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상 (양장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8.6






  저번에 시코쿠 섬의 마츠야마로 여행 갔을 때 읽을 책을 2권 가져갔다. 아무래도 5박 6일 동안 가다 보니 200쪽도 겨우 되는 <도련님>만 가져가기엔 약간 불안한 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위키에서 <해변의 카프카>에서 마츠야마가 나온다고 써있는 걸 보고서 상권만 들고 가 읽었다. 근데 마츠야마는 안 나오고 다카마츠... 내가 놓쳤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적어도 작품의 주요 배경은 다카마츠라서 마츠야마에 들고 갈 책으로써 잘못 짚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뭐, 사실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긴 하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안 가져갔더라면 이시모치 아사미의 <물의 미궁>을 들고 갔을지 모르겠다. 그 작가가 에히메 현 출신이거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두 번째로 읽었다. 군대에 있을 때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빼면 읽은 게 없다. 우리나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인기 있는 일본 작가이면서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자자해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지만 이래저래 말도 많은 작간데 이제야 장편소설을 처음 읽었다. 우리 교수님 중 한 분은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못을 박았던데 왜 그러셨는지 알 것도 같다. 솔직히 별로 좋아하는 교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리가 아주 없는 얘긴 또 아니다.


  이 책의 저자가 노벨문학상 후보 작가란 점에 초점을 맞추고 읽은 건 절대 아니지만, 처음 몇 장 읽었을 때 그만 읽을까 고민될 만큼 읽기 힘들었다. 문체가 꽤 특색이 있는 편인데 철학적 멋짐을 의식한 듯 처음부터 쉴 틈 없이 이어지니 별로였던 것이다. 대안이 있었다면 다른 책으로 눈길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기차 안에서 계속 붙들고 있다보니 나름 궁금증이 일어서 계속 읽어나갔다. 솔직히 가출 소년 다무라 카프카는 관심 밖이었고 지능에 장애가 있지만 고양이와 대활 나눌 수 있는 노인 나카타의 파트만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연관성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어떤 접점이 있어 병렬식으로 진행되는지 작가의 의중이 궁금해 하는 수 없이 끝까지 읽기로 했다.

  읽히기는 쉽게 읽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언한 것처럼 확실히 난해한 내용이었다. 난해함에도 머릴 싸매는 한이 있어도 나름의 답을 내고 싶은 유형이 있고 답이 어떻든 어찌 되든 딱히 상관 없는 유형도 있는데 이 작품의 난해함은 후자에 더 가깝다. 혹시나 싶어서 말하지만 욕은 아니다. 물론 입장을 확실하게 말하라고 하면 불만스럽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럼에도 분명 매력이 있는 난해함이란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아버지가 뱉은 저주 어린 운명 때문에 가출로써 답을 내고 싶은 카프카, 기구하게 살아가다가 기묘한 모험의 길을 떠나게 된 나카타, 그리고 둘이 각자의 여정 속에서 만난 사람들... 각각의 캐릭터들이 품은 상징을 다 깊게 생각했다간 꽤나 골치 아플 것이다. 이게 할 말인가 싶지만, 딱히 메타포를 의식하지 않아도 작가의 골 때리고 밑도 끝도 없는 상상 덕분에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고 또 여운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작품 수준에 비해 어째 성의가 부족한 글이 되고 있는 것 같은데... 명색이 카프카의 고국 체코에서 상까지 받은 작품이라지만 그런 것치곤 크게 감흥이 일진 않았다. 나카타의 파트는 찡한 구석이라도 있지 카프카의 이야기는 그런 부분도 전무해서 가독성이 떨어졌다. 15살의 나이답게 중2병 느낌도 좀 있었고, 그 느낌을 제법 잘 포장하느라 작가가 애쓴 티가 보이지만 의미도 계속 부여되면 지겨운 법이라 흥미가 금방 바닥이 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을 읽었는데 기대엔 못 미쳤지만 다른 작품은 또 어떤지는 기대된다. <상실의 시대>나, <1Q84>나... <해변의 카프카>만으로 이 작가한테 딱히 큰 감정이 생기진 않았으니 나머지 작품들로 읽고 판단해야겠다. 언제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건 진짜 내 이름이 아니에요. 다무라는 진짜지만.

하지만 자네가 스스로 정한 거잖아?

오히려 그게 중요한 거야. - 상 308p




결국 이 세계에서는 높고 튼튼한 울타리를 만드는 인간이 유효하게 살아남게 되는 거야. 그것을 부정하면 넌 황야로 추방당하게 돼. - 하 169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4






 2월 초에 마츠야마로 5박 6일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 내가 마츠야마에 간다니까 열 명 중 여덟은 마츠야마가 어딘 줄 모르고 나머지 둘은 마츠야마를 <도련님>의 그곳으로 알고 있더라. 소설 속에서도 변방의 시골로 묘사되는데 요즘이라고 인지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만고만한 성시로 묘사된 소설 속에서완 달리 지금의 마츠야마는 나름 규모가 있는 도시였지만.

 난 여행 중에 들고 갈 책은 가급적 그 여행지와 상관이 있는 것을 골라간다. 가령 그 지방 출신 작가의 책이라든가, 아니면 그 지방을 배경으로 한 책이라든가. 이번 여행 중엔 <도련님>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상권을 들고 갔다. 후자는 잘못된 정보로 들고 갔다. 마츠야마가 아니라 다카마츠... 물론 전자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츠야마는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거의 필사적으로 관광 상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천이든 전차든 기념품이든 뭐든. 이런 걸 보면 참 감탄스럽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도련님>은 이미 고등학생 시절에 한번 읽은 책이다. 그 당시엔 고전을 읽은 것에만 만족했었지 그 이상의 재미는 못 느꼈다. 그때 읽은 책은 현암사에서 펴낸 나쓰메 소세키 전집의 번역이 아닌 청소년 대상의 번역이라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8년이 지나 다시 읽어서 그랬나, 폼으로 고전은 아닌 듯 이번엔 꽤 재밌게 읽혔다. 세상 물정 모른 채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사람을 비꼬듯 부르는 말 '도련님'의 이야기가 지금에 와서도 전하는 바는 막 출간된 그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참고로 이 책은 1906년에 나온 책이다.

 실제로 나쓰메 소세키가 마츠야마의 중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했을 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내용이라는 <도련님>은 짧지만 굵고 해학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장난끼 있고 앞뒤 안 가리는 성격의 소유자인 '나'가 마츠야마의 중학교에 부임하면서 겪는 내용인데 그 작은 동네에도, 고작 학교라는 작은 세상 속에서도 파벌이 있고 알력이 있는 등 통찰 있는 묘사가 돋보였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그렇게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말만 번지르르한 빨간 셔츠 같은 인간은 벼르고 있다가 똑같이 말로 압사시켜야 진정한 의미의 승리라 할 수 있는데 생각에 비해 말솜씨는 부족한 '나'와 '산미치광이'가 빨간 셔츠를 응징하는 수단은 결국 주먹이다. 그나마 유학 생활을 하는 등 제법 외국 물 좀 먹은 나쓰메 소세키가 썼기 때문인지 당시 - 일제 - 에 쓴 작품치곤 전근대적인 시각은 희미해 주먹을 최선의 수단이라기 보단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수단으로 묘사해 읽을 때는 거부감이 안 들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웃기고 통쾌한 한편으로 묘하게 씁쓸하다. 교활한 인간은 한 번 손봐주는 것만으로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 건 어리석은 걸 넘어 무책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빨간 셔츠는 계속 그 중학교에 남아 마돈나 같은 다른 여자에게 집적거리며 살 것이 아닌가.

 올곧음과 고지식함의 묘한 기로에 선 주인공의 성품엔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기요만큼은 아니더라도 반하게 될 텐데 나 역시 그랬다. 약간 독선적인 경향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봤을 때 정정당당한 유형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장난을 치면 벌도 달게 받고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이해득실 따지지 않고 딱 잘라 거절하고, 이런 인간은 요즘 세상에서 '도련님'이라 불리지도 못한다. 차라리 '도련님'이라고 불리면 귀여운 거지.


 지금껏 글을 쓰면서 '고전의 의의'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해 왔는데 그 의견에 딱 맞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현대와 동떨어지지 않은 내용이라 충분히 논할 가치가 있으며 사전 지식 없이도 즐겁게 읽히는, 8년 전에 처음 읽을 때는 왜 그렇지 않았나 싶을 만큼 재밌게 읽었다. 나쓰메 소세키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에서 나쓰메 소세키 그림이 그려진 천 엔을 본 기억이 나는데 문득 지폐에 그려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란 별칭도 그럴 만한 것 같고. 내친 김에 현암사에서 펴낸 전집을 차례대로 읽어야겠다. 다음이 <풀베개>였나? 그것도 기대된다.

한 것은 한 것이고, 안 한 것은 분명히 안 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장난을 쳐도 뒤가 켕기는 게 없다. 거짓말을 하고 벌을 피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난 같은 건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과 벌은 붙어 다니기 마련이다. 벌이 있기에 장난도 기분 좋게 칠 수 있다. 장난만 치고 벌은 받기 싫다는 근성이 대체 어느 나라에 유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돈을 빌려놓고 갚기 싫다고 하는 건 모두 이런 녀석들이 졸업해서 할 짓임에 분명하다. - 56p




지금의 세상은 정직하면 손해 보는 곳이고, 솔직하면 비난받는 곳이고, 관대하면 무시당하는 곳이고, 순응하면 빼앗기는 곳이다. 도련님은 세상에서 손해 보고, 비난받고, 무시당하고, 빼앗기면서도 관대하다. 이는 전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마음이다. 인간을 윤리나 도덕, 예의 안에서 믿지 않기 때문이다. - 18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나가는 녹색 바람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4






 이 세상에는 과작 성향의 작가들이 몇 있다. 작가적 신념,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하고 써내느라 작품 수가 적은 경우가 이상적이지만 좀처럼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혹은 그저 귀찮아서 과작이게 된 경우도 있다. 이 작가 구라치 준이 한 '냉장고가 빌 때까지 작품을 쓴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아주 전형적인 후자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는 두 번째로 출간되는 구라치 준의 작품이다. 첫 번째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은 단순하지만 획기적인 트릭이 있어 가히 역대급의 재미가 폭발했던 기억이 난다. 이 정도면 과작일 만하다고 전율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이번 작품 <지나가는 녹색 바람>도 어떠한 의심도 없이 기대하며 읽게 됐다.


 작가의 유일했던 국내 출간작을 읽고서 쓴 포스팅을 다시 찾아보니 '작가의 냉장고를 털어서라도 빨리 다음 작품을 집필하게 만들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번엔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이 작품은 네코마루 선배라는 작가가 주로 등장시키는 탐정이 등장하는 장편소설로 500쪽이 넘는다. 이렇게 외적인 부분만 보면 참 기대가 됐는데 내용은 아주 그렇지 못했다.

 일단 이 작품에서도 획기적인 트릭이 등장한다. 이런 종류의 트릭은 많이 보긴 했지만 제법 참신하게 풀어냈다. 어떻게 보면 참 작은 장난이라 할 법도 한데 그 작은 틈새 사이로 미스터리와 연쇄 살인이 비집고 들어왔으니 세상 일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독자인 우리는 물론이고 작중 등장인물들, 특히 피해자들은 정말이지 꼼짝도 없이 희생당했으니 실로 비극이라 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종류의 트릭인데 어딘가 쓰임새가 싱거웠다. 이런 종류의 트릭은 주제의식이나 교훈과 접목시키면 극도의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는데 그 수준에 달하진 않았다. 감성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퍽 있지만 뜬금없고 약간 과한 측면이 있었다. 이 트릭을 잘못됐다고 부정하는 것은 이 작품의 전부를 부정하는 것과 같으니 약간 주저되나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필요했던 트릭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은 절대 아니고 차선이라 할 수 있겠다.

 탐정역을 맡은 네코마루 선배란 캐릭터도 애매했다. 무신경하니 막말을 일삼고 독특한 걸 넘어 도덕 관념도 부족해 보이지만 사건을 날카롭고 신속하게 해결한다. 아쉽게도 사건에 너무 늦게 개입해 비극을 미연에 방지 못했지만... 그런데 이런 탐정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진 않다. 다른 작품에서의 활약은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 보인 모습인 그저 조금 별난 정도에 불과하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너무 기인도 아니고 아주 냉소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가 형사처럼 사려가 깊어 보이지도 않으니 이 작품에서의 모습만으론 평가가 애매하기 그지없다.


 간단하지만 허를 찌르는 트릭 때문에 재독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소 감성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작품치곤 크게 인상에 남는 작품은 아니었다. 단순히 추리소설적인 측면으로만 보면 분량에 비해 사건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우연이 개입해 은근히 실망스럽고 그나마 작가가 공들였을 사에코의 시점은 막상 분량이 적어 알게 모르게 아쉬웠다. 작품은 지루한데 사에코의 감정선은 흥미진진한 구석이 있어 적재적소에 읽는 맛이 살아나는 효과가 있었다. 적은 분량은 작가가 노린 부분일 수 있지만 차라리 이 부분을 더욱 살렸으면 더 재밌지 않을까 싶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너무 적어 속단하긴 이른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이 작품은 그저 그랬지만 작가의 행보를 보니 굴직한 작품도 많이 남은 것 같다. 작가의 말마따나 냉장고가 너무 텅텅 비었나 보다. 아무튼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된다면 이 작품을 골랐던 것처럼 일단은 큰 고민 않고 집어들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5






 나는 일본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나머지 관련 소식을 틈틈이 찾아보곤 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혹은 흥미로운 제목이나 설정을 가진 작품을 보면 우리나라엔 언제 출간할까 궁금해 하는데 이 작품이 그런 작품들 중 하나였다. 전쟁터의 요리사들. 취사병 주인공이 전쟁터에서 마주하는 몇몇 미스터리를 푼다는 일상 추리소설 계열의 작품으로 설정만으로 적잖은 관심이 갔다. 비록 3개월간 지원을 갔을 뿐이지만 나 역시 군대에서 취사병에 적을 두긴 했으니까.

 내 원래 주특기는 포병이었는데 포병 부대에 가는 병사는 주로 두 가지 분류로 나뉜다. 전투 포병, 비전투 포병으로. 줄여서 전포, 비전포인데 나는 전포였고 이제 나머지 계원, 운전병, 사격지휘병, 관측병, 측지병, 통신병, 그리고 취사병이 이에 속했다. 한 대대에 전포와 비전포가 대략 반씩 있었는데 주특기 별로 나눈다면 똑같은 주특기를 가진 전포의 수가 월등히 많아서 그들의 입지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포가 다른 주특기를 가진 병사를 어떻게 업신여기는 일이 많았는데 도대체 그를 눈앞에서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그중 취사병의 입지가 가장 약했다고 할 수 있다. 쉬는 날 없이 조리에 시달리는 취사병이 어떻게 보면 가장 저평가 받는 보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처럼 '엄마 놀이'라고 비아냥거린 사람은 못 봤지만 '꿀을 빤다'는 욕은 진짜 많이 들어봤다. 물론 전투에 나서는 병사가 가장 중요한 병사라 할 수 있지만 군대 조직에 있어 아주 불필요한 병사가 있을 수 없다. 그런 만큼 취사병을 두고 한 당시의 뒷담들은 아주 생각이 짧은, 그야말로 혐오에 가까운 편견이라는 말 외엔 붙일 말이 없다. 막말로 안 먹고 어떻게 전투를 하겠다는 건데?

 앞서 말했듯 비록 3개월이지만 취사병 생활을 해봤기에 이 작품의 소재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작 내 기대완 달리 작중 주인공들은 취사병임에도 전투도 겸하는 병사들이었지만 나름 주특기의 고충과 애환은 잘 살리기도 했다. 때는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2차 세계대전에 화려하게 참전한 이후로 갖가지 사람들이 모인 주인공네 부대가 전쟁터에서 어떤 활약을 펼치고 곤경에 빠지는지 매우 사실적이고 중립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가 일본 사람인 만큼 전쟁에 대한 요상한 묘사가 있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정말이지 기우에 불과했다. 왜 하필 일본 저자가 미군의 얘길 썼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작중에 드러난 작가의 전쟁관에서 엿볼 수 있다. 하긴 일본에 극우만 있을 리도 만무하고...


 비교적 긴 분량의 단편이 5편 수록된 연작으로 전쟁의 이모저모를 잘 묘사했다. 전쟁을 다룬 문학 작품을 많이 찾아보진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수준급의 고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조국을 위해 용기 있게 나서 적을 죽이는 내용에 국한하지 않고 취사병이란 소잴 살려 군대라는 조직의 내부적인 이야기도 풀어나가 자연스레 인간에 대한 고찰도 담아내고 있다. 상황에 따라 달리 정의되긴 하지만 군대도 결국 하나의 직장이란 점, 그렇기에 군대에 적을 뒀다고 모두가 똑같은 목표 아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을 통찰력 있게 바라봤다. 전선에 뛰어들고 싶지 않아 거래를 하고 싶어 하는 병사, 전투에 관여를 하지 않는 상사의 부정어린 행동을 목격했을 때의 병사들의 반응 등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다. 군대를 다녀온 나 같은 독자는 물론 군대에 가지 않거나 갈 일이 없는 독자도 꽤 감탄하며 읽을 내용이지 않나 싶다.

 엄밀히 말해 군대 및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엄청나게 재밌게 읽진 않았지만 소재를 소홀히 다루지 않은 작가의 솜씨와 열정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추리소설의 틀 안에서 보면 약간 애매한 부분도 있지만 이런 애매한 요소는 재독할 경우 또 어떻게 읽힐는지 모른다. 아무튼 제법 긴 기다림 끝에 출간된 작품이 생각보다 괜찮게 읽혀서 참 다행이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은 물론이고 내가 출간되길 기다리는 어떤 작품들도 빨리 번역본으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팀, ‘악의는 없었다‘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중요한 건 굴절된 감정과 공포심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거다. 극복하느냐 아니냐는 너 자신이 결정해야 해. 언제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 - 21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 상 소시민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2







 전작인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을 읽었을 때 후속작을 언제 읽게 될까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요네자와 호노부가 지금만큼 이름값이 높던 때가 아니라서 그의 다른 작품이 출간되기를 기대한다는 게 다소 막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제대로 빛을 받아 꾸준하게 신작이 출간되는 요즘이 정말 좋다. 책의 외관이 너무 예쁜 나머지 가격대가 좀 있지만 그만큼 소장 가치가 있으니 너그럽게 지갑을 열 수 있다.

 '소시민' 시리즈의 후속작은 분권으로 나왔다. 개인적으로 왜 굳이 분권했는진 모르겠다. 사토 다카코의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은 학년별로 3권씩 나눴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그런 구분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일본에서도 분권으로 출간했던데 뭔가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감이 안 잡힌다. 최근 한 권이 800쪽에 달하는 <가족사냥>을 2권에 걸쳐 읽었더니 그냥 넘기기 힘든 부분이다. 뭐, 어쩌자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총 500쪽 이상이라는 시리즈 역대급 분량은 시리즈 사상 역대급 스케일과 재미를 안겨줬다. 본성을 숨기고 소시민이 되겠다는 모토 아래서 많은 사건을 겪고 끝내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 고바토와 오사나이. 이 둘의 개별적인 시점 속에서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해 이야기가 좀 더 방대해진다. 그 와중에 연쇄적인 방화 사건이 발생하는데 작품 전개 내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다. 두 주인공이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소시민의 일상이 흘러가는 와중에 그림자를 드리운 사건, 과연 둘은 바람대로 소시민의 길을 관철할 수 있을까? 내가 봤을 때는 영 글러먹은 것 같다.

 '소시민'이라는 단어로 명명되는 평범한 인생살이가 주인공네들의 목표라니, 수수께끼와 그 풀이를 목적으로 삼는 추리소설의 갈래와는 사뭇 맞지 않는 감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본래 수수께끼를 좋아하고 혹은 수수께끼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이들인 이상 종래에는 자신들의 본성에 충실해진다. 그런 어쩔 수 없는 이치를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서 깨닫는 게 개인적으로 좀 안쓰러웠다.


 작품을 읽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이 고백했다고, 상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가령 '소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상대와 사귀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것. 그렇게 이상하게 시작된 연애는 좋게 끝날 리가 없다. 고바토와 오사나이도 마찬가지. 둘의 마인드는 보기에 따라서 상당히 도발적이고 발칙하기까지 한데 관종인 우리노와 대조돼 짠함과 알싸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요네자와 호노부가 그리는 고등학생다웠다고 할 수 있으려나?

중간 중간 나오는 소소한 수수께끼와 추리도 재밌었는데 막판에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그려지는 전개도 재밌었다. 재능이 있지만 그걸 살리기보다 죽이려고 하는 자가 활약할수록 재능은 없는데 명성을 얻고 싶은 자의 모습이 처량해진다. 이 전개는 그토록 읽고 싶었건만 막상 보게 되니 짠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한마디로 냉소가 극에 달한 작품이지 않나 싶다.


 전작들을 읽은 게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나름대로 흐름을 쫓아가기엔 문제는 없었다. 그나저나 후속작인 겨울철 뭐시기 사건은 언제 나올까? 작가의 고전부 시리즈가 일본에서 신작이 발표됨과 동시에 번역 출간되고 있으니 출간만 되면 머지않아 읽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다만 걱정인 건 정말 다음 작품이 마지막일까 하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땐 고전부 시리즈 못지않은 매력이 있는데... 이 시리즈도 재조명된다면 좋겠다. 마치 <빙과>의 애니메이션화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