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박이 원숭이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 / 들녘 / 201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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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7년 전, 오로지 소설에서만 구현 가능한 반전이라는 서술 트릭의 정체를 내게 각인시켜준 작품은 다름 아닌 미치오 슈스케의 <외눈박이 원숭이>다. 엄밀히 말하면 와카타케 나나미의 <의뢰인은 죽었다>에 실린 단편에서 최초로 접하긴 했는데 그땐 '이게 바로 서술 트릭이구나' 하고 인식하진 못했다. 순수하게 서술 트릭으로 감탄한 건 <외눈박이~>가 처음이다. 이후에 우타노 쇼고,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 등 많은 서술 트릭을 접하긴 했지만 이 작품이 준 충격은 잊히질 않는다.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읽지 않았더라면 그 위치는 확고했을 텐데.

 지금 와서 다시 읽으니 <벚꽃~>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시기적으로 나는 <외눈박이~>를 <벚꽃~>보다 먼저 읽었는데 실제 출간 순서 - 일본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 는 <벚꽃~>이 더 빠르다. 유명하기도 이 작품이 더 유명한데 계속 언급하는 이유는 두 작품이 플롯이나 스타일, 주제의식이 상당히 유사해 늦게 나온 <외눈박이~>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 칭해야만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오해할까 일러두겠는데 절대 표절은 아니다. 두 작품의 반전에는 무엇보다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핵심이 될 터인데 둘이 근본적으로 비슷하긴 하다. 후반부에서 반전을 터뜨리는 연출이나 주인공의 직업, 로맨스에 기반을 둔 주인공의 행동거지 등 비슷한 부분들이 알게 모르게 보인다. 하지만 표절이란 것은 야구공이 창문을 깬 것을 두고 축구공이나 농구공이 창문을 깨뜨렸다고 바꾸는 식의 성의 없고 창의력도 떨어지는 행위를 일컫는다. 야구공이 아닌 비둘기로 바꾼다면 유사성을 들 순 있겠으나 표절이라 부를 순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 중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다. 특유의 음울함은 어디 가고 장난끼가 넘치는데 <까마귀의 엄지>에서도 이런 요소가 다분하지만 이 작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런 작풍 때문에 기존 작가의 팬들은 이 작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던데 - 여담이지만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 중 문체가 가장 유치하다. - 나 같은 경우에는 이 작품으로 처음 작가를 접해서 그랬는지 마냥 재밌게 읽혔다. 이번에 다시 읽으니 단순히 서술 트릭을 차용한 메시지 있는 소설에 그치지 않고 각종 기묘한 이야기와 탐정의 활극이 결합해 읽기에 아주 유쾌했다. 몇몇 부분은 처음 읽을 때처럼 재밌지는 않았지만.


 계속 <벚꽃~>을 언급하며 두 작품의 유사함을 역설했지만 <외눈박이~>에 이 작품만의 매력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특기해야 할 것은 서술 트릭으로 시험할 수 있는 온갖 요소의 반전을 대거 녹여낸 작품이란 점이다. 이러한 요소가 난잡하다고 여길 수 있겠으나 작품의 주제, 서술 트릭에 특명된 이른바 '편견 깨부수기'에는 너무나 잘 부합해서 대단한 도전 정신이라며 감탄스러웠다.

 난잡함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이 작품이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 꼬리표일지 모르겠다. 도청 전문 탐정인 미나시가 의뢰에 따라 악기 회사를 도청하는 것에서부터 미나시가 새로 스카우트한 여탐정의 이야기, 미나시의 과거에 드리운 그늘 속 미스터리, 미나시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인 로즈 플랫의 어딘가 심상찮은 이웃들, 그리고 악기 회사를 도청하던 중에 벌어진 살인... 이 모든 사건이 불과 299페이지 동안 그려진다. 속도감은 출중하고 얼개를 잘 갖추긴 했지만 확실히 분주한 느낌이 강했다. 또 언급해서 그렇긴 한데 <벚꽃~>도 제법 이것 저것 이야기하고 있지만 500페이지가 넘어서 좀 더 차분하게 읽힌다. 문장력도 작가가 베테랑답게 발군이었고.


 어떻게 보면 이러한 난잡함이야말로 이 작품의 약점이자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난잡한 덕분에 한 치 앞을 예상하기 힘든 점은 내겐 플러스 요인이었으며 소설은, 특히 장편의 경우에는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녹아들수록 독자의 집중을 환기하며 작가의 표현력의 정수를 엿볼 수 있어 그렇게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반전의 경우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추리소설이 반전에 목숨을 건 소설이라 폄훼당하긴 하지만 이런 류의 서술 트릭은 확실히 소설만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부각시켰으니 가히 가장 소설다웠다고 평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작품 트릭의 정체는 놀라움은 물론이고 한바탕 설교를 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적잖이 인상적이었다. 작가의 진중한 주제의식이 결합한 서술 트릭이란 늘 그랬다. 어지간한 양산형 사회파 추리소설은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의 전달력으로 독자를 휘어잡는 게 바로 서술 트릭의 강점이니까.


 초반에 말했듯 이 작품은 나에게 서술 트릭의 진수를 가르쳐준 첫 번째 작품이다. 서술 트릭의 효과 때문인지, 아니면 작품의 주제와 소재를 처음 접했던 탓인지 장애와 그에 따른 편견을 다룬 소설 중 이 작품이 아직까지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작품의 반전 중 일부는 약간 과한 나머지 사실 없어도 상관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파급력은 상당했다. 모름지기 서술트릭이 띤 특명을 너무나 잘 완수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하자면 <벚꽃~>의 존재감이 걸리는 게 좀 안타깝다.



 p.s 초판을 읽어서 그랬나, 다 좋았는데 오타가 잦았다.

저지른 죄를 잊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자신의 모든 걸 던져서 속죄하는 것, 또 하나는 더 많은 죄를 저질러서 그걸 덮어버리는 것. 강한 사람만이 전자를 선택하죠. - 161p




비둘기 암컷과 수컷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아?

정답은.

아무도 구분하려고 하지 않아. - 236~237p




당신이 가진 열등감은 당신 속에서 존재하는 거야. 당신의 결점은 자존심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거야. - 276p




사람은 결국 기억이 아닐까. 모습과 형태가 사람을 형성하지 않고, 보고 들은 사실이 사람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사실들을 어떻게 기억해 왔는가. 바로 이것이 사람을 형성할 것이다. - 2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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