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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9.5
우연한 기회에 선물로 받은 책이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서 추천을 받았던 책이라 내심 궁금했는데 누군가의 호의 덕에 생각보다 빨리 읽게 됐다. 그분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모든 이야길 접하는 순간에 부적절한 경우란 없고 오히려 모든 순간이 시의적절하지 않나 싶다. 이 작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근에 본 영화 <쇼생크 탈출>과 요즘 시국이 겹쳐 보여서 대단히 남다르게 읽혔다. 러시아 버전 <쇼생크 탈출>이라 봐도 좋을 만큼 - 묘하게 <피아니스트의 전설>도 연상되지만 그 작품과는 결이 살짝 다르다. - 인간의 자유 의지에 보답하는 듯한 쾌감 어린 결말,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요구되는 상황에 꽤 본받을 만한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특히.
이 이야기는 1922년, 로스토프 백작이 '구시대의 유물'을 용서치 않는 시대의 변화에 의해 무기한 연금형에 처해지면서 시작된다. 상당한 두께의 작품으로 개인적인 얘길 하자면 만약 이 백작이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난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가독성은 좋았지만 아무래도 20세기 이전의 러시아 문화라든가, 신사에게 요구되는 전반적인 교양 등에 내성이 없다 보니 700쪽이 넘는 그 긴 분량 내내 흥미를 유지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최근에 접한 <더블 스타>와 <양들의 침묵>에서도 느낀 거지만 이야기의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혹은 개인적인 취향과 맞지 않아도 주인공이 매력적이라면 소화 못할 작품은 없다는 걸 <모스크바의 신사>를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다.
범죄자의 유형은 천차만별이지만 정치범의 경우 상대적으로 독방에 갇혀도 다른 범죄자보다 제정신을 잘 유지한다고들 한다. 육신의 자유가 제한돼도 정신적 수련이 뒷받침되면 나름대로의 초연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인 걸까? 그러고 보면 위에서 언급한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도 앤디가 독방에 2주나 갇히고도 머릿속에 음악 선율이 있어 그 안에서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게 느껴졌다고 한다. 물론 반쯤은 허세겠지만, 내 경험으로 봤을 때도 군대에서도 취미 생활이 많은 유형의 사람일수록 '시간이 안 간다'는 소릴 입에 담는 법이 없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전역할 때까지 지루함의 나날을 보냈다.
군생활은 21개월로 끝나고 - 요샌 더 짧아졌다지만 - <쇼생크 탈출>의 앤디는 19년을 쇼생크에서 갇혀 있었다. 뭐, 그 감옥엔 3~40년을 갇힌 죄수들도 있는데 <모스크바의 신사>의 로스토프도 그들에 비견할 만했다. 연금형에 처한 백작은 이제 이전과 같은 법적인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됐으나 내면의 풍부한 지성과 지금까지 쌓아온 사회적 명성까지 하루 아침에 사라지진 않았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메트로폴 호텔은 실제로 모스크바에 있는 호텔로 그 유명한 크렘린 궁전과 볼쇼이 극장이 지근거리에 있는 그야말로 러시아 심장부에 자릴 잡은 호텔이다. 처음에 백작은 연금형에 따라 기존에 머물던 스위트룸에서도 쫓겨나지만 그의 품격에 반한 호텔 직원이나 그의 명성을 알아본 투숙객과의 인연 덕에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최고급 호텔에서 알 사람은 다 아는 저명한 인사로서 활약하게 된다.
작중 시대상은 1920년대부터 50년대까지의 소련인데 이 시기는 '차일드 44' 3부작에서의 묘사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의 칼바람이 불던 - 혁명의 성공을 증명한답시고 자국민이고 뭐고 다 감시하고 여차하면 죄다 쓸어버렸던 - 바로 그 시기에 해당한다. 전개에 따라 이 호텔에도 시대의 그늘이 드리우는데, 그래도 소련이 귀빈을 대접하기 위한 이미지 관리용 호텔이라 그런지 '구시대의 유물'인 로스토프가 자신의 매력을 발휘하기엔 딱 알맞은 공간이었다. 중간에 충격적인 일들도 있었고 실의에 빠진 백작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뻔했으나 몇몇 사람들과 상황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답도 없어 보이는 호텔에서의 나날을 가치 있는 삶으로 변화시키기에 이른다. 이후엔 새로운 손님과의 중요한 인연, 그리고 중립 지대처럼 소련 사회의 모진 풍파 속에서도 절묘하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환경 덕에 가끔은 백작의 처지가 벌인지 횡재인지 헷갈릴 정도로 로스토프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곧잘 지켜나가곤 한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탈출을 결심하게끔 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백작의 내면 세계의 풍부함 덕인지 실제로 이야기의 배경이 백작의 처지처럼 호텔을 벗어나지 않음에도 독자로서 특별히 답답하거나 지루하게 읽히지가 않았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육신의 자유를 넘나들기도 한다더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을 부당하게 갇혀 지낸 주인공이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고작 사회적 거리두기도 버거워 하는 내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요즘에도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다는 이유로 눈치를 보는 척만 하지 실질적으로 외출 횟수는 줄이진 않았으니까. 물론 마스크를 비롯해 위생에 충분히 신경을 쓰지만, 로스토프의 처지를 떠올리면 외출 없이도 충분히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가능함에도 그를 노력하기라도 했는지 싶어 저도 모르게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
로스토프의 처지와 지금 시국을 무작정 동일시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겠으나 '모스크바의 신사'로서 내적 깊이의 중요함을 역설한 로스토프의 모습에서 배울 점은 많다고 본다. 딱히 요즘 시국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전까진 신사라든가 양반이 갖추는 교양의 요소들을 은근히 폄훼하곤 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나선 때론 당장에 삶의 기본적인 욕구와 직결되지 않아 보여도 문학, 미식, 음악 등을 아우르는 예술적 소양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구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걸 곱씹게 됐다. 분량이 방대한 덕인 걸까. 어떤 작품의 주제의식은 가끔 독자로 하여금 주입시키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 작품은 긴 분량에 걸쳐 주제의식을 전개하다 보니 주입이 아닌 내 안에 착실히 스며드는 느낌을 받았다. 방대한 분량의 순기능을 하나 깨닫게 됐다.
분량에 대해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이야기를 펼쳐나감에 있어 적절하기만 하다면 그 분량에 짧고 길다는 잣대는 무의미한 듯하다. 1,000쪽이 넘어도 이야길 하다 만 것 같으면 짧은 것이고 20쪽에 못 미쳐도 지루하면 그 이야기는 분량이 긴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모스크바의 신사>의 분량은 적절했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오히려 그 방대하면서 장대한 이야기의 흐름을 나중에 다시 정독하리라고 기약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작품을 언제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새롭고 의미있고 시의적절하게 읽히리란 생각에 기대를 감출 수가 없다.
이 작품을 다 읽고서 바로 책장에 있던 '차일드 44' 3부작 마지막 작품 <에이전트 6>를 꺼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스크바의 신사> 마지막 장면의 시기와 그 작품의 도입부의 시기가 거의 비슷했다. 이렇게 연속으로 같은 시대 배경의 작품을 접하니 두 작품의 주인공 로스토프와 레오가 작중에서 묘사만 안 됐다 뿐이지 한 번 정도는 마주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돼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러고 보니 두 작품 다 저자가 러시아인이 아닌 영미권 작가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방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고증도 충족시키는 모습은 참으로 존경스러운데, 한편으론 소련을 배경으로 둔 현대의 러시아 소설이 과연 존재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내가 견문이 좁아 아직 접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러시아 문학이 소련을 기준으로 씨가 말라 아직 그런 소설이 안 나온 건지...
작중 로스토프의 교양 수준에서 엿볼 수 있듯 예전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대문호가 러시아에도 많았는데 현재 러시아는 소설이고 영화고 예술 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괜한 오지랖 같긴 해도 러시아 문화에 무지한 나도 바로 떠오르는 현대 러시아 소설이나 영화가 딱히 없는 걸 보면 확실히 소련이 끼친 영향이 크긴 큰가 보다. 이 영향력은 정말 무지막지한데, 나 역시 미국 작가가 쓴 이 러시아 배경의 이 소설이 괜히 힘들게 읽히진 않을지 걱정했을 정도였으니 정말 말 다했다. 결과적으론 기존 러시아 배경의 이야기가 주는 편견을 배신하는 밝고 보편적인 이야기였는데, 나와 비슷한 걱정을 하는 분들에겐 일단은 부담없이 펼쳐보라고 권하고 싶다. 반대로 원래부터 러시아에 관심이 많았다면 러시아 고전 문학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독성과 낮은 진입 장벽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뭐가 됐든 선입견을 갖고 접근하지 마시길. 아, 어쩌면 선입견을 갖고 접근해야 더 반전 매력이 크게 느껴질는지 모르겠군.
p.s 이 작품이 케네스 브래너 제작, 주연인 TV 드라마화 예정이라던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명색이 러시아가 배경인데 배우들이 전부 영어를 쓰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갑자기 배경을 영국이나 미국으로 각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사람들이 자막 읽기 싫어하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닌데... 진짜 걱정된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 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 609p
그렇지만 아무리 역사적 근거가 넘친다 하더라도 하나의 충고가 모든 사람에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 7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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