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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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아무래도 생판 모르는 작가도 아닌 무려 교수님의 책을 읽는다는 게 제법 부담스런 일이었지만 그런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도 너무 멋들어진 소설이라 새삼 내가 참 대단한 분에게 소설을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한 학기 동안이었지만 정말 영광스럽기 그지없다. 나도 이렇게 쓰고 싶은데.

 한 승무원의 자살에서 시작되는 소설은 내 예상과는 사뭇 다르면서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형태로 나아갔다. 승무원이 자살했다고 하면 요즘 말이 많은 항공사의 내부 상황에 지친 탓이라고 넘겨 짚기 마련인데 작품은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도의적인 차원에서 자살의 이유를 찾는다. 일찍이 젋은 작가상을 수상한 <세실, 주희>에서도 우리들의 심리 기저에 녹아든 민감한 감정선을 파고들었던 작가님이기에 - 교수님이라고 부르고 싶지만 이제부턴 작가님이라 부른다. - 충분히 짐작된 작풍이었으나 장편의 규모에 맞춰 깊이와 범위가 확장된 느낌이 강했다. 적잖은 수의 등장인물들의 시선과 다각도에서 보는 여러 사건들은 분명치 않지만 자살한 승무원 유나로 하여금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해줬다.


 소설을 읽으면서 놀랐던 건 승무원이나 항공사에 대한 묘사보다 사실감 넘쳤던 군인과 군대에 관한 묘사였다. 어떤 때는 남성 작가가 썼다고 헷갈릴 만큼 군대 문화의 핵심을 잘 건드렸는데 일부 피상적인 묘사로 흐를 법도 한 설정이, 가부장적이고 딸에게 무관심했던 못난 아빠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상징적이어서 쉬운 소재가 또 군인인 터라 외려 불안했던 설정이 생각 이상으로 잘 구현됐다며 감탄했었다. 작중 나오는 군대는 공군이고 장교와 그의 운전병이라는 위치와 보직의 사람들을 묘사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긴 했으나 그럼에도 서사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관된 소재라 묘사에 있어 부족함 없이 공을 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서 속에서 유나가 말을 거는 상대가 아버지인 만큼 생전에 아버지가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예상할 수 있겠는데 둘의 연결 고리가 꽤나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책 말미에 달린 해석에서와 달리 난 이 작품의 구성이 그렇게 특기할 만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처럼 추리소설을 좀 읽어본 독자라면 이런 구성이 가장 효과적이며 대안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특기할 만하지 않다고 감탄스럽지 않다는 얘긴 결코 아니다. 유나의 동창들의 시선과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인상이 흐릿했던 것을 제한다면 유나의 과거를 살펴보는 작품은 꽤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나라면 정말 항공사에 대해서만 얘기했거나 이렇게 근원적인 얘기를 하더라도 어린 시절부터 자살하기 직전까지 시간 순서를 순차적으로 진행시켰을 텐데 <미스 플라이트>는 상당히 복잡하고 불규칙하게 시점과 시간을 넘나든다. 그렇다고 이야기의 전체상이 헷갈리지도 않는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작품의 내용만을 두고 용케 장편으로 길게도 썼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내 경우엔 아이러니하게도 생각보다 일찍 결말이 나오는 걸 보고 그런 말이 나왔다. 이렇게 끝낼 것이었다면 너무 길게 쓴 것 아닌가 하고. 문득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단편의 매력은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무슨 엔딩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결말'이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나서 내심 길이만 긴 단편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소재나 이야기 자체의 규모완 달리 간혹 분량이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미스 플라이트>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하고. 하지만 그렇게 단정을 짓기 약간 애매하다.

 유나의 복합적인 심정을 내가 미약하나마 파악한 바에 따르면 유나는 가히 일본인에 버금갈 수준의 속죄 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얼핏 옆에서 보기엔 '왜 저런 상황에서 제3자인 본인이 불편해하고 죄송해하지?' 싶을 정도로 본인의 서사 이상으로 타인의 서사에 간접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유나의 이런 특성은 가족에게마저도 무심했던 아버지 정근에 대한 반발심의 발로일 수 있다. 혹은 선천적으로 몸 쓰는 일에 취약했다는 묘사가 있어 자연스레 타인의 아픔에 쉽게 공감하는 특성으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무튼 그와 같은 유나의 특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특별히 반전을 맞이하는 일도 없이 정해진 수순대로 유나의 자살로써 정리되는데 이러한 결말에 독자마다 의견이 분분할 듯하다. 처음 이 결말을 접한 나는 위에서 말했듯 허무함을 느꼈지만 가만 생각하니 내가 이 작품을 아직까지도 추리소설적인 잣대로 보고 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해 이 소설은 추리소설적 기법인 추적의 요소가 가미되긴 했으나 그 요소를 사용함으로써 추리소설을 지향하는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은 흥미롭고 스릴 넘치는 심리 소설인데 내가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던 듯하다. 이건 분명 나의 실책이었다.

 본격적이고 정통 문학에 취약한 독자라서 함정에 빠졌을 뿐, 소설 자체만으로 보면 서사적으로 깊이가 더해져 기승전결이 뚜렷한 작품이었다. 만약 장편의 분량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많은 등장인물이 나와서 유나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작가님의 후기를 읽어보니 작가로서 첫 장편 집필이었다는데 단순히 장/단편의 차이가 분량뿐 아니라 깊이까지 들 수 있다면 가히 괄목한 결과물이 나왔다고도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굉장한 수작이라 생각됐던 <세실, 주희>보다 인상적이었는데 여담이지만 저번 달에 장편을 쓸 때 이 작품을 참고했더라면 참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적잖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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