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와 더럽혀진 천사 - Extreme Novel
노무라 미즈키 지음, 최고은 옮김, 타케오카 미호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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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8.0







 이번 권은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을 재해석했는데 내가 이 시리즈 통틀어 유일하게 원작을 읽어본 경우에 해당한다. <폭풍의 언덕>은 예전에 어린이판으로 읽어봤을 뿐이고 <인간실격>과 <좁은 문>은 읽다가 보류했다. 아마 이 시리즈에서 언급하는 고전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이 바로 <오페라의 유령>이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로도 작중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추리소설로는 엉성하고 연애소설로는 기괴하다고. 하지만 팬텀이란 캐릭터가 갖고 있는 불멸의 매력이 있어 뮤지컬로 2차 창작돼 그야말로 대박이 됐다고. 신랄한 평가가 아닐 수 없는데 실제로 내가 원작을 읽었을 때도 거의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전에 처음 읽을 땐 <오페라의 유령>을 읽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 그래서 이 책을 읽고 그 책도 읽어야지 다짐을 했었다. - 이렇게 두 작품을 놓고 비교하는 게 나름 재미가 쏠쏠했다. 확실히 이 작가가 자신이 재밌게 읽고 중요하게 여기는 작품을 선정해 절묘하게 시리즈 속 이야기에 녹여내는구나 싶었다. 처음에 유명 사립 고등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을 비밀리에 레슨을 해주는 팬텀 같은 존재가 있다는 설정을 들었을 땐 너무 대놓고 따라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지만 이후에 나오는 전개는 오히려 <오페라의 유령>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비참하기 그지없어 더 충격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프로가 되고자 예체능에 뛰어들면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건 알지만, 이런 문제를 청소년들의 원조교제 문제와 더불어서 엮어내다니, 민감한 소재를 잘도 풀어냈구나 싶었다.


 1권서부터 주인공 코노하에게 남모를 감정을 품어온 고토부키를 제대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거에 복면 미소녀 작가였다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코노하에게 있어 '더럽혀진 천사'는 상당히 분기점이 될 만한 에피소드였다. 예술계에서 재능이 없으면 없는 대로 문제고 재능이 원치 않을 정도로 너무 많아도 문제인 이중성도 다뤘는데 이 부분을 <오페라의 유령>의 화자 라울에게 대입하여 풀어내는 건 꽤 인상적이었다. 그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일단은 라울이 화자고 주인공이라 할 순 있지만 그는 작중에선 활약이랄 게 없고 끝까지 팬텀에게 농락당하다가 작품이 끝난다. 그래서 그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팬텀이고 실제로 팬텀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팬텀은 시점을 달리하면 비참하게 살았고 누구도 그렇게 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기에 소설적으로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됐을 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적으로나 그렇다는 거고 현실에서라면 대부분의 독자는 라울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오코 선배는 라울의 존재 의의가 그것밖엔 안 된다며 그저 찌질한 사내라고 여기는 것엔 반대한다. 라울의 모습은 평범한 독자들의 모습을 대변해준다. 게다가 라울은 석연찮긴 하지만 어쨌든 행복을 거머쥔다. 그 결말엔 다소 논란이 있긴 하지만 토오코 선배는 평범한 삶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건 아님을 강조하고자 극중 라울의 역할을 굉장히 신경써서 재해석한다.


 최근에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고서 그 영화의 주인공은 앤디보단 레드가 아니냐며 내 나름대로 주장을 펼친 바 있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탈옥에 성공한 앤디보다 희망을 위험하게 여겼지만 앤디처럼 드라마틱한 사람을 보고 생각의 변화가 생긴다는 점에서 레드가 관객을 대변한다는 논지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약간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의 라울도 팬텀과 대조되는 면을 보여서 진정 작가가 강조하고픈 가치는 오히려 라울에게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팬텀이 되기 싫어 라울이 되기로 한 코노하, 그리고 작중의 범인은 라울임에도 팬텀을 질투하거나 팬텀의 의지하는 등 상당히 여러 유형의 정신파탄자들이 등장해 <오페라의 유령> 못지않은 스트레를 받은 게 잊혀지질 않는다. 최근에 <우부메의 여름>을 만화로 읽었는데 그때 접한 몇몇 캐릭터들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자기 입장에선 잘해줬다지만 그게 피해자를 어찌나 기만한 건지 생각해보면 정말... 그에 비해 코노하는 이전보다 내적 성장을 이뤘기 때문인지 전보단 그 심상이 덜 답답하게 읽혔다. 뭐, 오미 시로의 말에 지 혼자 멘붕해 실어증에 걸리는 듯한 묘사 때문에 답답함이 치밀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초면인 사람한테 그렇게 쓴소릴 들어야 할 만큼 코노하가 한심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건에 관해선 둘이 나중에 대화를 나누는데 이 장면도 괜찮게 읽혔다. 약간 질질 끌어서 사족 같은 경향이 있었지만 그래도 스트레스 받은 만큼 훈훈하게 마무리를 지어서 읽을 가치는 충분했다. 그래, 다음 권에선 엄청난 멘탈 붕괴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 정도 훈훈함도 있어야지, 안 그럼 코노하 녀석... 정말로 기절할 테니.



 p.s 얘기하다보니 이 글이 '더럽혀진 천사' 포스팅인지 <오페라의 유령> 포스팅인지 헷갈릴 정도로 다른 작품 얘길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본편이 상대적으로 흥미가 덜한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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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스피리츠 2
아라카와 히로무, 토코 준 지음, 김동욱 옮김 / 애니북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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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9.5







 '다시 읽고 중고서점에 팔아버려야지' 하면서 읽었다가 다시 그 생각을 철회하게 된 본격적인 삼국지 마니아들을 위한 만화. 항상 삼국지 팬을 자처하는 내 팬심을 독특한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소장 가치 높은 만화라 이번에도 중고서점에 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 두고두고 읽지 않을까 싶다.

 삼국지 마니아인 두 만화가 토코 준과 아라카와 히로무가 그린 이 만화는 흔히 볼 수 있는 삼국지 만화가 아니다. <삼국지연의>는 총 120장으로 이뤄진 역사 바탕 소설인데 각 장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에 대한 두 만화가의 대담, 그리고 그 대담 중에 있었던 재미난 농담을 개그의 명수(?) 아라카와 히로무가 그린 4컷 만화가 두 편씩 수록됐다. 총 120번의 대담과 240편의 4컷 만화로 이뤄진 이 만화는 어지간히 삼국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금방 질릴 구성일 수 있겠으나 조금이라도 삼국지에 관심이 있다면 아주 유익하고 개그성 짙은 만화에 폭소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솔직히 팬심에 기대지 않으면 매력을 어필하기 힘든 책이긴 한데, '삼국지'라는 컨텐츠가 워낙에 팬층이 방대해서 혹할 사람이 생각보다 많을 듯하다.


 주로 토코 준이 지식과 해설을, 아라카와 히로무가 개그와 뇌피셜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두 작가 중 아라카와 히로무의 역할이 아무래도 더 돋보일 수밖에 없다. 대담도 물론 재밌지만 아라카와 히로무만이 그릴 수 있는 4컷 만화가 아니라면 이처럼 만족스럽게 읽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가끔은 쥐어짜듯 그린 개그도 있는 것 같았고 가끔은 내가 봐도 마니악한 개그도 있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개그의 질이 고르게 뛰어났다. <강철의 연금술사>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진지한 작품을 그리는 사람은 개그도 잘 소화하는 것 같다. 아니, 이 작가의 경우는 실로 그 두 가지가 완벽한 수준이라... 직전에 <강철의 연금술사>를 읽어서 그런지 더 경이롭게 느껴졌다.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지만 토코 준 작가의 삼국지를 향한 애정이나 전문 지식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대부분의 독자가 정사 삼국지나 <삼국지연의>를 텍스트로 접하지 않았을 테고 특히 나같은 90년대생 독자들에겐 이문열의 <만화 삼국지>나 코에이가 만든 게임 '진삼국무쌍' 시리즈로 더 친숙할 텐데 그렇다 보니 정작 진짜 삼국지의 내용을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삼국지연의>의 내용은 30% 정도가 창작이라는데 - 진짜로?! -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만화나 게임은 거기서 더 창작이 가미되니 내가 봐도 작위적이다 싶은 부분도 있었다. 특히 '진삼국무쌍'은... 아무튼, 토코 준이란 작가는 보통 삼국지 팬이 아니라서 그가 짚어주는 내용들은 모두 알차기 그지없었다. 중국어로 된 자료라도 읽지 않는 이상 알기 힘들 정도로 사소한 내용도 있어서 이 정도는 돼야 삼국지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삼국지가 얼마나 대단한 스토리텔링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두 만화가의 분석, 삼국지 각 인물의 정확한 등장 및 퇴장 시기, 제갈량 사후에 있었던 강유의 출사표나 진이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다룬 것 등 놓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아쉬운 게 있다면 역시 두 작가가 본격적인 삼국지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는 것일 터다. 아예 두 권을 빼곡하게 4컷 만화로 채우는 것도 좋고, 아니면 이문열과 이휘재의 <만화 삼국지>처럼 작정하고 그렸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전자와 후자 둘 다 만만찮을 것 같다. 전자는 개그 아이디어를 짜는 게, 후자는 어마어마하게 강도 높은 작업이 될 것이란 점에서. 더군다나 이 두 작가라면 보통 수준의 퀄리티로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테니 아마 작업하다가 과로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겠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기대해본다. 이만큼 삼국지를 좋아하는 작가들인데 설마 '스피리츠'란 부제를 붙인 대담집과 4컷 만화를 낸 것만으로 만족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간이 흐르면 아라카와 히로무와 토코 준의 <만화 삼국지>가 출간될는지도 모르지. 그랬으면 좋겠다. 제발. 다른 건 몰라도 아라카와 히로무가 그린 삼국지 캐릭터들이 너무 귀엽고 매력적이라서 2차 창작으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이건 그나마 가능성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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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오늘의 젊은 작가 24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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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6








 재미와 완성도를 막론하고, 나한테 있어서는 우리나라 문학에서 외국인이 등장하거나 외국이 배경이기만 해도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 같다. 원체 해외 여행을 좋아해서 그런가,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희로애락이라든가 같은 지구인끼리 사사로운 '다름'을 근거로 배척하는 건 무의미하든가 하는 주제의식을 퍽 마음에 들어하기 때문인지 대체로 국적이 다른 인물이 한 명 이상 나오는 것만으로도 더 눈길이 간다.

 공교롭게도 내가 작년에 방콕으로 출국한 날에 출간된 이 소설은 내 개인적 취향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는 작품이었다. 이 책을 방콕에 가져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의외로 우리나라엔 방콕을 배경으로 했다든가 태국 소설가가 쓴 문학 작품이 많이 출간되지 않았다. 지금 떠오르는 건 노르웨이 추리소설가 요 네스뵈가 쓴 <바퀴벌레>와 우리나라 소설가 김병운 씨가 쓴 에세이 <아무튼, 방콕> 정도인데 이 두 책과 지금부터 얘기할 <방콕>에서 묘사되는 방콕의 모습을 보노라면 참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방콕은 아마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일 텐데, 이만큼 유명한 관광지인 만큼 사건사고도 끊기지 않아 말 그대로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는 걸 절로 실감케 한다. 방콕에는 내가 5박 6일동안 여행갔던 경험과 위에서 언급한 <아무튼, 방콕>에서 묘사된 휴양지로서의 이미지도 있는 반면 전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자행되는 성매매나 테러, 코끼리 학대 등 어둡고 비참한 이미지로도 유명하다. 흔히 진지한 학술서나 소설에선 후자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묘파하곤 하는데 요번에 읽은 <방콕> 역시 이러한 경향에 꼭 들어맞는다. 4~5명의 인물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이 소설은 후반부에서 거의 모든 인물이 이야기의 무대를 방콕으로 옮기는데 그 도시의 여러 면모를 정면으로 그려낸다. 여러 면모라고 해봤자 거의 부정적인 면모뿐이라 실제로 그 도시에 가본 적이 없는 독자라면 머릿속에 '방콕=지옥도'란 공식이 들어서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의 소설적 과장이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기껏해야 6일 정도 관광해봤다고 저렇게 둘러대려는 나같은 사람을 위해 아마 이 소설이 집필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소설에서 가장 볼 만했던 건 여러 비극이 뒤로 갈수록 중첩돼 새로운 비극을 낳는다는 식의 전개가 아니라 - 오히려 약간 산만한 면이 없잖아 조금 더 비중을 할애해 천천히 전개시켰으면 어땠으려나... - 사건이 일단락 지어진 뒤에도 변화가 일어난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정우는 섬머의 이상보다 안위를 걱정하다가 상아 밀수꾼이라 착각하는 생면부지의 남자를 죽이고 벤은 약혼자에게 착각과 변명만 일삼다가 큰 망상에 빠져 살해당하고 와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국 남자에게 버림당한 태국 여자' 신세가 자기한테도 예외가 아닐 거란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린은 실질적으로 훙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그의 곁을 떠나고 문제의 인물 훙은 어느 순간부터 동정의 여지가 없는 실수를 반복한다. 섬머는 허울 좋은 소리를 하지만 어딘지 그녀 자신도 치료가 필요한 듯한 면모를 보이고 정인은 트라우마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이는 정우와 정인 남매의 모친도 마찬가지다.


 아마 작가가 가장 강조하려고 했던 캐릭터는 섬머였던 것 같다. 실제로 섬머의 입에서 중요한 대사가 많이 나왔고 가장 이상적이라 가장 위선적인 인물이었던 걸 보면 말이다. 다채로운 색깔을 지닌 도시인 방콕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 중 섬머의 시선이 가장 흔들림이 없다. 그녀에게 태국은 관광 사업을 위해 코끼리를 학대하는 나라 그 이상 이하도 아니며 섬머의 말에 따르면 동물을 학대하는 장소는 사람에게도 좋은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 그 말은 어느 정도 맞고 그 외에도 섬머의 말 중에 괜찮은 말이 여럿 된다. 하지만 사람은 동물과는 다른 존재며 같아서는 안 된다는 논지는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미안한 얘기지만 결국 그러한 전제는 우월감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월감 중에서 지적 우월감과 도덕적 우월감은 특히 위험한데, 왜냐하면 이런 우월감은 얼핏 표면적으로는 그저 바람직하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당사자에게 있어 이보다 우월감에 젖기 쉬운 명분도 없잖은가.

 섬머를 단지 미국의 백인 지식인 여성이란 카테고리 안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면 그녀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을 듯하다. 하지만 너무 한결같은 신념은 도리어 평면성을 띄는데 여기서 우린 문학 속에서 평면적인 캐릭터란 대체로 두 가지 이유에서 등장한다는 걸 생각해봐야 한다. 첫째는 그냥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반대로 사람들의 평면성을 조롱하기 위해서다. <방콕>에선 이 두 번째 이유가 훨씬 그럴싸하다. 마지막에 가장 평면적이었던 섬머가 심중에 뭔가 변화의 조짐이 있는 듯함을 암시하며 결말이 났던 걸 보면 자꾸 '세상만사를 한쪽으로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으로 작품의 주제의식을 해석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뻔한 주제의식이지만 이 작품은 현란한 스토리텔링으로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기교를 구사해 생각보다 세련되게 와 닿는 편이다. 스토리텔링하니 하는 말인데, 너무 여러 캐릭터의 시점을 넘나드는 게 가끔 산만하긴 했지만 대체로 이국적이고 속도감이 있으며 선도 굵은 전개였던 터라 계속 현혹되며 읽어내려갔던 것 같다. 의외로 이와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이 우리나라 문학 중에선 잘 안 떠오르는데 앞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해나갈 신인 작가로선 참 좋은 개성이 아닐 수 없다.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개인적으로 닮고 싶은 문체를 구사하기도 해 여러모로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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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와 얽매인 바보 - Extreme Novel
노무라 미즈키 지음, 최고은 옮김, 타케오카 미호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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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문학소녀' 시리즈를 다시 정주행하고 있다. 전편을 읽은 게 벌써 4년 전이라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이 시리즈도 틈을 두지 말고 계속 읽어나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독립적인 듯 보여도 실은 유기적으로 연결됐으니까. 적어도 코노하의 성장담이란 측면에서 이 흐름을 읽을 때마다 헤매지 않는 것이 관건이겠다.

 이번 에피소드의 모티브가 된 작품은 무샤노코지 사네아츠의 <우정>이다. 작품도 그렇고 작가도 국내엔 전혀 알려지지 않아서 어떻게 보면 가장 생소하게 다가올 법한 에피소드였다. 다행히 모티브가 된 고전 작품의 스토리 라인은 단순하다. 사랑 앞에 흔들린 두 남자의 우정을 다룬 이야긴데 우리나라의 현실로 옮기면 입대를 했더니 여자친구가 내 친구와 눈이 맞았더라는 식이다. <잘못된 만남>이나 <흔들린 우정>의 가사 내용도 연상된다. 물론 이 작가가 모티브로 선정했을 정도니 원작이 생각보다 가볍게 읽힐 작품은 아니리라. 다만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10년도 더 전일 텐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출간이 안 됐다니... 그래, 이렇게 일본인만 알 법한 작품을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문학소녀' 시리즈는 기존 고전 문학과 유사한 형태의 사건을 묘사해 등장인물들의 고난과 성장을 야기시키는 스타일을 전개시키기로 유명하다. 모티브로 삼는 작품들이 <인간실격>이나 <폭풍의 언덕>처럼 흔히 진입 장벽이 낮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은 아니라서 여타 라이트노벨 중에서도 이 시리즌 여러모로 돋보였다. 일단 고전 문학의 매력을 어필하면서 나중에 원작에 도전하게끔 만드는 교육적인 효과도 있으며 기본적으로 발랄한 분위기와 상반된 수위가 있는 '심상'을 다룸으로써 품격이 있어 보였던 것도 차별화의 큰 축을 담당하는 부분이다.

 이번 '얽매인 바보'는 코노하의 동급생 아쿠타가와의 과거사를 그렸는데 학교 가을 축제 때 <우정>을 원작으로 둔 연극을 올림으로써 아쿠타가와는 물론이고 코노하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쉽지 않은 구도의 스토리텔링을 선보인다. 상당히 복잡한 전개 방식인데 라이트노벨 특유의 캐릭터 설정이나 분위기 때문에 - 나이가 들수록 라이트노벨의 작풍이 부담스러운데 이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 산만하게 읽힌 경향이 있으나 전개상 놓친 부분도 없으며 오히려 산만할 정도로 발랄했기에 작품의 수위가 중화되는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이번 3편이 다른 작품들보다 가장 밝은 이야기인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코노하는 최근에 읽은 <우부메의 여름>의 세키구치 못지않게 어둡고 음침해서 읽는 내가 다 지쳤지만 그랬기에 그가 과거의 상처나 친구와의 관계를 잘 수습하는 결말의 쾌감이 더 진하게 다가온 것이리라.


 연극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클라이맥스 부분은 일전에 읽은 하츠노 세이의 <퇴장게임>이 떠오르기도 했다. 참고로 그 작품도 추리소설이고 이 시리즈도 엄연히 추리소설이다. 이번 작품의 경우 원작이 워낙 생소하기도 하고 작중에서도 원작의 스토리를 디테일하게 언급을 하지 않아서 마지막 토오코 선배의 추리가 우리나라 독자들 한정으로 아무래도 불공정한 측면이 있었지만... 고전 문학에 박식한 작중 탐정역의 토오코 선배가 자신이 '문학소녀'이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었다며;; 뜬금없는 멘트로 시작되는 추리는 고전 문학을 단서로 한 추리물이란 흔치 않은 설정의 백미를 선사해준다.

 최근에 고전까진 아니더라도 여러 이름난 소설이나 영화를 자주 접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엔 괜히 유명하면 더 안 보게 되는 심리가 있었는데 그것도 참 부질없게 여겨졌던 것이다. 고전 문학은 이것과는 좀 다른 심리로 멀리했었는데, 과거의 이야기가 생각만큼 현재의 나를 감동시키진 않더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크게 변함이 없지만 그럼에도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 있다는 것에도 이의를 표한다는 건 아니다. 이번 '문학소녀' 에피소드는 너무 국내에 안 알려진 작품이라 고전 문학의 매력을 느끼기 어렵던 건 아쉽지만 결말까지 읽으니 때론 유명세와 무관하게 개개인의 상황과 과거사에 반응해 묵직하게 다가올 수 있는 작품도 있다는 생각에 앞으로는 편식을 차츰차츰 줄여나가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다음 에피소드 '더렵혀진 천사'는 <오페라의 유령>을 모티브로 했는데, 그 작품은 읽어봤기에 특별히 기대가 된다. 4편을 읽을 땐 그나마 덜 헤맬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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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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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우리나라 출판 시장에서 신인 작가가, 그것도 SF 작가가 주목받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SF에 조예가 아주 깊지 않지만 다 읽고 난 뒤에 든 생각은 어느 정도 '운빨'이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하는데 - 그저 질투일 수 있지만 - 운빨이든 뭐든 SF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어쨌든 이 장르가 주목을 받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다. 김초엽 작가가 앞으로 작품 활동을 얼마나 활발히 하는가에 따라 단순히 운빨이었는지, 그게 아니면 결국 내 질투에 불과했는지는 판가름이 나겠지. 듣자하니 이 책의 몇몇 수록작이' 한국과학문학상'에서 중단편 및 가작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는데, 이후에도 '오늘의 작가상'이나 '젊은 작가상'을 수상한 것을 보면 마냥 금방 꺼질 거품은 또 아닌가 보다. 어느 정도는 관심을 갖고 지켜볼 만한 작가일 듯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개인적으로 우주 자체에 관심도 적고 나아가 인류가 우주를 개척하는 것의 의의에 회의감을 갖고 있어서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다. 과학이건 문학이건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할 수 있단 측면에서 우주는 꽤 매혹적인 무대란 건 인정하지만 과학 분야에선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야 하기에, 그리고 문학에선 지구 기준으로 아무래도 동떨어진 이야길 하게 되므로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이 표제작은 그러한 내 입장을 대변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힌 작품이다.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없다면 우주는 인간이 개척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작중의 우주 이동 기술은 지금과 비교해 꽤 진보했는데도 아직도 기술력 미비로 소외당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 인물의 사연을 듣다 보면 애초에 우주를 개척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는데, 내 개인적인 취향과 맞기 때문도 있지만 다른 수록작과 비교해서 확실히 표제작으로 꼽힐 만한 담론과 완성도 높은 서사가 있어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솔직히 가독성도 가장 좋았다.



 '감정의 물성'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도 특정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아이템이 등장한 현대 사회를 그린 이야기다. 이 아이템에 사람들이 현혹되는 이유가 단지 플라시보 효과 때문인지, 아니면 가공할 무언가가 가미된 덕분인지 추측하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여기서 사람들이 기쁨의 감정이 아닌 슬픔이나 어두운 감정이 담긴 아이템에 열광한다는 통계가 나와 화자가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다는 게 후반부의 내용이다.

 슬픔의 감정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어느 정도로 필요한가 하는 질문을 가장 잘 담아낸 작품은 바로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이라 본다. 그에 비하면 이 단편은 아이디어나 가독성은 좋아도 막상 깊이는 조금 얕은 편이었다. 그리고 서사랄 게 딱히 없이 지극히 단편적인 아이디어를 담아냈을 뿐이라 지금 와선 기억도 잘 안 날 정도다.



 '관내분실'


 이건 옛날에 학교 강의와 관련해서 과제로 접했던 작품이다. 일종의 인공지능 기술과 접목된 '마인드'가 어느 정도 대중화된 작중 세계관은 영화 <그녀>와 노리즈키 린타로의 <녹스머신>의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연상돼 반가운 설정이었으나 정작 작품 속의 담론은 평범한 편이었다. 굳이 이런 설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쓰는 걸까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엄마의 마인드를 찾아야 하는 주인공의 모종의 사정이 아무래도 SF에서 다뤄지기엔 너무 현실과 맞닿은 측면이 있어 신선한 맛이 없었다. 모성애를 설정으로 삼은 거야 그렇다 쳐도 주인공이 대체로 수동적이고 막판엔 엄마를 이해하고 그 결과 위로를 받는다는 게 그리 납득도 안 가고.

 이 작품의 가장 큰 미스터리라고 하면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수상작이라는 것이다. 작가 이력과 어울리지 않는다(?) 싶을 만큼 수려한 문장이 반전 매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일까. 과제로 접했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읽었을 때도 평이한 인상이 가시질 않아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심사기준을 알다가도 모르겠으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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