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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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월 초에 마츠야마로 5박 6일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 내가 마츠야마에 간다니까 열 명 중 여덟은 마츠야마가 어딘 줄 모르고 나머지 둘은 마츠야마를 <도련님>의 그곳으로 알고 있더라. 소설 속에서도 변방의 시골로 묘사되는데 요즘이라고 인지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만고만한 성시로 묘사된 소설 속에서완 달리 지금의 마츠야마는 나름 규모가 있는 도시였지만.

 난 여행 중에 들고 갈 책은 가급적 그 여행지와 상관이 있는 것을 골라간다. 가령 그 지방 출신 작가의 책이라든가, 아니면 그 지방을 배경으로 한 책이라든가. 이번 여행 중엔 <도련님>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상권을 들고 갔다. 후자는 잘못된 정보로 들고 갔다. 마츠야마가 아니라 다카마츠... 물론 전자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츠야마는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거의 필사적으로 관광 상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천이든 전차든 기념품이든 뭐든. 이런 걸 보면 참 감탄스럽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도련님>은 이미 고등학생 시절에 한번 읽은 책이다. 그 당시엔 고전을 읽은 것에만 만족했었지 그 이상의 재미는 못 느꼈다. 그때 읽은 책은 현암사에서 펴낸 나쓰메 소세키 전집의 번역이 아닌 청소년 대상의 번역이라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8년이 지나 다시 읽어서 그랬나, 폼으로 고전은 아닌 듯 이번엔 꽤 재밌게 읽혔다. 세상 물정 모른 채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사람을 비꼬듯 부르는 말 '도련님'의 이야기가 지금에 와서도 전하는 바는 막 출간된 그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참고로 이 책은 1906년에 나온 책이다.

 실제로 나쓰메 소세키가 마츠야마의 중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했을 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내용이라는 <도련님>은 짧지만 굵고 해학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장난끼 있고 앞뒤 안 가리는 성격의 소유자인 '나'가 마츠야마의 중학교에 부임하면서 겪는 내용인데 그 작은 동네에도, 고작 학교라는 작은 세상 속에서도 파벌이 있고 알력이 있는 등 통찰 있는 묘사가 돋보였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그렇게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말만 번지르르한 빨간 셔츠 같은 인간은 벼르고 있다가 똑같이 말로 압사시켜야 진정한 의미의 승리라 할 수 있는데 생각에 비해 말솜씨는 부족한 '나'와 '산미치광이'가 빨간 셔츠를 응징하는 수단은 결국 주먹이다. 그나마 유학 생활을 하는 등 제법 외국 물 좀 먹은 나쓰메 소세키가 썼기 때문인지 당시 - 일제 - 에 쓴 작품치곤 전근대적인 시각은 희미해 주먹을 최선의 수단이라기 보단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수단으로 묘사해 읽을 때는 거부감이 안 들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웃기고 통쾌한 한편으로 묘하게 씁쓸하다. 교활한 인간은 한 번 손봐주는 것만으로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 건 어리석은 걸 넘어 무책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빨간 셔츠는 계속 그 중학교에 남아 마돈나 같은 다른 여자에게 집적거리며 살 것이 아닌가.

 올곧음과 고지식함의 묘한 기로에 선 주인공의 성품엔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기요만큼은 아니더라도 반하게 될 텐데 나 역시 그랬다. 약간 독선적인 경향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봤을 때 정정당당한 유형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장난을 치면 벌도 달게 받고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이해득실 따지지 않고 딱 잘라 거절하고, 이런 인간은 요즘 세상에서 '도련님'이라 불리지도 못한다. 차라리 '도련님'이라고 불리면 귀여운 거지.


 지금껏 글을 쓰면서 '고전의 의의'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해 왔는데 그 의견에 딱 맞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현대와 동떨어지지 않은 내용이라 충분히 논할 가치가 있으며 사전 지식 없이도 즐겁게 읽히는, 8년 전에 처음 읽을 때는 왜 그렇지 않았나 싶을 만큼 재밌게 읽었다. 나쓰메 소세키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에서 나쓰메 소세키 그림이 그려진 천 엔을 본 기억이 나는데 문득 지폐에 그려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란 별칭도 그럴 만한 것 같고. 내친 김에 현암사에서 펴낸 전집을 차례대로 읽어야겠다. 다음이 <풀베개>였나? 그것도 기대된다.

한 것은 한 것이고, 안 한 것은 분명히 안 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장난을 쳐도 뒤가 켕기는 게 없다. 거짓말을 하고 벌을 피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난 같은 건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과 벌은 붙어 다니기 마련이다. 벌이 있기에 장난도 기분 좋게 칠 수 있다. 장난만 치고 벌은 받기 싫다는 근성이 대체 어느 나라에 유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돈을 빌려놓고 갚기 싫다고 하는 건 모두 이런 녀석들이 졸업해서 할 짓임에 분명하다. - 56p




지금의 세상은 정직하면 손해 보는 곳이고, 솔직하면 비난받는 곳이고, 관대하면 무시당하는 곳이고, 순응하면 빼앗기는 곳이다. 도련님은 세상에서 손해 보고, 비난받고, 무시당하고, 빼앗기면서도 관대하다. 이는 전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마음이다. 인간을 윤리나 도덕, 예의 안에서 믿지 않기 때문이다. - 1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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