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박이 원숭이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 / 들녘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4







 7년 전, 오로지 소설에서만 구현 가능한 반전이라는 서술 트릭의 정체를 내게 각인시켜준 작품은 다름 아닌 미치오 슈스케의 <외눈박이 원숭이>다. 엄밀히 말하면 와카타케 나나미의 <의뢰인은 죽었다>에 실린 단편에서 최초로 접하긴 했는데 그땐 '이게 바로 서술 트릭이구나' 하고 인식하진 못했다. 순수하게 서술 트릭으로 감탄한 건 <외눈박이~>가 처음이다. 이후에 우타노 쇼고,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 등 많은 서술 트릭을 접하긴 했지만 이 작품이 준 충격은 잊히질 않는다.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읽지 않았더라면 그 위치는 확고했을 텐데.

 지금 와서 다시 읽으니 <벚꽃~>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시기적으로 나는 <외눈박이~>를 <벚꽃~>보다 먼저 읽었는데 실제 출간 순서 - 일본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 는 <벚꽃~>이 더 빠르다. 유명하기도 이 작품이 더 유명한데 계속 언급하는 이유는 두 작품이 플롯이나 스타일, 주제의식이 상당히 유사해 늦게 나온 <외눈박이~>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 칭해야만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오해할까 일러두겠는데 절대 표절은 아니다. 두 작품의 반전에는 무엇보다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핵심이 될 터인데 둘이 근본적으로 비슷하긴 하다. 후반부에서 반전을 터뜨리는 연출이나 주인공의 직업, 로맨스에 기반을 둔 주인공의 행동거지 등 비슷한 부분들이 알게 모르게 보인다. 하지만 표절이란 것은 야구공이 창문을 깬 것을 두고 축구공이나 농구공이 창문을 깨뜨렸다고 바꾸는 식의 성의 없고 창의력도 떨어지는 행위를 일컫는다. 야구공이 아닌 비둘기로 바꾼다면 유사성을 들 순 있겠으나 표절이라 부를 순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 중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다. 특유의 음울함은 어디 가고 장난끼가 넘치는데 <까마귀의 엄지>에서도 이런 요소가 다분하지만 이 작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런 작풍 때문에 기존 작가의 팬들은 이 작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던데 - 여담이지만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 중 문체가 가장 유치하다. - 나 같은 경우에는 이 작품으로 처음 작가를 접해서 그랬는지 마냥 재밌게 읽혔다. 이번에 다시 읽으니 단순히 서술 트릭을 차용한 메시지 있는 소설에 그치지 않고 각종 기묘한 이야기와 탐정의 활극이 결합해 읽기에 아주 유쾌했다. 몇몇 부분은 처음 읽을 때처럼 재밌지는 않았지만.


 계속 <벚꽃~>을 언급하며 두 작품의 유사함을 역설했지만 <외눈박이~>에 이 작품만의 매력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특기해야 할 것은 서술 트릭으로 시험할 수 있는 온갖 요소의 반전을 대거 녹여낸 작품이란 점이다. 이러한 요소가 난잡하다고 여길 수 있겠으나 작품의 주제, 서술 트릭에 특명된 이른바 '편견 깨부수기'에는 너무나 잘 부합해서 대단한 도전 정신이라며 감탄스러웠다.

 난잡함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이 작품이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 꼬리표일지 모르겠다. 도청 전문 탐정인 미나시가 의뢰에 따라 악기 회사를 도청하는 것에서부터 미나시가 새로 스카우트한 여탐정의 이야기, 미나시의 과거에 드리운 그늘 속 미스터리, 미나시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인 로즈 플랫의 어딘가 심상찮은 이웃들, 그리고 악기 회사를 도청하던 중에 벌어진 살인... 이 모든 사건이 불과 299페이지 동안 그려진다. 속도감은 출중하고 얼개를 잘 갖추긴 했지만 확실히 분주한 느낌이 강했다. 또 언급해서 그렇긴 한데 <벚꽃~>도 제법 이것 저것 이야기하고 있지만 500페이지가 넘어서 좀 더 차분하게 읽힌다. 문장력도 작가가 베테랑답게 발군이었고.


 어떻게 보면 이러한 난잡함이야말로 이 작품의 약점이자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난잡한 덕분에 한 치 앞을 예상하기 힘든 점은 내겐 플러스 요인이었으며 소설은, 특히 장편의 경우에는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녹아들수록 독자의 집중을 환기하며 작가의 표현력의 정수를 엿볼 수 있어 그렇게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반전의 경우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추리소설이 반전에 목숨을 건 소설이라 폄훼당하긴 하지만 이런 류의 서술 트릭은 확실히 소설만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부각시켰으니 가히 가장 소설다웠다고 평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작품 트릭의 정체는 놀라움은 물론이고 한바탕 설교를 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적잖이 인상적이었다. 작가의 진중한 주제의식이 결합한 서술 트릭이란 늘 그랬다. 어지간한 양산형 사회파 추리소설은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의 전달력으로 독자를 휘어잡는 게 바로 서술 트릭의 강점이니까.


 초반에 말했듯 이 작품은 나에게 서술 트릭의 진수를 가르쳐준 첫 번째 작품이다. 서술 트릭의 효과 때문인지, 아니면 작품의 주제와 소재를 처음 접했던 탓인지 장애와 그에 따른 편견을 다룬 소설 중 이 작품이 아직까지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작품의 반전 중 일부는 약간 과한 나머지 사실 없어도 상관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파급력은 상당했다. 모름지기 서술트릭이 띤 특명을 너무나 잘 완수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하자면 <벚꽃~>의 존재감이 걸리는 게 좀 안타깝다.



 p.s 초판을 읽어서 그랬나, 다 좋았는데 오타가 잦았다.

저지른 죄를 잊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자신의 모든 걸 던져서 속죄하는 것, 또 하나는 더 많은 죄를 저질러서 그걸 덮어버리는 것. 강한 사람만이 전자를 선택하죠. - 161p




비둘기 암컷과 수컷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아?

정답은.

아무도 구분하려고 하지 않아. - 236~237p




당신이 가진 열등감은 당신 속에서 존재하는 거야. 당신의 결점은 자존심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거야. - 276p




사람은 결국 기억이 아닐까. 모습과 형태가 사람을 형성하지 않고, 보고 들은 사실이 사람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사실들을 어떻게 기억해 왔는가. 바로 이것이 사람을 형성할 것이다. - 28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 번째 빙하기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좋은생각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9.5







 성장 소설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일종의 틀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출생의 비밀 같은 걸 시작으로 가령 남다른 가족 환경에서 자라거나 반체제적이거나 자아 찾기에 몰두하는 등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이러한 예상되는 이미지를 안고서 본연의 감동을 줄 것인가, 혹은 차별화가 있었는가 살펴보는 게 성장 소설 감상의 출발점일 것이다.

 오기와라 히로시의 <네 번째 빙하기>는 실로 전형적인 성장 소설이었다. 일단 저자인 오기와라 히로시에 얘기하자면... 참 종잡을 수 없는 작가다. 처음 <소문>으로 접했을 땐 추리소설가인 줄 알았는데 두 번째 접한 <내일의 기억>은 전형적인 신파 소설이었고 이번엔 성장 소설이다. 다른 저서를 살펴보니 하드보일드, 유머, 호러 등 장르가 다양하던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궁금해졌다. 이런 걸 장르의 마술사라고 불러야 하나?


 사생아인 주인공이 시골 마을에서 성장하는 이야기로 특기할 부분이 있다면 자신의 아버지를 크로마뇽인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빙하기의 그 크로마뇽인이 떠올랐다면 그게 맞다. 도대체 무슨 연고로 소년은 자신의 아버지를 크로마뇽인이라 여긴 것일까. 500페이지에 달하는 제법 길쭉한 분량에 걸쳐 그려지는 소년의 삶은 그 질문과 함께 출발한다.

 처음엔 사생아인 주인공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라 넌지시 들여다보듯 읽어 내려갔다. 전개에 박차를 가하는 유별난 사건이 등장하기 보단 일본 영화를 보듯 비교적 잔잔히 흘러간다. 과학자인 어머니가 러시아가 소련이었을 적 유학을 갔는데 어쩌다 냉동 인간 상태의 크로마뇽인의 자손을 낳는 실험에 자원했다가 자신이 태어나버렸다는 게 초반부에 주인공이 독자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아버지라는 빈 구멍을 다소 허황되지만 혹할 구석이 있는 출생 배경으로 채움으로써 자랑스런 '크로마뇽인'답게 성장하려는 주인공의 여정이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개인적인 소감을 밝히자면 부분부분은 흥미로웠지만 사냥이니 창이니 하는 비중 있는 사고와 묘사들이 은근히 지루한 경향이 있었는데 그만큼 작품이 컨셉은 확실해서 중반부 이후부터는 점차 익숙해졌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역할을 모자람 없이 수행했고 주인공도 특이한 마인드의 소유자였던 것치곤 산뜻하게 성장기를 보내서 막판에는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로 몰입하고 있었다. 종국엔 주인공이 자신의 슬픔을 떨치고 일말의 미스터리를 해결함과 동시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마무리를 짓는 것으로 하여금 독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감동을 선사한다. 이건 정말이지 성장 소설이 아니면 형용할 수 없는 종류의 감동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은 이른바 자신의 일생에 직결된 것이고 그것은 곧 생존이라고 불릴 만하다. 이 도식을 무시한 채 무작정 살아가려고만 들면 주인공 말마따나 구멍이 구멍인 채로 방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처럼 허황될지라도 우리는 자신만의 정체성, 그게 크로마뇽이든 네안데르탈인이든 뭐든 채워넣어야만 한다. 비록 현실과 달라 나중에 재정립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게 바로 귀엽기 짝이 없는 우리들의 유년기가 필연적으로 밟을 수순이니까.


 처음 독서에 맛들렸을 때완 달리 요즘은 성장 소설이 그리 와 닿지 않았다. 그 소설이 그 소설 같기도 하고 특정 나이대에 맞는 감성을 지나치게 중시해 반감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다. 흔히 성장 소설을 '청소년 문학'이라고 지칭하곤 하는데 이 말이 '청소년만 읽을 소설'이란 뉘앙스를 풍겨 일부 작가가 그를 충실히 따른 탓이 클 것이다.

 유년기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건 누구라도 거칠 수밖에 없는 이벤트로 특정 연령대의 사람에게 읽혀도 될 만큼 하찮은 시기가 아니다. 긴 일생과 비교하면 짤막하지만 초반부에 벌어질 일이라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성장은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란 말 이전에 성인이 되기까지의 일생은 허투루 다룰 수 없으며 사람에 따라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각별한 시절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보편적이면서 진정성 있는 접근이 필요할 텐데 이 작품이 바로 그랬다.


 가슴으로 느껴 설명하기 복잡한 걸 되도록 그럴 듯하게 말하려 하니까 힘들어 죽을 것 같다. 처음에 언급한 전형적인 틀을 대놓고 갖춘 작품이거늘 어딘가 벅차오르게 만든 작품이었다. 작가가 최근에 나오키상을 받았다는데 그 작품을 비롯해 다른 작품들도 이참에 살펴봐야겠다. <소문>을 쓴 작가가 날 이 정도로 감동시킬 줄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문열 이희재 만화 삼국지 10 - 오장원에 지는 별, 완결
나관중 원작, 이문열 엮어옮김, 이희재 만화 / 미래엔아이세움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10







 고전을 그렇게 가까이하지 않는 나지만 몇 번을 읽어도 열광하는 작품이 하나 있다. 삼국지, 정작 나관중이 쓴 <삼국지>도 읽어본 적이 없고 하물며 정사로도 살펴보지 않았으면서 여러 2차 창작물을 통해 수없이 접한 작품이다. 아마 내 또래 20대들에겐 만화책이나 게임 등으로 유명하지 않을까.

 이문열이 펴낸 <삼국지>를 만화가 이희재 씨가 그린 <만화 삼국지>를 읽었다. 도대체 몇 번째 읽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삼국지 만화를 접한 적이 없어서 얼만큼 묘사가 잘 됐는지 비교할 순 없으나 모르긴 몰라도 초심자가 삼국지를 이해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이나 읽으니 질릴 법도 한데 여전히 재밌었다. 관우가 의리는 두터우나 오만한 인물이란 것도, 조조는 볼수록 복잡한 인물이고 - '너의 가족을 극진히 보살피겠다'... 그 어떤 말보다 기억에 남는다. 상대를 죽이면서 입에 담는 말치곤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일말의 주저함이 엿보인다. - 유비는 생각보다 무능하지 않다는 게 이번에 느낀 점이다. 특히 자기를 낮추며 기회를 노리고 제갈량에게 유선이 재주가 없으면 대신 황제가 되란 말에서 유비란 인물의 그릇을 가늠할 수 있었다.

 옛날과 달리 각 권마다 만화 본편이 끝난 뒤에 서술되는 해설이 있는데 이번엔 정독을 했다. 예전엔 글뿐이라서 넘겼는데 지금 읽으니 알짜배기도 이런 알짜배기가 없다. '삼국지'가 워낙에 내용이 방대해 여러 해석과 주장, 자세한 배경 설명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간 궁금했거나 짐작했던 것들을 다뤄주고 있어 한층 더 '삼국지'를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위, 촉, 오의 대서사시는 이렇게 다시 읽히고 막이 내렸다. 패권을 장악한 조조, 적벽대전을 거쳐 삼분되는 천하, 제갈량의 출사표, 유비 삼형제와 제갈량의 꿈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결말이 지금 와서 보니 참 쌈박하게 받아들여졌다. '삼국지'가 전달하는 것이야 뭐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것이야말로 역사이며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사의 비참함이자 아이러니한 재미가 아닌가 하고 담담하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이게 다 뭔 소리냐면, 결국 나는 또 '삼국지'를 읽을 것이라는 얘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단편소설 35 (책 + MP3 다운로드) -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수능.논술.내신을 위한 필독서
헤밍웨이.오 헨리 외 지음, 박선희 엮음, 박찬영 편역 / 리베르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8.0







 집 어딘가에 굴러다녔던, 책 이름처럼 중고생 때 읽지 못한 책을 드디어 다 읽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구성이 아주 좋았다. 어지간히 유명한 고전 소설이 대부분 수록됐고 개중에는 교과서에서 읽은 작품도 있어서 겉잡을 수 없이 반가웠다. '노인과 바다'나 '어린왕자, '변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 중편에 속할 작품도 실려 꽤 두툼한 볼륨을 자랑했다. 내가 중고생 때는 이 두께가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가볍게 읽었다.

 다만 번역은 좀 아쉽다. 각 작품의 번역을 누가 맡았는지도 밝히지 않는 이 미심쩍은 책은 그리 흡족스럽지 못한 번역 때문에 몰입도는 떨어지는 편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거슬렸다고 콕 짚기는 애매하지만 모파상이나 오 헨리, 고골리의 '외투'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은 처음 읽는 것도 아닌데 이 책으로 접하니 2%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펴낸 시기가 2005년인 것을 고려하면 그럴 법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두 작품이 수록된 것도 아니라 솔직히 감상을 적기 귀찮다. 대신 다음을 기약하며 인상 깊었던 작품에만 간략히 코멘트를 달고 포스팅을 마무리하겠다.



 오 헨리 - 그의 작품은 비교적 최근에 많이 접해봤다. 그의 더 많은 작품을 접하고 싶을 따름이다.


 포의 '검은 고양이' - 아주 최근에 낭독극으로 본 원작 소설. 내심 낭독극의 완성도에 감탄했다. 이 짧은 걸 그렇게까지...  



 http://blog.naver.com/jimesking/221053638210 


 <검은 고양이> 낭독극 후기 



 폴 빌라드 - 교과서에서 본 작품인 '이해의 선물'은 지금 읽어도 뭉클했다. 동심을 존중하는 어른의 마음은 동심보다 아름답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원유회' - 이런 감정은 늘 느끼곤 했던 것이다. 내가 행복할 때 누군가 불행할 수 있다. 그를 의식할 때의 씁쓸함이 가슴을 찔렀다.


 모파상 -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 오 헨리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작품을 읽고 싶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 모국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진부한 주제지만 와 닿는 부분이 많다.


 고골의 '외투' - 개인적으로 여기 수록된 러시아 소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상하게 러시아 소설은 고전만 접하는 것 같은데 확실히 매력이 있다. 좀 더 좋은 번역으로 다시 접하고 싶다.


 카프카의 '변신' - 아직도 획기적이고 기괴한 소설. 몇 번을 떠올려도 주인공의 처지가 처연하기 그지없다.


 루신 - 희망에 대한 구절은 <그건 혐오예요>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진 구절이기도 해 아주 반가웠다. 이것만으로도 루쉰은 접할 가치가 있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위에 난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에는 길이란 게 없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58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7.5







 책, 하물며 글쓰기에 미친 사람을 결코 일반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도 어디 가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있다고 말하면 십중팔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내 또래들이 그런 것 같다. 소설이나 시를 쓰는 걸 배운다고 하면 그런 과도 있냐며 되묻는다. 하긴 나도 진로 상담 이전까지 몰랐으니 피차일반이라 할 수 있겠다.

 문예창작과와 국어국문학과는 명백히 다른 과다. 문과/어문학 계열이 아닌 엄연한 예체능 계열 전공으로 말 그대로 창작을 배운다. 비평도 배우긴 하나 국어국문학과와는 접근하는 이유가 다르다. 아무튼 고1부터 책을 미친 듯이 읽은 나조차도 문예 창작과의 존재조차 몰랐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하면 입 아플 것이다. 나야 글쓰기가 전공이자 꿈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난 학기 때 소설 창작을 가르쳐 주신 강영숙 교수님의 소설을 읽게 됐다. 교수님 소설이라 읽은 게 아니라 읽고 싶어서 산 책이 알고 보니 교수님 책이라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한 학기 동안 교수님으로부터 소설 창작의 신세계를 경험한 터라 책이 더욱 기대됐는데 막상 읽으니 수업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한껏 자전적으로 읽혔다. 솔직히 소설치곤 허구다운 얼개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교수님 후기처럼 좀 더 나중에 써야 할 작품이긴 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은 정말이지 한정적인 독자에게나 남다르게 읽힐 소설이었다. 바로 나처럼 전공자들, 아니면 글쓰기에 대해 열망을 갖고 있거나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작품을 완독하기란 힘들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독자 가리는 소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가 소설을 쓰는 건 전적으로 작가의 마음이고 당연히 그에 따라 취향도 갈리고 독자도 갈리겠지만 지나치게 마니악하면 읽는 입장에선 그저 난감할 뿐이다. 이 작품이 그 정도로 심하진 않았지만 분명한 건 파트마다 다음 파트를 읽고 싶게끔 만드는 몰입도가 많이 부족했다. 나름 흥미로운 전개가 간간이 나오는데 그게 글쓰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 한 번도 글쓰기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에겐 어찌 돼도 상관없을 지점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은 이 책을 읽지 않을 확률이 높긴 하나...

 나는 어땠냐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교수님 소설이 아니었으면 중간에 읽기를 그만뒀을 것이다. 책 띠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글쓰기의 첫 마음을 다시 느끼고 싶은 이들, 글쓰기를 통해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소설!'

 이 문구를 작품을 다 읽고 봤는데 그래서 큰 감흥이 없었구나 싶었다. 사람마다 글쓰기에 대해 정의가 다를 텐데, 예를 들어 나는 소설을 작가의 주장을 이야기로 하여금 재밌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을 바탕으로 글쓰기에 열을 올리는 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아직까지 타성에 젖진 않았다. 덧붙이자면 타성에 젖을 정도로 오래 글을 쓴 것도 아니다. 그런 나에게 소설의 문구처럼 <라이팅 클럽>을 읽어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까진 없었던 것이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읽었지만 잔잔하게 와 닿은 것 외엔 그렇게 재밌게 읽히진 못했다. 돌이켜 보니 메타소설은 늘 그랬다.


 올해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공모전에 내 소설을 응모하는 것인데 슬슬 남의 소설만 까지 말고 내 소설과 마주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글쓰기란 게 참 앉은 시간에 비례하는 작업이 아니라서 참 애가 탄다. 그런 와중에 소설 속에서 생활과 글쓰기가 병행이 안 된다는 말엔 정말 폭풍처럼 공감되고...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병행해서 성과를 거두고 말리라.

생활과 글쓰기는 절대로 병행할 수 없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늘 한쪽이 부서지고 깨졌다. - 15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