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 3 - 에이전트 6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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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3부작의 1편은 가히 역작이었던 반면에 바로 다음 작품인 <시크릿 스피치>의 완성도는 좀 미묘했다. 때문에 마지막 작품인 <에이전트 6>가 그렇게 기대되진 않았는데, 다행히도 3편은 시리즈를 완결하는 이야기로서 손색이 없었다. 레오와 라이사가 서로 이름도 몰랐던 시절을 그린 프롤로그부터 작가의 장기인 밀도 높은 소련 묘사가 돋보여 향후 작품의 완성도가 걱정되지 않을 정도였다. 바로 직전에 읽은 <모스크바의 신사>와는 상반된, 그야말로 소련 시절의 냉혹함을 다룸과 동시에 냉전 시대가 낳은 비극의 양상에까지 묘사를 확장한 게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까지 읽고나니 소련도 소련이지만 그와 대치하던 미국이라고 하등 나을 게 없었단 생각이 들지 않던가. 작가의 비판의식이 소련이란 무대를 넘어선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싶다. 이념 싸움에 희생된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은 1편 이상으로 심금을 울렸으므로.

 중반부까지는 느릿하지만 긴장감 있게 전개되다가 느닷없이 믿을 수 없는 장면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연출하는 방식이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 논란이 된 어떤 장면과 흡사했는데, 무척 중요한 장면을 무심히 지나가듯 묘사해 이게 진짜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애통하게도 그 전개는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고 레오는 이후 나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가족을 파멸로 이끈 사건의 현장인 미국으로 가야 했는데 당시 미국은 소련의 주적이라 당연히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레오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어마어마한 고생을 해야 했는데 이 과정이 실로 눈물겨웠다. 내가 이 작품을 올해 초에 읽었더라도 공감이 덜 됐을 텐데, 이념이나 여러 정치적 문제 등 외부적 요인 때문에 출입국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과 맞닿은 부분이 있어 결은 다르지만 그래도 남일 같지 않았다. 문제는 레오는 대가를 치르기 위해 한 번 벗었던 비밀 경찰의 옷을 다시 입어 국가에 충성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프간에서 그들의 혁명과 전쟁을 지원하는 일을 반강제적으로 맡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여차저차해서 미국으로 가지만 이 과정은 무척 고단했다. 레오는 말할 것도 없고 읽는 나한테도 고단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이야기가 너무 돌아가서 적응도 안 됐고 집중도 잘 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캐릭터가 등장해 집중엔 환기가 되지만 그럼에도 한시라도 빨리 미국으로 가도 부족할 판에 이게 뭐하는 삽질인가 싶어 몰입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프간에서의 전개가 생각보다 길어 솔직히 말해 대충 읽고 넘어갈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 무대가 실제 역사적 흐름에 작가가 픽션을 섞은 결과물임을 깨닫고 나중에라도 전율을 느끼게 됐다. 이런 요소가 있으니 소설의 내용이 마냥 허구로 느껴지지 않고 리얼하게 다가왔던 것이리라. 그렇다 해도 설마 아프간 전쟁을 이런 식으로 풀어내다니, 참 대담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한때는 돈만 있다면 외국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여긴 적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고 또 그때나 지금이나 국경을 넘지 못해 피범벅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으로 무겁게 읽혔다. 그리고 레오가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사건의 진실도 정말 구역질이 치밀어 내 입에서 신물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번 작품에선 그간 비판의 대상이었던 소련뿐 아니라 주적인 미국도 소련 못지않은 음모로 가득한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정말 그놈의 사상 싸움이 뭐라고 목적을 위해 사람 목숨 벌레로 여기는 국가 소속 요원들의 가치관은 제아무리 허구라도 기가 찼다.


 <에이전트 6>의 근간에는 사랑이 있는데 이때 사랑은 이성에게 품는 사랑이나 부모가 자식에게 품는 사랑과 더불어 인류애적 사랑도 모두 해당된다. 이런 사랑들은 통제될 수도 없고 꾸며낼 수도 없는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인데 이는 1편인 <차일드 44>에서부터 제기된 레오의 자기속죄라는 주제와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한때 그 누구보다 국가에 충성을 다했던 레오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어처구니 없이 목숨을 잃는 데에 적잖이 일조했는데 당장 이번 작품의 프롤로그에서도 레오가 홧김에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지로 내몰았던 전적이 밝혀진다. 그렇게 보면 레오가 지금에 와서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는 게 역겹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가 사랑이란 감정에 솔직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변해가는 모습이 일찍부터 묘사돼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2편에선 그의 죄의식이 맹목적이라 잘 와 닿진 않았는데 이번 작품에선 1편부터 고난을 함께한 아내를 향한 사랑이나 약속이 그려져 몰입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특히 1편부터 읽었다면 후반부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악마나 다름없던 그의 행보를 익히 알고도 그가 겪은 비극에 이토록 눈물이 나오다니, 세 번의 이야기에 걸쳐 고난이 끊이지 않은 레오가 어떤 식으로 변해갔는지 지켜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작품 마지막 부분에 누군가 레오에게 사람이 변한다는 것을 믿느냐고 묻는데 넓게 보면 이 '차일드 44' 3부작이 바로 그 질문을 소련과 주인공 레오에게 묻고자 작가가 집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편의 작품을 통해 소련이란 낯선 무대를 독보적 필력으로 묘사한 작가 덕분에 나의 관심사며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도 한층 넓어진 듯하다. 소련이나 러시아나 몇 편의 소설과 영화로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앞으론 그 나라의 역사가 아주 생소하게 다가오진 않게 됐다. 현실감 없이 넓은 땅덩어리며 참혹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도 사람 사는 곳이며 실상 모든 나라들이 어두운 역사를 통해서 티가 나지 않게라도 변해간다는 것 등을 깨닫게 해준 점에서 이 3부작은 내게 단순히 스릴러를 넘어 낯선 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길라잡이였다. 쉽게 의지하기엔 작품들이 전부 심리적 진입 장벽이 낮지 않은 편이었지만 러시아의 문화적 입지가 국내에서 꽤 옅다는 걸 생각하면 이만한 완성도의 소설이 있다는 건 꽤 환영해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완결까지 봤으니 이제 영화로 나온 <차일드 44>를 볼 차례인 것 같은데 평가가 안 좋아서 아무래도 망설여진다. 듣자하니 다들 영어로 대화한다는데 그게 제일 거부감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흥행에도 실패해 후속작은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2편은 몰라도 3편은 영화화하기기에 좋은 격정적인 장면이 많아서 이 작품까지 영화화되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못내 아쉽다. 1편이 왜 그렇게 평이 안 좋은지 불안하지만 일단 확인은 해봐야겠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기에...

당신에겐 사랑하는 사람들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증오하는 사람들도 중요한 거죠. - 5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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