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오늘의 젊은 작가 24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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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6








 재미와 완성도를 막론하고, 나한테 있어서는 우리나라 문학에서 외국인이 등장하거나 외국이 배경이기만 해도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 같다. 원체 해외 여행을 좋아해서 그런가,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희로애락이라든가 같은 지구인끼리 사사로운 '다름'을 근거로 배척하는 건 무의미하든가 하는 주제의식을 퍽 마음에 들어하기 때문인지 대체로 국적이 다른 인물이 한 명 이상 나오는 것만으로도 더 눈길이 간다.

 공교롭게도 내가 작년에 방콕으로 출국한 날에 출간된 이 소설은 내 개인적 취향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는 작품이었다. 이 책을 방콕에 가져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의외로 우리나라엔 방콕을 배경으로 했다든가 태국 소설가가 쓴 문학 작품이 많이 출간되지 않았다. 지금 떠오르는 건 노르웨이 추리소설가 요 네스뵈가 쓴 <바퀴벌레>와 우리나라 소설가 김병운 씨가 쓴 에세이 <아무튼, 방콕> 정도인데 이 두 책과 지금부터 얘기할 <방콕>에서 묘사되는 방콕의 모습을 보노라면 참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방콕은 아마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일 텐데, 이만큼 유명한 관광지인 만큼 사건사고도 끊기지 않아 말 그대로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는 걸 절로 실감케 한다. 방콕에는 내가 5박 6일동안 여행갔던 경험과 위에서 언급한 <아무튼, 방콕>에서 묘사된 휴양지로서의 이미지도 있는 반면 전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자행되는 성매매나 테러, 코끼리 학대 등 어둡고 비참한 이미지로도 유명하다. 흔히 진지한 학술서나 소설에선 후자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묘파하곤 하는데 요번에 읽은 <방콕> 역시 이러한 경향에 꼭 들어맞는다. 4~5명의 인물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이 소설은 후반부에서 거의 모든 인물이 이야기의 무대를 방콕으로 옮기는데 그 도시의 여러 면모를 정면으로 그려낸다. 여러 면모라고 해봤자 거의 부정적인 면모뿐이라 실제로 그 도시에 가본 적이 없는 독자라면 머릿속에 '방콕=지옥도'란 공식이 들어서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의 소설적 과장이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기껏해야 6일 정도 관광해봤다고 저렇게 둘러대려는 나같은 사람을 위해 아마 이 소설이 집필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소설에서 가장 볼 만했던 건 여러 비극이 뒤로 갈수록 중첩돼 새로운 비극을 낳는다는 식의 전개가 아니라 - 오히려 약간 산만한 면이 없잖아 조금 더 비중을 할애해 천천히 전개시켰으면 어땠으려나... - 사건이 일단락 지어진 뒤에도 변화가 일어난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정우는 섬머의 이상보다 안위를 걱정하다가 상아 밀수꾼이라 착각하는 생면부지의 남자를 죽이고 벤은 약혼자에게 착각과 변명만 일삼다가 큰 망상에 빠져 살해당하고 와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국 남자에게 버림당한 태국 여자' 신세가 자기한테도 예외가 아닐 거란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린은 실질적으로 훙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그의 곁을 떠나고 문제의 인물 훙은 어느 순간부터 동정의 여지가 없는 실수를 반복한다. 섬머는 허울 좋은 소리를 하지만 어딘지 그녀 자신도 치료가 필요한 듯한 면모를 보이고 정인은 트라우마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이는 정우와 정인 남매의 모친도 마찬가지다.


 아마 작가가 가장 강조하려고 했던 캐릭터는 섬머였던 것 같다. 실제로 섬머의 입에서 중요한 대사가 많이 나왔고 가장 이상적이라 가장 위선적인 인물이었던 걸 보면 말이다. 다채로운 색깔을 지닌 도시인 방콕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 중 섬머의 시선이 가장 흔들림이 없다. 그녀에게 태국은 관광 사업을 위해 코끼리를 학대하는 나라 그 이상 이하도 아니며 섬머의 말에 따르면 동물을 학대하는 장소는 사람에게도 좋은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 그 말은 어느 정도 맞고 그 외에도 섬머의 말 중에 괜찮은 말이 여럿 된다. 하지만 사람은 동물과는 다른 존재며 같아서는 안 된다는 논지는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미안한 얘기지만 결국 그러한 전제는 우월감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월감 중에서 지적 우월감과 도덕적 우월감은 특히 위험한데, 왜냐하면 이런 우월감은 얼핏 표면적으로는 그저 바람직하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당사자에게 있어 이보다 우월감에 젖기 쉬운 명분도 없잖은가.

 섬머를 단지 미국의 백인 지식인 여성이란 카테고리 안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면 그녀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을 듯하다. 하지만 너무 한결같은 신념은 도리어 평면성을 띄는데 여기서 우린 문학 속에서 평면적인 캐릭터란 대체로 두 가지 이유에서 등장한다는 걸 생각해봐야 한다. 첫째는 그냥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반대로 사람들의 평면성을 조롱하기 위해서다. <방콕>에선 이 두 번째 이유가 훨씬 그럴싸하다. 마지막에 가장 평면적이었던 섬머가 심중에 뭔가 변화의 조짐이 있는 듯함을 암시하며 결말이 났던 걸 보면 자꾸 '세상만사를 한쪽으로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으로 작품의 주제의식을 해석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뻔한 주제의식이지만 이 작품은 현란한 스토리텔링으로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기교를 구사해 생각보다 세련되게 와 닿는 편이다. 스토리텔링하니 하는 말인데, 너무 여러 캐릭터의 시점을 넘나드는 게 가끔 산만하긴 했지만 대체로 이국적이고 속도감이 있으며 선도 굵은 전개였던 터라 계속 현혹되며 읽어내려갔던 것 같다. 의외로 이와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이 우리나라 문학 중에선 잘 안 떠오르는데 앞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해나갈 신인 작가로선 참 좋은 개성이 아닐 수 없다.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개인적으로 닮고 싶은 문체를 구사하기도 해 여러모로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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