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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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요번에 나가사키를 가게 되면서 드디어 엔도 슈사쿠의 <침묵>도 읽게 됐다. 2년 전 나가사키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형이 이 책을 읽고 나가사키에 왔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2년이 지난 다음에야 읽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사일런스>를 작년에 봐서 내용은 기억이 났지만 그래도 감회가 새로웠다. 여행 중인 장소가 나오는 책을 읽는 기분이란 그렇게 신기할 수 없다.

 생각해보니 종교소설은 처음 읽었는데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것으로 평가받는 작가의 위상에 아주 걸맞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영화 <사일런스>의 경우에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서스펜스 넘치게 찍어서 재밌었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원작이 뛰어나서 자연스레 영화도 뛰어난 완성도를 갖출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원작 소설도 영화처럼 중간에 신부가 막부에게 잡히고 나서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한다. 중반부까진 신부의 서간 문체로 진행되는 터라 굉장히 역동적인 내용이 전개됨에도 어딘지 경건하게 읽혔는데 이후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돼 보다 객관적으로 읽어나갈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시점의 변환이 작가가 작품 속에 추구하고 싶던 진지하고 객관적인 종교적 담론에 매우 적합한 연출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책의 인상 깊었던 구절이라고 하면 단연 키치지로가 신부에게 고해할 때 뱉은 대사들을 꼽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캐릭터가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상징하는 인물인 만큼 꽤나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세상은 왜 이리 살기 힘들고 악惡은 어째서 있는 것인가, 무릇 시련 속에서 선한 길을 찾아나가기 위함이라지만 애당초 신이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 모든 고통과 역경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라는 질문에 언제나 흔들리는 종교에겐 키치지로의 이중성은 특히 문제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의 반복되는 고해 성사에 어느덧 듣는 시늉만 하지 진지하게 듣지 않는 신부의 모습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공감이 가서 더욱 종교의 순수성, 나아가서는 믿음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거니와 종교를 잘 짜여지고 오랫동안 뿌리내려진 문화적 사기라 여겨서 본질적으로 작품 속 신부의 고난에 감정을 이입시킬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종교인 역시 인간이기에 설령 종교를 갖지 않은 나와 같은 독자에게도 그의 심적 세계가 울리는 바는 꽤 크리라 믿는다. 이 부분이 바로 <침묵>이 위대한 작품이라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종교라는 개념이 너무 거부감이 든다면 그보다 순한 '믿음'이란 단어로 치환하여 읽어보자. 믿음을 관철하려고 할 때 좌절되는 온갖 상황이란 맥락에서 보면 <침묵>처럼 절박하고 끝내 먹먹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선택을 한 신부, 살기 위해 신자들에게 배교를 종용하고 그 자신도 그토록 사랑해마지않던 예수의 얼굴에 발을 올려놓으면서 종지부를 찍은 신부는 스승인 페레이라와 같은 듯 다르다. 페레이라는 일본인이 기독교의 신을 받아들이기에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 여기고 환멸을 느껴 배교를 결심하게 됐다면 - 그럼에도 마음속 어딘가에선 신을 잊지 않았지만. 잠깐, 이건 영화의 설정이던가? -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 이후에도 고정적인 종교관에서 자유로워진 존재가 됨으로써 남모르게 믿음을 관철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세상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다 저마다 자기네들이 옳다고 목에 핏줄을 세우기도 하고 결국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신이란 최소한 사후엔 도달해야 확인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 저런 싸움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그들을 존중하려는 이유는 그들의 믿음과 더불어 그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논리, 그리고 도덕이 어쨌든 그들로 하여금 더 나은 존재가 되게끔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느님의 침묵에 지쳐 다른 방식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로드리고 신부는 교리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이지만 그를 무턱대고 비난할 수 없는 건 어쨌든 그가 좋은 일을 하고자 굴욕을 감내해서라도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전에 쓴 영화의 후기에도 비슷한 내용을 썼지만 이와 같은 자유로움을 종교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반대로 그럼 종교란 도대체 왜 존재해야 하느냐고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오직 교리가, 신의 말씀만 옳다면 그 사각지대에서 흐르는 피는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작중에서 로드리고 신부에게 들린 예수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의심됨에도 경청하게 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모름지기 우리는 자기 얼굴을 밟는 등 모욕하는 건 일도 아니란 식으로 어깨를 다독여줄 신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내용을 기독교 신자가 쓰다니, 다시 생각해도 참 대담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종교소설도 이 작품 같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https://blog.naver.com/jimesking/220971029168

 이건 영화의 포스팅.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 177p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 2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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