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 하늘에 계신 아빠가 들려주는 사랑의 메시지
롤라 제이 지음, 공경희 옮김 / 그책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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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내겐 일찍 곁을 떠난 부모가 없다. 운이 좋게도 우리 부모님은 정정하시고 약간의 위기는 있었지만 두 분 다 그럭저럭 잘 극복하고 계시다. 그런데 최근 내 주변 사람들이 부모를 잃는 것을 보면서 만약 부모님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상상을 하고 만다. 정말 막막하기 그지없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5살 때 하늘에 간 아버지가 남긴 편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30살까지 살다 갔는데 자신의 어린 딸을 위해 자기가 살면서 나름대로 익힌 삶의 지혜를 담긴 '매뉴얼'을 남긴다. 본격적인 틴에이저인 13살부터 30살까지. 엄마가 재혼하는 날 고모로부터 매뉴얼을 받은 주인공은 매뉴얼을 각별히 여기며 삶의 중요한 대목마다 펼친다.


 6년 전에 읽은 이 소설은 그때완 좀 다르게 읽혔다. 잇따라 다시 읽은 책들이 전보다 더 괜찮았던 것에 비해 이 책은 약간 실망스러웠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10점 만점이라 여겼는데... 내게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매뉴얼 속 주인공의 아버지의 걱정처럼 시시콜콜한 잔소리로 읽히진 않았으나 이상하게 내용이 귀에 잘 안 들어왔다. 어째서 그런 걸까?

 내용에 트집을 잡자면, 일단 주인공이 매뉴얼에 대해 제법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젠 곁에 없는 아빠의 존재에 대한 결핍을 아빠가 남긴 글로 달랜다는 것은 듣기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 이면엔 또 다른 감정의 소용돌이가 있을 법도 하다. 가령 글로써 자기 삶에 개입하려는 아빠에 대한 초점 없는 원망이나 방황 같은 게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소설에선 그런 기색이 상당히 옅었다. 한마디로 주인공이 참 착했다.


 착한 주인공도 좋지만 착하다 보니 소설이 교훈적이고 감성에 충만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대체로 무난하게 읽혀졌다. 주인공의 삶에 학업, 연애, 취업 등 여러 사건과 위기가 찾아오지만 아빠가 남긴 매뉴얼이란 소재와 결부시켜 그리다 보니 언뜻번뜻 피상적이지 않나 싶기도 했다. 영국 청소년이 자라는 과정을 바라봄에 따르는 문화적 신선함은 제법 재밌었지만 아빠의 매뉴얼의 내용은 평범해서 -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마찬가지로 특별할 테지만 내용만 보면 적절한 수준의 조언과 지혜에 불과해 익숙하게 들린다. - 어째 미묘하게 재밌다 말았다. 전개도 약간 빨랐던 것 같고.

 내가 너무 냉소적이고 비관적이게 됐나? 처음 읽었을 때 감동의 도가니였던 게 믿기지 않는다. 그것 참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주인공이 30살 생일을 맞아 펼친 매뉴얼의 마지막 페이지는 지금 봐도 감동적이었지만... 아무래도 시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내 삶에 큰 변화가 생겼을 때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루이스, 네가 믿는 것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짐을 싸 들고 집에 가는 편이 낫단다. - 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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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자 - 하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9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북스토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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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7






 처음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접했을 때 나는 그가 코미디 소설만 쓰는 작가인 줄 알았다. <한 밤중에 행진>, <공중그네>, <남쪽으로 튀어>만 보면 정말 코미디 소설가인 것만 같다. 이후 <올림픽의 몸값>이나 최근에 읽었던 <침묵의 거리에서>를 통해 작품 색깔이 다양한 작가라고 인식하게 됐지만 기본적인 뿌리는 코미디 소설가라고 여겼다.

 범상치 않은 제목의 이 작품은 작가가 데뷔 직후에 쓴 초기작으로 그간 코미디 소설가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작가의 뿌리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간 작가의 추리소설, 범죄소설은 잘 찾아보지 않았는데 이 작품을 보니 오히려 이런 작품이 더 전문 분야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만큼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특히 이 작품의 분위기는 내가 알던 오쿠다 히데오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암울했는데 그럼에도 작풍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가로서 월등한 능력을 가졌다며 감탄했다.


 오쿠다 히데오의 장기인 여러 등장인물의 교차되는 시선이 십분 다뤄진 작품으로 각각의 일상의 행복이 어떻게 방해당하는지 그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의 주제와 접근 방식은 미야베 미유키와 흡사했는데 개인적으로 오쿠다 히데오의 손을 들고 싶다. 장르 소설의 측면에선 미야베 미유키의 사이코패스와 악당 - 예를 들면 <모방범> 같은 작품. 여담이지만 <모방범>과 <방해자>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작품으로 그 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모방범>이 1위를, <방해자>가 2위를 받았다. -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하게 읽히지만 순수하게 무너지는 일상을 살펴보는 데에는 오쿠다 히데오 같은 필치가 더 와 닿는다. 미야베 미유키의 글은 따뜻한 나머지 어딘지 오그라드는 부분이 있는데 오쿠다 히데오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친구들과 함께 비행을 일삼는 막장 고등학생, 아내와의 사별 후 삶의 의지가 결여된 듯한 형사, 동네 마트에서 알바를 하며 가족과의 소소한 행복을 꾸려나가는 주부. 이렇게 3명이 폭행과 방화, 야쿠자 조직과의 알력, 노동 현장 고발 등 여러 사건에 휘말려 서로의 인생에 균열을 낸다. 그 균열은 처음엔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작았지만 균열이 점점 커져 결국 무너져버리는 제방처럼 끝을 향해 내달리는 인물들의 심리가 부족함 없이 그려졌다.


 개인적으로 페이지는 빨리 넘어감에도 어째 지루하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서서히 무너지는 일상과 그에 따른 심리를 그린 작품이다 보니 감수하고 읽을 법했는데 그래도 작가의 초기작이라 그런지 이후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흡입력이 떨어지는 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세 인물의 시선이 번걸아 가며 진행되느라 흐름이 막혔던 것 같은데 요전에 읽은 <침묵의 거리에서>를 떠올리면 참 대조되는 부분이다. <침묵의 거리에서>는 세 명보다 더 많은 인물의 시선을 다뤘는데 심지어 이 작품보다 분량이 적었음에도 내용이 난잡하지 않고 풍성했다. 중심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시선을 그린 그 작품은 각 인물이 맡은 역할과 상징하는 바가 적절했는데 이는 유감스럽게도 <방해자>에선 살짝 부족한 요소다.

 물론 점점 변화하는 인물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그린 점에서 이 작품은 굉장한 디테일을 자랑한다. 검소하고 소심한,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평범한 일본 소설의 주부 같았던 교코는 처음의 인상과는 다르게 점차 행동력 있고 감정이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내 개인적으론 구노의 이야기보다 더 눈길이 갔다. 소설을 읽으면서 특정 캐릭터 한 명에 대한 인상이 이렇게까지 바뀌기는 무척 드물기 때문이다.


 복선과 반전을 추구하는 장르 소설로써가 아닌 범죄 소설, 그것도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터진 범죄에 잇따르는 균열에 추측하는 작품의 특성에 의거하면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교코라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자포자기한 듯 이미 불행을 등에 업은 구노는 평범한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는 반면에 교코는 정말 평범했지만 자신이 놓인 일상 속 평화가 위협받자 보이고 마는 반응이 그렇게 인상적일 수 없었다. 종국에 가서는 소름이 돋기도 했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초반에 받은 인상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반전 어린 전개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주 사소한 흔들림에도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음을 최근 들어서 절감하는 중이다. 그렇다 보니 이 작품의 내용에 정말 고개가 끄덕여진다. 작품을 읽은 게 2주 전이고 일이 생긴 건 요번 주였는데 선후는 뒤바뀌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포스팅을 하고 있으니 완독했을 때완 또 다르게 다가온다.



평범한 사람이 우연찮게 범한 범죄는 해결이 된다 해도 뒤끝이 안 좋다. - 하 1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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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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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난 '맘충'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냥 막연하게 '마마보이'보다 상위 버전의 욕일 거라고 짐작했다. 굳이 풀이하자면 엄마 찾는 벌레정도려나 싶었다. 설마 벌레라고 가리키는 대상이 엄마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실제로 저자가 지나가는 남자한테서 맘충이란 욕을 들었을 때 구상이 시작됐다는 이 소설은 지극히 여성의 시각에 입각한 소설이다. 이런 부분은 남성 독자인 입장에서 아주 낯선 것이었다. 불편함 이전에 낯섦이 더 컸다. 특히 급식을 먹을 때 출석 번호가 뒷자리인 여학생이 불이익을 받는 것이나 사호한 호의에 착각해서 덤벼드는 남자에 대한 무서움 등은 이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체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특성상 대부분의 여성의 공감을 샀지만 어떤 남성들에겐 공분을 사고 있다고 한다. 주인공 김지영의 일생을 엿보노라면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어떤 식으로 차별받고 사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남자 독자는 바로 이 부분에 동의를 하지 않는 모양이다. 여성으로서의 삶에서 각종 안 좋은 면만 긁어모아 특정 성별에 대한 적개심이나 동정심을 조장한다고 난리를 치던 글을 읽었는데 나 역시 같은 남자이거늘 크게 공감할 수 없는 말이다.

 이 소설이 제법 직설적이고 작정하고 만들어진 페미니즘 작품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대개 이런 경우엔 일말의 불편함을 남기기 마련이다. 더구나 이 작품에서 간간이 고갤 드는 통계 수치나 의도가 명확한 전개는  실험적이거나 뻔해서 도리어 반감이 들 법도 했다. 이런 형식적인 요소들을 문제 삼는다면 이래저래 불편한 소설이긴 했다.


 작품 뒤에 실린 해설에선 평범함을 추구하여 독창성을 가진다며 이 소설을 일컫는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이지 여성이라서 쓸 수 있는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얘기되지 않았던 일상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이건 내가 경험한 적 없는 일상이다. 그리고 분명한 건 절대 공격적이지 않았다. 작중에서 김지영을 좌절케 하는 주체적 대상들은 전부 남성이지만 그게 곧 남성에 대한 적대심으로 해석되지 않은 것이다. 그럼 왜 전부 남성인가? 왜 남성만 김지영을 괴롭게 하는 역할인가? 이렇게 묻는 사람은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당사자라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게 있다. 난 <82년생 김지영>이 과장됐다고 하는 이야기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차라리 이 소설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다. 결혼과 출산의 과정에서 김지영에게 의지가 되고자 한 남편이 김지영에게 면박을 당하고 김지영의 불평등한 기분을 더욱 돋우는 존재로 그려진 부분이 다소 이성적이지 못했던 것은 살짝 마음에 걸렸으니까.


 최근 혐오라는 개념이 인지되면서 이상하게 더욱 격화되는 것 같다. 특히 한쪽 성이 다른 성을 혐오하는 모양새는 예전보다 더욱 극렬하다. 난 이런 혐오의 근원에는 타자에 대한 무심함과 무지함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는데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이 무심함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를 새삼 깨달았다. 여성으로 태어나서 처하게 된 상황, 처하게 될 상황에 집중하고 풀어낸 소설이 그간 페미니스트라 자칭했던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지 않기에 남자가 여자를 안다고 말한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얘기였는지... 정말이지 무심함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아주 술술 읽히고, 여성의 현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심지어 간만에 울컥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여성 차별이란 키워드에 집중하니 소설 전개 방식이 토막난 경향이 있지만 그 일관된 주제의식이 또 집중을 높여줬다. 한마디로 집약적이었다고나 할까. 이 소설은 여성의 처지가 현재진행형임을 아주 잘 시사하며 그 어떤 페미니스트 서적보다 흡입력이 강했다.


 여성 차별 문제가 단시간에 결과가 나타날 만큼 어제 오늘 일이 아닌 터라 앞으로 이 책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 같다. 연대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현재 이 소설을 둘러싸 던져대는 막말 - 소설의 완성도 이전에 리얼리티를 문제 삼는... - 속에 담긴 그들의 무심함에 결코 굴해선 안 된다. 진실한 통찰과 비판도 없이 자신이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서 범하는 적대심이 언제까지고 활개쳐선 안 될 일이다. '여성은 세계에서 유일하고도 광대한 남은 식민지'라는 말마따나 그간 되풀이된 정세에 이젠 불만을 표하고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해야만 한다. 안 그랬다간 계속 되풀이될 게 뻔하니까. 내겐 이 암담하고도 끝내 무기력했던 소설이 그렇게 다가왔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 132p




김지영 씨가 능력이 없거나 성실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일하는 게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듯,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일에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 145p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라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동안 피해자들은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 156p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 165p




여기까지가 내가 읽은 <82년생 김지영>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82년생 김지영 혼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함께 고민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김지영이기 때문이다. - 1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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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온도 -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하명희 지음 / 북로드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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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4.5







 내가 마지막으로 본 우리나라 드라마는 김명민 주연의 <베토벤 바이러스>다. 그 이후로 드라마 자체를 보질 않는데 이유는 별것 아니다. 그 얘기가 그 얘기 같아서. 이 말을 납득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얘기를 좀 더 풀자면, 스릴러건 음악물이건 사채업자 이야기건 뭐건 로맨스와 키스신이 필수적으로 들어간다는 공식이 싫증난다는 얘기다. 로맨스니 뭐니 하는 것들이 결코 나쁘단 얘기는 아니지만 뭘 틀어도 로맨스라다면 그건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러브 라인이 흥행을 위한 공식이라 할지라도. 아니, 흥행의 공식이기 때문에 다뤄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문제다.

 일본 드라마나 미국, 영국의 드라마도 흥행을 위한 일종의 정형화된 틀을 갖고 있지만 시장의 크기와 다양성 면에서 비교가 불허하다. 우리나라도 요즘 케이블 드라마가 각광받으면서 제법 다양한 컨텐츠를 다루나 본데 원체 불신이 깊은 나는 그마저도 미심쩍으니... 당장 일본에서 미스터리 장르를 표방하는 드라마라고 하면 정말 로맨스 없이 - 러브 라인이 있다 해도 썸만 타다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다. - 장르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솔직히 드라마를 안 본 지 너무 오래 돼서 내가 드라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수 있다. 그래도 간혹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나 혹은 드라마 작가가 쓴 소설을 접하는 경우가 있어 아주 할 말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순전히 나의 선입견일 수 있는데 드라마 작가가 쓴 소설은 정말이지... 소설의 맛 자체는 그닥 훌륭하지 않다는 걸 읽을 때마다 느낀다.

 아까도 말했듯 드라마를 원체 보질 않는 탓에 하명희라는 드라마 작가는 완전 처음 접하는 이름이었다. 작가의 대표작도 마찬가지. 내가 이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은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라고 과거에 쓴 소설이 요번에 <사랑의 온도>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함과 동시에 원작 소설도 제목이 바뀌면서 재출간됐다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이 사실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건 소설을 먼저 쓰긴 했지만 결국 드라마화를 염두에 둔 소설이라는 것이다.


 읽는 내내 차라리 드라마로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인지 시종 소설의 작법 자체가 아예 눈에 들어오질 않더라. 드라마화를 결심하기에 너무나 적절한 텍스트이며 적당한 소설화를 거쳤지만 그게 다다. 나 한 사람의 이상한 장애라고 치부해도 상관은 없는데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서두에서 작가는 사랑의 피상성과 관계의 어긋남에 대해 쓰고자 했고 제법 근사하게 이야길 풀어냈지만 결국 익히 알고도 남는 얘기에 지나지 않았다.

 독서는 누가 뭐라 해도 굉장히 능동적인 행위다. TV를 틀어놓고 보는 것과 책장을 펼쳐 읽는 행위는 눈으로 행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절대 같지 않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읽은 내용을 머릿속에 상상으로 풀어내고 다음 내용을 찾아가는, 제법 품이 많이 드는 행위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하고자 할 때 평범한 이야기를 들이댄다면 살짝 허탈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사랑은 아주 오래 전부터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소재고 누구나 천착해는 주제다. 그렇기에 어지간해선 기억에 남는 창작물이 나오기도 힘들고 그걸 접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물론 이 소설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아까도 말했지만 드라마로는 상관 없을 그럭저럭인 수준의 작품이다. 무슨 X폼을 잡겠다고 이리 삐딱하게 구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딱히 감흥은 일지 않았던, 그야말로 읽었는지 말았는지도 기억이 애매한 작품에 불과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내게서 '사랑'에 대한 잡설을 이끌어내지 못한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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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9.3







 경찰을 비롯한 국가 기관의 실태를 고발하는 작품이라고 하면 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 다음으로는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44>가 떠오르는데 이런 작품의 특성상 국가의 명령이란 이름 아래 일반 시민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장면이 꼭 나온다. 고문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련만 피해자가 어처구니 없이 인생이 망가지거나 최악엔 죽는 경우까지 다뤄지니 이래저래 뒷맛이 찝찝하다.

 사쿠 다쓰키의 <조작된 시간>은 일전에 <사망 추정시각>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작품이다. 처음 출간될 때의 원제도 그렇고 요번에 바뀐 제목도 그렇고 사실 그닥 흥미를 돋우는 제목이 아니라서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현직 볍조계 종사자가 썼다는 작품의 진가를 미처 몰라본 것이다. 이건 제목의 문제라기보단 전적으로 내 어리석음 탓이다.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제목이 작품의 전부가 될 수는 없거늘.


 이 작품은 원죄冤罪가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그린 점에서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적어도 오리하라 이치의 <원죄자>보단 인상적이었다. 원죄란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일컫는데 보통 작품 속에서 누간의 지독히 악의적인 목적에서 탄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선 원죄란 여러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각자의 정의를 관철하느라 빚어진 해프닝으로 묘사한다. 실로 소름 끼치는 일이고 심지어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경과가 무척 세세하게 적혀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한 소녀가 유괴당해 결국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피해자의 소지품에 남은 지문을 검색한 결과 전과 기록이 있는 한 청년이 경찰의 눈에 띈다. 당장 청년을 체포한 청년은 취조 끝에 자백을 받아내고 결국 청년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사건 기록을 접한 한 변호사가 청년을 찾아간다.


 청년이 자백을 했다는 점에서 이미 끝난 사건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청년을 범인이라 단정한 경찰이 청년을 밀실의 취조실에서 어떤 식으로 코너에 몰고 끝내 자백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산에서 우연히 소녀의 시체를 발견했다가 덜컥 겁이 난 청년이 신고도 않고 지갑의 돈만 훔치고 자리를 모면한 어리석음의 대가치곤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살인의 추억>에서 연신 '향숙이'를 입에 담는 남자가 중요한 목격자임에도 정신 지체자라서 불리하게도 경찰들에게 끝까지 시달린 것과 같다. <조작의 시간> 속 청년이 비록 덜떨어진 인물이긴 해도 그렇기 때문에 경찰의 정의감에 희생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순 없잖은가.

 경찰의 말마따나 범인을 잡기 위해 범인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가 피해자가 죽은 초반의 비극적 설정 역시 청년의 원죄와 그 성격이 다르지 않다. 둘 다 사리분별도 배제한 어줍짢은 정의감에 휘말린 케이스란 점에서 말이다. 피해자의 경우엔 그 유족에게 사망 추정시각을 조작함으로써 자신들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찰 조직의 부도덕함이 엿보이고 사형이 선고된 청년의 경우는 결정적 증거도 없는데 '이 녀석이 범인이 확실하다'는 감에 의존해 위법을 가하면서까지 범인으로 몰아간 막장스러움을 연출한다.


 그 이후엔 사법부의 병폐와 맞물려 청년의 무죄가 쉽사리 인정받지 못하는 난관을 그려낸다. 그런데 중요한 건 청년이 무죄라는 건 오로지 독자인 우리만 안다는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작가가 알려줬으니까. 이렇게 전지적 시점이 없다면 청년이 무죄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자백을 한 범인이 - 왜 바보같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자백을 했나 싶겠지만 거짓으로라도 자백을 할 수밖에 없는 취조 방식이 가해지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 느닷없이 몇몇 증거가 나왔다고 무죄라고 생각하기는 확실히 무리한 일이긴 하다.

 이 세상에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 그건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다. 하지만 거대한 물결에 휩싸여 모두가 나 하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하거나 아니면 내가 한 일이라 단정짓고 있다면 그것만큼 고독한 일도 없을 것이다. 사건의 일면만 보고 속단하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는 건 자명한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보다 신중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작중에서 사건이 종결되고 시간이 제법 흘러버린 터라 진짜 정의는 좌절될 수밖에 없냐며 침울해지는 순간이 온다. 과오를 바로잡기에 늦은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모른다. 실제로 종결된 사건은 대개 그렇게 취급된다. 개중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원죄도 있음에도 말이다. 원죄란, 누가 뭐라 해도 비극이다. 원죄가 방치되는 것은 진범을 못 잡는 것만큼이나 - 갑자기 영화 <7번 방의 선물>이 떠오르는구만. -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원죄가 어떤 식으로 탄생하고 공고히 굳혀지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한 이 작품을 읽은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덮어놓고 의심하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무조건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실로 간과하기 쉬운 위험함과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아무리 경계해도 모자람이 없는 것에 대해 얘기한 이 작품이 불편해도 읽어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스토리가 사실과 다르게 무고한 피의자를 범인으로 몰고 가는 것이 특히 ‘일본형 원죄冤罪‘의 특징이다. - 204p




인생은 화와 복, 즉 재앙도 행복도 서로 뒤섞여 꼬인 새끼줄 같다는 의미인데, 내가 원죄사건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는 이유는 원죄라는 건 결코 한두 사람의 악인이 품은 악의나 누군가 한 사람의 실수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수십 가닥의 짚이 꼬여서 굵은 밧줄이 되는 것처럼, 수십 명의 인간이 한 일, 즉 악의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선의, 배신이나 과실에다 일종의 의무에 충실한 행동이나 모범적인 행위도 모두 함께 꼬이고, 다양한 인간 활동이 섞이고 얽히고 설켜, 그것이 어떨 땐 원죄가 되기도 한다는 말일세. - 469p




하지만 자칫 범인으로 보일 수도 있는 피의자를 범인으로 몰지 않기 위해서는 조직의 흐름에 항거하여 진실을 추구할 수 있는 한 단계 더 높은 정의감이 있어야 한다. - 4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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