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으로 가는 문 로버트 A. 하인라인 걸작선 1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오공훈 옮김 / 시공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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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냉동 수면, 가사 로봇, 타임 머신과 타임 패러독스, 복수극, 그리고 고양이... 이렇게 다종다양한 소재가 어우러진 SF는 처음 읽어본다. SF 장르의 토대를 개척한 거장 하인라인의 대표작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지인에게 개요를 들려줬더니 '뻔한 내용이네.' 라고 했지만 읽으면서 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50년대 소설이라기엔 무척 재밌고 신선하게도 읽혔다.

 뛰어난 발명가인 주인공이 친구와 함께 세운 회사에서 자신의 지분을 잃고 쫓겨나는 일을 겪고 만다. 일의 내막엔 자신의 약혼녀의 배신과 사내 정치에 소홀한 대가가 톡톡히 녹아있다. 이내 만사가 부질없다고 느낀 주인공은 충동적으로 자신의 반려묘와 함께 냉동 수면에 들어가 미래로 가고자 한다.


 제목의 의미를 부연하는 초반에서부터 확 눈길을 끄는 이 소설은 도저히 다음 챕터를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몰입도가 훌륭했다. 더욱이 시종 유쾌한 주인공의 내면 세계와 더불어 고양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이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SF에 가졌던 편견을 사라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무래도 과학 소설이다 보니 딱딱하고 차가울 것이라고 예상하게 될 텐데 이 작품에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게 SF란 결국 설명을 달고 사는 장르로 비춰진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설정에 대한 설명을 소홀히 하지 않는 SF는 없던데 이 부분이 늘 얘기했던 SF의 높은 진입벽의 실체라 해도 무방하다. 설명이 지리멸렬해 머릿속으로 잘 그려지지 않으면 아무래도 만족스럽게 읽긴 어려울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는 어땠을까. 주인공이 발명한 가사 도우미 로봇 '프랭크'를 비롯해 30년 뒤의 미래 - 그게 2000년이다. <미래소년 코난>을 볼 때도 그랬지만 내가 작중 미래보다 더 미래에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 에 대한 묘사도 타임 머신의 이론에 대한 설명도 솔직히 100% 이해되진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추리소설로 예를 들면 트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럴수록 이야기의 매력이 중요해지지 않나 싶다. 설령 작품 속 디테일을 전부 이해하고 넘어갈 순 없더라도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엔 지장이 없도록 이야기가 명쾌하고 흥미진진한 게 최고가 아니냐는 것이다.

 지금 읽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가치관에 반하는 요소가 나와 거슬리는 게 고전의 숙명이라면 이 작품은 그 숙명에서 꽤나 자유로웠다. 작중에서 드러난 작가의 여성관을 집안일과 추한 최후와 롤리타(...)로 보이는 게 좀 걸리긴 하나 가사 도우미 로봇을 만드는 주인공의 목표나 고양이를 대하는 애정을 떠올리면 작가의 성향을 치우치게 바라볼 순 없을 듯하다. 어쨌든 작가는 미래 세계에 대해 상상하며 인간사와 맞닿은 과학 발전을 꿈꾼 공학도로서의 이상 - 약력을 보면 공학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다. - 또한 겸비하고 있으니 제법 진보적인 부분 또한 느껴졌다.


 제아무리 고전이라 하더라도 미래를 꿈꾼 소설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것일까?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도 지루했지만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남달랐던 게 생각난다. <여름으로 가는 문>도 비슷한 맥락으로 자못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비교적 가벼운 감성으로, 이른바 엔터테인먼트 감각으로 집필됐을 소설은 과학을 학구적으로만 묘사하지 않음으로써 장르의 저변을 확대시키지 않았나 싶다. 사람들 말마따나 SF 3대 거장인 하인라인의 대표작다웠다.

 결국 SF도 어엿한 문학이라고 한다면 최종적으로 이야기의 완성도에서 평가가 갈릴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작가의 여성관 중 일부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고서, 혹은 그를 차치하더라도 서사적 재미가 탄탄하고 지금 읽어도 옛스럽지 않은 설정이 복합적으로 녹아 있기에 마냥 재밌게 읽었다. 생각보다 작중의 문제가 손쉽게 풀려 살짝 아쉬웠지만... 분명한 건 지금껏 읽은 그 어떤 SF 소설보다 가독성이 좋아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데 그게 그 무엇보다 좋았다. 집중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는 소설이야말로 독자로서 가장 반가운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포함해 시공사에서 펴낸 하인라인 선집 5권을 전부 샀는데 남은 4권도 기대된다. 중편과 휴고상 수상작이던데 조만간 읽어야겠다. 그나저나 다른 3대 SF 거장인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C. 클라크도 궁금해졌다. SF에 대한 거부감이 낮춰진 건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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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나 스토리콜렉터 56
마리사 마이어 지음, 이지연 옮김 / 북로드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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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사람들이 하나 착각하는 게 있다. '동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 이 말은 동화와 진지하게 마주한 적이 없는 사람만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다. 동화 창작의 본질은 '아이들도' 볼 수 있는 이야기 - 그런 의미에서 '어른들을 위한 동화'란 표현엔 어폐가 있다. 예를 들자면 '의사 선생님', '역전앞'과 같달까? - 를 쓰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쓰기 어려운 문학이고 의식하고 읽으면 가볍게 읽히는 동화란 거의 없다.

 최근 동화를 비튼 다양한 2차 창작물도 적잖이 만나볼 수 있다. 동화를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도 심심찮게 개봉된다. 동화의 실사라는 게 사람들 이목을 끌기도 하고 고전에 가까울수록 현대적인 요소를 복합적으로 녹일 수 있으니 많이들 시도하는 것 같다. 고백하자면 단 한 편도 보지 않았지만... 어쨌든 흥미를 돋우긴 하니 한 번쯤 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동화를 패러디한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었나?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 책이 처음일 것이다. 동화에 SF를 접목시킨 '루나 크로니클' 시리즈의 번외편으로 부득이하게 본편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참 바람직하지 않게도 번외편부터 읽는 아이러니함에 이미 이 독서가 흡족스럽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말았다. 예상대로 애석하지만 시리즈의 외전임이 짐작되는 잔재미적 요소엔 큰 감흥이 일지 않았으나 외전답지 않게 완결성이 있어 그런대로 즐길 만했다.

 다들 잘 아는 '백설공주' 이야기의 악역인 여왕의 시점을 다룬 작품이다. 거울이 외모 콤플렉스를 건드린 나머지 공주에게 갖은 시련을 안긴다는 게 내가 여왕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의 다다. 소설은 여왕이 '루나'라는 나라의 왕이 되고 여러 사건을 거쳐 외모 콤플렉스가 심화되는 비극을 그렸다. 내 단편적인 인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도 있게 인물을 묘사한 것은 솔직히 감탄스러웠다.


 악역이 왜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생각해 보면 무척 성숙한 궁금증이 아닌가 싶다. 날 때부터 악역이 아니라 어쩌다 악역이 됐는가 살펴보는 것은 치기 어린 시선의 소유자는 흉내도 낼 수 없다.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을 읽을 때도 범인의 동기나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는 전개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꽤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특히 외모 콤플렉스의 그늘에 평생에 걸쳐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의 내면은 정말 몰입됐고 공감도 많이 갔다. 지금은 덜하지만 나도 한 때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린 적이 있는데 그 어두움을 굉장히 잘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고전에 속하는 동화일수록 유명한 만큼 단순하고 유치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단순함도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인가 보다. 단순함 속에 불현듯 궁금증이 하나 피어났을 때 또 하나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법.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팬픽션'이라고 2차 창작을 즐겼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모방이 아닌 창조에 가깝다. '백설공주'를 읽으면서 피어난 사소한 의문, '왜 여왕은 악역이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참 귀중하고 부러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백설공주' 영화가 몇 있는 걸로 아는데 이렇게 여왕이 주인공인 작품이 있었나? 다른 여왕들은 어떻게 묘사됐으려나?


 외전을 먼저 읽은 게 못내 아쉬웠다. 이 작품을 읽으니 시리즈 본편도 궁금해졌다. '신데렐라', '빨간 망토' 등 여러 동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있다는데 그것 참 기대된다. 아무렴 외전이 이 정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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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
찬호께이.미스터 펫 지음, 강초아 옮김 / 알마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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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13.67>의 저자인 찬호께이의 작품이자 흔치 않은 중국 추리소설이며 미스터 펫이란 작가와의 합작으로 SF가 가미됐다기에... 하여튼 여러 이유로 읽게 된 책이다. 뭐 하나 이목을 끌지 않는 요소가 없는데 기대 이상의 심오함과 퀄리티를 선보여 꽤나 만족했다. 특히 SF와 추리소설의 결합이 참 쉽지 않은데 그걸 해내니 눈이 뜨이는 기분이다.

 최근에 읽은 SF 소설인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도 가상 세계가 주된 배경이었다. 요즘 SF계에서 트렌디한 설정인 건가? 방식은 달랐지만 이 작품도 컴퓨터 게임이 익숙한 우리 세대에게 익숙할 가상 세계를 다루고 있었다. 아주 SF적으로, 또 추리소설적으로도.


 홍콩의 추리소설가 찬호께이와 대만의 추리소설가 미스터 펫이 번갈아 쓴 연작은 꽤 흥미로운 작품들로 구성됐다. 수감자의 형량을 정하지 않고 교화 정도에 따라 석방시키는 제도가 도입된 근미래가 배경이다. 가상 시뮬레이션을 통해 출소자가 다시 범죄에 손을 대는가 살펴봄으로써 형량을 정한다는 설정인데 해당 시뮬레이션 인공지능의 매커니즘과 인공지능의 등장에 따른 변화를 그려냈다. 전자를 찬호께이가, 후자를 미스터 펫이 그렸는데 배경은 중국이 아닌 미국과 일본이다. 딱히 이질감은 없었는데 굳이 중국 작가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사실 별 상관없는 일이지만.

 압도적인 현실감을 내포한 가상 현실의 등장이 인간사에 미치는 것의 윤리적 논란과 우리가 두 발로 선 현실 세계의 경계선을 둘러싼 철학적 사유가 아주 장관이었다. 결국 현실이 아닌 가상의 결론일지라도 데이터로써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충격적인 얘기였다. 꽤나 정밀하게 범죄를 예측한다 하더라도 기계를 맹신해도 되는 걸까? 소설은 해당 시스템의 장단점을 부각시킨다. 아니, 대개 단점을 지적했다.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드는 허점과 더불어 시스템에 휘둘리는 인간 자체의 문제점도 맹렬히 드러낸다.


 솔직히 대략의 흐름은 어느 정도 예상되긴 했지만 설정을 구축하는 디테일과 예측 불허한 전개 덕에 탄력적으로 읽혔다. 개인적으로 미스터 펫이 쓴 이야기의 설정은 난해하고 뜬금없는 경향이 있었는데 페이메이구나 니지마 료코 같은 캐릭터는 또 괜찮아 그런대로 읽을 만했다. 미스터 펫이 보다 추리소설적이고 찬호께이의 글은 SF 성향이 짙었는데 둘 다 가상 세계의 이모저모를 낱낱이 다루고 있어 소설이 전체적으로 풍성했다. 특히 찬호께이는 분명 어려운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알기 쉽게 묘사하니 아주 읽기 편했는데 <13.67>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싶었다. SF로도 추리소설로도 손색이 없었다.

 가상 현실이 주요 소재인 탓에 세계관이 무너지는 체험이 잦았는데 혼란스럽긴 해도 꽤 매력적이었다. 그 밖에도 감탄스런 부분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 첫 번째 소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히 말하진 못하겠지만 화자인 연쇄 살인범의 범죄 생활은 여느 사이코패스가 그렇듯 사소한 이유로도 치밀하게 범죄에 임하는 자세는 봐도 봐도 간담이 서늘했다. 작품의 설정과 동떨어진 것 같으면서도 크게 맞닿은 부분이기도 해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기도 했다.


 추리소설은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이런 추리소설은 쉽게 접할 수 없을 것 같다. SF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이런 SF도 쉽게 접할 수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서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이런 혁신적인 작품을 계속 읽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 잔인한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현실의 세계 속 인물들이 겪는 게 낫지요. - 100p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해 생겨났고, 인간성은 과학기술 때문에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그걸 혐오하는 거예요. 난 항상 기계보다 사람을 믿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요. - 390p




각각의 인물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과거의 사건이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주었는지, 무엇이 게임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현실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시뮬레이션 중에서 하나만을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나 또다른 시뮬레이션을 꿈꾸고 있으니까. - 5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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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고기
조창인 지음 / 밝은세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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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이 책을 도대체 얼마만에 읽는 건지 모르겠다. 어렴풋이 초등학생 때, 이 작품의 신드롬이 거의 끝물에 다다를 즈음에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내가 최초로 읽다 운 소설이지 않을까. 이 작품의 여러 평을 읽어보니 비단 나만 운 게 아닌 것 같다만.

 진한 부성애를 다룬 소설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작품일 것이다.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타협과 희생을 거듭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부던한 노력에 힘입어 병은 낫지만 끝끝내 아버지의 진의를 알지 못하는 아들의 심경을 교차하며 서술하는데 지금 읽어도 짠했다. 아들의 심리 묘사도 동떨어지거나 과장된 구석 없이 이뤄졌고 이 작품의 백미일 아버지의 심리 묘사는 가히 처연함 그 자체였다.


 굳이 말하자면 신파 소설이라 부를 수 있겠으나 솔직히 그렇게 폄훼하는 듯 부르는 게 그리 마뜩잖다. 중요한 건 울음이 아니라 그 울음이 터지는 상황일 텐데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울음이 뒤따르는 내용이라면 트집을 잡을래야 잡을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트집 잡는 게 이상한 일이다. 다만 거기서 어떻게 더 울리려고 괜히 수작을 부리는 게 못마땅할 뿐이다.

 <가시고기>가 눈물을 자아내려고 하는 경향은 별로 심하지 않았다. 어지간히 삐딱하지 않은 한 작품의 드라마에 몰입하게 될 것이다. 아들을 위해 펜을 내려놓은 시인으로서, 헤어진 전처의 전남편으로서, 현재 전처의 현재 남편에 비해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남자이자 아들의 아버지로서, 기껏 찾아온 천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가련한 사람으로서의 갖은 체념과 회한과 고통을 이렇게 절절하게 묘사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제목의 가시고기는 새끼를 두고 떠난 암컷을 대신해 목숨을 바치며 알을 지키다 알 속의 새끼마저 떠나면 바위에 머릴 박고 죽는 물고기라고 한다. 어디까지 맞는 설명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대놓고 결말을 암시하는 이 작품은 이미 공개된 결말을 향한 필연적인 장치를 속속 드러내며 잔인한 슬픔에 당도하게 만든다. 어떻게 상황을 이 정도로 악화시킬 수 있을까, 작가는 해피엔딩의 유혹을 받지 않았을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새삼 새드엔딩 작품을 쓴 모든 작가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아주 오랜만에 읽은 작품인데 다시 읽으니 예전의 감동 못지않은 감탄이 터져나왔다. 17년 전에 발표된 소설이라 표현이 지금 읽기에 살짝 어색하고 옛스러운 부분이 있었으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단순히 내용만 감동적인 게 아니라 구성적인 부분 등 소설적 내실도 탄탄해 사뭇 인상적이었다. 어느덧 '신파는 곧 저급한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는데 이젠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p.s 우스겟소리지만 한때 공지영의 <고등어>, 안도현의 <연어>와 더불어 이 작품의 성공 때문에 물고기 제목의 작품은 많이 팔린다는 문학계의 속설이 있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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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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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8







 모종의 이유 때문에 인공지능 관련 이야기를 계속 접하고 있다. 그 이유를 아직 밝힐 수 없지만... 중요한 건 뭐가 됐든 간에 테마를 정한 일련의 독서는 아주 흥미롭다는 것이다. 일전에 읽은 <당신을 위한 소설>의 띠지 - 난 그 부분을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 에 같은 출판사에 나온 책 한 권이 소개됐다. 바로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이 책이었다. 전혀 소설 같지 않은 제목인데 작가 이름은 익히 들어온 터라 궁금증이 일었다. 'SF 사상 보기 드문 정치함과 우아함을 갖춘' 작가라니. 이런 수식어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SF는 장벽이 그리 낮은 장르는 아닌 것 같다. 발군의 상상력과 과학적 고증과 토대가 전제되지 않는 한 흉내내지 못하는 장르다. 이때,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란 비단 현실적 한계 안에서의 과학을 일컫진 않는다. SF가 Science Fiction의 약어로 '공상' 과학을 뜻하는 만큼 작가 나름의 상상력을 과학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을 가리킬 테다. 그리고 과학이란, 내가 봤을 때는 인간을 제외하고선 성립되지 않은 분야인 듯하다.


 인간의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보다 나은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인간을 위한 마음'이 없는 이상 과학은 발전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가끔 가치가 전도된 일부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이 비인간적 작태를 보인다는 설정의 픽션을 접하기도 하는데 한낱 문학도인 내가 봐도 있을 수 없는 일로만 비춰진다.

 SF의 매력도 이런 과학의 태생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사람의 미래를 위해 상상하는 낭만이 없는 SF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무늬만 SF라도, 정통 하드 SF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보다 관건은 과학과 미래가 우리 인간의 삶과 얼마나 밀접한가, 그를 살펴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처음 접한 테드 창의 소설은 아주 이상적인 SF였다. 가상 세계에서의 인공지능 아바타인 '디지언트'를 두고 둘러싼 윤리적, 상업적 논쟁과 더불어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철저한 묘사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여담이지만 작가의 가장 긴 작품 - 200쪽 내외 - 이라는데 체감상으론 그보다 2, 3배 분량이 두터웠던 것 같다. 아무래도 SF적 서사에 어색한 탓도 있었겠지만 빨리 읽어내려가기에 아까운 '교감'이 그려진 덕분인 것도 같다.

 최근 본 영화 <옥자>는 초반부에 미자와 옥자의 종을 초월한 교감을 짧고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반면에 이 작품은 오로지 인간과 인공지능 아바타의 교감에 모든 분량을 동원해 천착한다. 이런 전개가 나로선 어색할 따름이었다. 다분히 SF적이고 학술적이고 설명적인 일부 내용은 솔직히 지루할 때도 있었다. 흥미를 돋구는 내용이지만 견문이 좁은 탓인지 머릿속으로 소설의 정경을 온전히 그려내기가 그리 쉽진 않았다.


 하지만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아도 두 번째 읽을 땐 또 다르겠지? 읽는 내내 두 번째 독서를 기약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작품이 한 둘은 아니다. 사실 요즘 들어 더욱 그런 것 같다. ...어쨌든 하드 SF라 명명되는 만큼 결코 가볍게 읽히진 않았으나 불순물이 끼지 않은 순수하고도 진중한 SF인 것은 초심자인 나조차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또 작중에서 다뤄진 가상 세계의 캐릭터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분명 컴퓨터 세대인 우리 세대부터 대두된, 일종의 전유물이기도 하니 디테일하게는 몰라도 충분히 공감할 순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것도 아니었더라면 난...

 SF는 여전히 내게 진입 장벽이 높지만 도전을 밥먹듯이 하니 그 매력이 만만찮게 풍겨온다. 조만간 읽을 예정인 작품들이 몇 있는데 정말 기대된다.

관계란 관계를 맺은 상대방이 독자적인 욕구를 느낄 수 있는 경우에만 비로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법이다. 애완동물을 키우다가도 귀찮아지면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 아이인데도 최소한의 보살핌만으로 때우려는 부모들도 있다. 처음으로 한 번 싸우자마자 헤어지는 연인들도 있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이들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상대가 애완동물이든 자기 아이든 연인이든,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욕구와 자기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의지가 있어야 한다. - 2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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