느껴져 작가의 가치관이 보다 확장된 느낌이 들었다. 하긴 이제 가해자의 이야기도 다룰 때가 됐지.


 아들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느냐, 아니면 누군가를 살해하느냐란 질문에 있어서 누구나 어쩔 수 없이 후자를 택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일단 살아야 변명이나 반성, 참회 등을 할 수 있는 거니까. 이처럼 사람에겐 예외 없이 이기심이라는 게 있는데 이러한 특성은 작품 속에서 마주하는 어떤 문제엔 지극히 독이 될 요소이기도 할 것이다. 흡사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할 수 있을 가해자의 진정한 갱생이, 주인공의 아들에겐 과연 가능할까?

 이 작품이 진정성이 있고 술술 읽히는 것과는 별개로, 아무래도 진정한 갱생의 가능성을 염두에 뒀는지 사건의 내막에 얽힌 가해자의 절박함을 강조해 대체로 동정의 여론이 생길 법했던 건 개인적으로 약간... 쉬운 방법을 쓰지 않았나 싶었다. 물론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고 하는 녀석을 다루는 게 무척 어렵긴 하겠지만 이처럼 어느 정도 '가해자가 된 피해자' 설정을 차용해서 극악무도한 소년 범죄자도 갱생이 가능한 것인지 질문이 확장될 수 있는 주제에 있어서 비교적 해피엔딩이 쉽게 열릴 것 같은 낌새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결말은 결코 쉽지 않았다. 범죄자가 된 아들과 마주하고서 진정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다짐하는 주인공의 내면은 무겁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아들이 당장은 몰라도 언젠가 사죄의 마음이 들 것인가 하는 의문이 한없이 불가능한 것처럼 묘사됐다. 아들은 미성년자란 이유로 다른 범죄자들과 달리 교화라는 이름의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는데 과연 이 제도는 정말 실효성이 있긴 한 걸까? 그 질문의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게 이 작품의 참된 매력이자 가치였다.

 작품의 원제는 'A가 아닌 너와 함께' 란다. 범죄자가 아직 미성년자라면 익명성을 위해 주로 A란 호칭을 붙이는데 이 살풍경한 글자는 익명성과 더불어 우리의 감정과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어딘가 먼 곳으로 가려는 듯 현실감이 떨어지게 만드는 효과도 있어 작가로서 가장 배제하고 싶은 요인이었을 듯하다. 아버지인 주인공이 아들 - 범죄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 과 함께 죄의 무게를 짊어진다는 의미일 텐데 이게 제법 울리는 바가 컸다. 진정성이란 말을 별로 믿지 않지만 이 작품은 약간은 기대를 품어볼 만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후반부에 주인공의 아들이 느꼈듯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히 솔직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기 죄와 마주하는 방법 외엔 없었으니까. 그리고 때론 참회는 곧 구원이기도 하니까.

행동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식이 왜 그랬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게 부모야. - 2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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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향신료 12 - Extreme Novel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아야쿠라 쥬우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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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이야기는 다시 요이츠를 찾아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지금껏 상당히 오지랖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 로렌스네 일행은 이번에도 지도 한 장 얻기 위해 또다시 마을 규모의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얘네들은 정말이지 '최소' 마을 규모의 사건에 휘말리는 것 같다. 작가가 약간 자기 복제하는 느낌도 드는 한편으로 이렇게 쓰는 것도 재능이라 생각하고 싶다. 누군가 말했듯 빨리 끝내지 않고 질질 끄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호로와 로렌스의 엎치락뒤치락하며 진도가 나가지 않는 관계가 이들의 여정에 생각 이상의 활력을 던져준다.

 지난 11권의 후기를 쓸 때 첫 번째, 두 번째 단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이번 12권과 연동해 얘기하면 괜찮을 것 같아 이야길 보류했다. 일단 그에 앞서 다른 얘길 먼저 해보겠다. 라이트 노벨은 기본적으로 캐릭터의 매력에 기반을 둔 신생 소설 장르로 호불호도 많이 갈리고 사람에 따라선 아예 소설로 취급도 않는 등 전체적으로 캐릭터에 의존하기만 하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 대다수의 독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하지만 캐릭터는 극을 감상함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만약 이러한 요소가 경시되면 그만큼 흥미가 떨어지는 작품도 없는 걸 떠올리면 마냥 나쁘게 볼 요소는 아닌 것 같다. '늑대와 향신료'의 경우에는 어쨌거나 저쨌거나 호로와 로렌스의 썸만으로 장장 12권 이상 시리즈 전체의 매력과 생명력을 유지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 말이다.


 호로와 로렌스의 관계는 더 이상 신선하지도 않고 내게는 외려 식상하기까지 하지만 이 둘의 관계의 결말이 궁금한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 최근 호로의 모습이 지혜보단 먹성과 사랑스러움이라는, 전형적으로 노리고 만든 캐릭터성을 보이는 모습이 잦아 약간 쓴웃음이 나긴 하지만 서로 대등한 듯 미묘하기도 한 둘의 관계가 적절할 때 위로를 해주고 힘이 된다는 설정은 퍽 견고하고 애틋하기 이를 데 없다. 그걸 12권이나 읽고 깨달은 건 아니지만 무릇 이야기가 정말로 후반부에 다다른 것 같아서 한번 되짚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기억하기론 다음 권이 드디어 내가 읽지 못한 에피소드이기에 약간 감개무량해 이렇게 강조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나저나, 정작 본편의 지도 이야기와 요이츠 얘기보다 내 개인적인 이야길 하다니,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다. 결말로 달려가기에 앞서 기껏 중간 과정도 다 밟아가고 있는 만큼 다음부터라도 좀 더 의식하고 정독을 해야 할 듯하다. 이러다가 결말까지 읽고도 별 감흥이 없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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