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네간의 경야(經夜)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범우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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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영문으로도 어렵기로 소문난 책 답게 김종건 씨가 번역한 이 책도 한 눈에 들어오는 책은 아닙니다 . 사실 책이 어렵다 쉽다 말하는 것은 옳은 표현은 아닙니다.  제대로 말하려면  구체적인 예를 들며 이 부분은 문맥상 부적합하고,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지, 무턱대고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독자입니다.  온갖 신화들과, 온갖 틀과 또 그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호하기 짝이 없는 삶의 경계를 언어의 틀로 간신히 담아내려는 작가의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작가는 뜻이 정확한 언어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최선인 언어를 찾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내 손은 너무 차가워 만지지마"라고 말했을 때 "아니야, 내게 내 손은 너무 뜨거워"라고 말하며 가슴안에 손을 품는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 품어서 따뜻하게 해주어야 할만큼  '차갑다'는 말이 '따뜻하다'는 말로 더 잘 전달되고 있습니다. 피네간의 경야에서 조이스의 언어는 이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그는 '사람의 아들'들의 안개같은 삶을 담아내려는 언어를 찾아나섰고, 드디어 말년에 사람을 담을 수 있는 안개 같은 언어를 찾아 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이스에게 피네간의 경야의 언어는 필연이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온갖 구절이 상징성으로 윤택하게 빛나는 '더블린 사람들'보다 피네간의 경야는 풍부하긴 하지만 어려운 책입니다. 고전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책들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네 삶이 어렵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피네간의 경야는 단순히 해독하기만을 원하는 책이 아니라, 그 해독함이 살아가는 것임을, 그리하여 한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난해함이 매력인 책 입니다. 이 책이 쉽다고 말하는 것은 완벽한 가정, 또는 완벽한 인간상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쉽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이 쉽다고 말하는 것은 삶이 쉽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이 말이 과하게 적용되지만 다른 고전도 이 궤도를 벗어나는 어려움은 아닙니다.

  저는 피네간의 경야를 손 가는 대로 평생을 두고 읽을 생각입니다. 백과사전과 기독교사전과 유럽신화사전과 영국역사책을 옆에 두고 읽으면 훨씬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비록 두 가지만 옆에 두고 읽지만요. 그리고 셰익스피어에 능통하신 분이라면 해독이 더욱 간편하실 것입니다. (문체가 비슷해서가 아니라 셰익스피어 책의 내용을 품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한 페이지를 읽고나서의 그 지적인 상쾌함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조이스의 문장으로 억지로 말을 만들어 봅니다.  "아롬다운 지지(遲知) 시간(詩間 . 時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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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 지음 / 홍성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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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골에 가면 예전에 밤길에 산을 가다가 중간에 사람을 마주치면, 많이 지나온 사람이 앞으로 갈 길이 많이 남은 사람에게 “금방 사람 지나갔는데, 빨리 쫓아가보시오”라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무서운 밤길 사는 사람에 대한 위로입니다. 거짓말이긴 하지만, 어둠속에 두려움을 갖고 갈 때 그 한마디 거짓말이 앞으로 어둠속을 갈 후행자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곧이듣는 사람이나 위로를 받지. 곧이듣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이게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57쪽 한국문학의 사생활, 김화영 엮음, 문학동네 폄>


  우리는 따뜻해야 한다. 차가움은 가끔씩 느끼는 섬뜩함만으로 족하다. 그 따뜻함이 모순 속에 던져진 따뜻함이라도 따뜻하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본다. 지금의 나는 모순에 치를 떨며 나를 고쳐가고 있지만 행복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못할까?

  역사상 가장 따뜻한 책이라는 성경도 받아들여야 따뜻한 것이다. 곳곳에 눈에 띄는 모순과 신비주의적 색체를 지적하다가는 자신이 행복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을 뿐 더 이상의 느낌을 지니기는 어렵다. 어느 중세 수도승의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라는 평범한 모순 어구를 쉽게 무시 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좀 더 넓게 생각해보면 읽기의 즐거움도 그러하다. 소설은 확실히 허구지만 그 허구가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생생히 다가와 내가 믿게 될 때 비로소 가슴에서 사는 글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소설이 허구임을 모를 리는 없다. 그러나 허구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한 모순의 마찰 속에서 홀연히 일어나는 불꽃이 읽기의 따뜻함의 시발점일 것이다.  

  “영혼”은 미심쩍은 개념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 범인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작가의 말을 빌리면 “영혼의 눈”이 떠가는 한 권의 과정이다. 영혼의 눈이 떠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과 견뎌내야 할 것들이 이 소설의 큰 기둥을 이룬다. 이청준의 소설을 몇 권 읽지 않았지만 -사실 감상문을 쓸 때마다 작가의 단편 몇 개나 장편 한 작품쯤을 읽고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몹시 부끄럽다- 이청준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갖췄다가 잃는 과정을 겪는다. 교과서에 실리기도 한 「눈길」의 주인공도 그랬고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상욱도 가진 것을 내려놓고서야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에서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자꾸만 낮은 곳으로 간다. 승승장구하던 “나”는 시력과 청력을 잃으면서 동냥하는 사람들이나 지하철에서 구두닦이 하는 소년들에게 마음을 열어놓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곳에서 생활을 한다. “나”는 그런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비로소 영혼의 개안을 이룬다.


 나는 비로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 소명의 빛을 찾은 것 같았다. 그 소명으로 새로운 소명의 빛을 얻은 것 같았다.

 내가 여태까지 그 빛을 만나지 못한 것은 위만 쳐다보고 온 내 허물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어느 높은 곳에서 나를 비춰 오기만을 기다려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빛은 어느 높은 곳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빛은 오히려 낮은 곳에서, 그것도 스스로 베풀고 비추려하는 곳에서, 그런 노력으로 자기 안에서 찾아지는 것이었다. 낮은 곳에서 스스로 찾아낸 소명의 불빛, 그것이야말로 참된 영혼의 눈뜸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주님은 일찍이 내게서 육신의 눈을 멀게 하고 그곳으로 나를 인도해 오신 것이었다. 낮은 곳을 보게 하고, 그곳을 찾아가게 하기 위해 그 낮은 곳에 필요한 작은 것만을 남기고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신 것이었다. 육신의 눈을 뜬 사람은 볼 수 없는, 영혼의 눈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육신의 눈을 뜬 사람은 볼 수 없는, 영혼의 눈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 그것을 보게 하기위하여, 그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하여 내 육신의 눈을 멀게 하고 나를 그곳으로 인도해 오신 것이었다. 그 서울역이 도대체 어떤 곳이던가. 그곳은 나의 흐름이 멈춘 곳이었다. 흐름이 멈춘 곳보다 낮은 곳은 있을 수 없었다. 그곳은 나의 흐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이었다.

 그 어둠속의 흐름마저도 나의 우연한 뜻이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오묘하기 그지 없는 주님의 뜻이었다. 나는 이제 그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비로소 나의 눈멀음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었다.

      

<171쪽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 열림원 폄>



  단순히 “눈멀음”이 눈 먼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미 육체라는 한계에 단단히 묶여 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언제인가 병으로 혹은 노화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한계가 가능성으로 발 돋음 하는 자리에 “소명의 빛”은 비추인다. 하지만 그 빛을 비추는 사람이 누구인가? 누군가의 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연출가 혹은 절대자가 있지 않고서는 소명의 빛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내가 “낮은 곳에서” 느꼈던 낯설음은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근대 철학자들은 하늘의 그를 죽이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다.

  이러한 생각까지 해보았다. 별 난고 없이 생을 살아온 내가 신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건 과분한 일일까 하는 생각. 삶에 대한 내 경험은 그야말로 미천하다. 어떤 사람도 소설 분량의 사건을 지니고 산다는 명제가 내게서 오류가 입증된다. 끝에 가보지 않은 내가 신을 소원하는 인간은 비겁한 것이라고 따지는 일은 무의미 할 수도 있다. 마라톤을 해보지 않은 내가 마라톤을 뛰는 사람에게 왜 힘든 척 하냐고 힐난한다. 

  그러나 한 번 더 뛰어 넘어본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신의 의미는 신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공통의 믿음이 아닐까? 아주 차가운 사람이라도 아무것도 믿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만큼은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실존에 단단히 미친 이방인도 죽기 진전에 삶에 대한 황홀한 고백을 늘어놓지 않았던가? 이 소설에서 믿음은 그 정도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만약 사회구성체를 이끌어 가는 이데올로기란 믿음을 떠올린다면 이 소설은 충성을 바라는 저급한 소설이다. 오히려 믿음으로써 개인들이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하느님이다. 살고 있는 건 하나님으로써 충분히 입증되니 맘껏 믿으며 살아보라는 이야기다. 묶여있는 자유로움을 맘껏 누려보는 것이다. 물론 영혼의 눈이 똑똑히 지켜보는 가운데서.


  정말이지 나에게 여태껏 읽었던 소설 중 가장 따뜻한 소설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소설을 꼽을 것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내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는 벅차다. 사람이 사람의 일을 포기하는 것만큼 던적스러운 일도 없다. 그러나 가끔씩 그러고 싶을 때에 이 소설은 아름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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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수필 - 새로 가려 뽑은 현대 한국의 명산문
방민호 엮음 / 향연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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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마치 그릇 전시회 같다. 장자는 그릇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우리가 물을 직접 먹어볼 수 없다면 차선의 방법은 그릇을 보고 물의 용도를 짐작하는 방법일 것이다. 글 또한 그렇다. 적어도 아직까지 독자는 작가의 감정을 그대로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읽고 문체를 파악하며 작가의 감정에 전이되는 방법을 택한다. 그것이 글읽기라면 이 책 모던 수필은 그릇 전시회라는 수사가 썩 잘 어울린다. 다양한 작가들이 만든 제각기 아름다운 문체들의 그릇이 적당한 자리에 들어서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편집자 방민호 교수가 노력한 탓이다. 자연히 이 책을 감상하는 요령은 그릇에 담겨 있는 그들의 생각을 잘 짚어보는 것일 테다.
 방민호 교수는 이렇게 짚는다. "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 깊이가 있다. 김기림의 산문은 예지적이다. 정지용의 산문은 단소한 가운데 독한 기운이 있고 이태준의 산문은 부드럽고 엷은 거죽 속에 강잉한 신조가 담겨 있다. 채만식의 산문은 포즈로 가장한 속에 진실을 숨겨두고 딴청을 부리는 묘미가 있다." 나는 여기에 내가 짚었던 것을 늘이고 덧붙이겠다.
 우선 백석부터다. 백석은 전개의 묘를 아는 작가이다. 가히 의식의 흐름 소설의 대가인 제임스 조이스에 필적한다고 말하면 과찬일까. 그의 산문들에서 사물은 확장되고 옮아가며 결국에는 다시 의식의 맹점을 가리킨다. 마구잡이로 흘러 써서는 이런 글이 나올 수 없다. 흘리되 결코 방탕하지 않게, 마치 정교한 추상화가 이럴 것이다. 그의 시 '여승'-"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 냄새가 났다."로 시작하는-도 훌륭한 예가 될 것이나 이 책에 있는 '나와 지렁이'나 '편지'에서 나는 새삼 그것을 느꼈다. '흙'과 '하늘'과 '이과책'을 가로지르며 '지렁이는 커서 구렁이가'되는 전설을 와닿게 하고 '지렁이의 밥과 집'을 부러워한다. 지렁이가 구렁이가 되게 하는 밥과 집이란 결국 찬란한 상상의 세계일 것이다. 상상의 세계를 밥으로 생명체는 더욱 훌륭한 생명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 굳이 생명체가 아니라 그것은 글일 수도 있고 상징이 아니라 그냥 지렁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것의 아름다움'이다. 그의 글 자체에 면면히 흐르는 기조가 또한 그것이다.
 정지용은 자연에 대한 믿음을 써내려 가는 작가이다. '써내려 가는'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그는 결코 건너 띄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자연의 신뢰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파악하고 나서야 더 큰 부분인 자연을 사랑할 수 있다. 나무 하나 하나에 애정을 갖고 가꾸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숲을 조성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의 산문들은 그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산문은 '별똥이 떨어진 곳'이다. 끝에 있는 시구를 옮겨본다. "별똥 떨어진 곳/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별똥'은 '먹으면 오래 산다는' 영원불멸의 자연의 상징이라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자연과 합일하고 싶은데 세월은 자꾸만 흐르고 어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별똥별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꼽은 이 두 작가가 다른 작가들과 비교하여 우열을 평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나는 심미안이 아니라서 내가 가려 뽑은 그릇은 순전히 개인적 취향일 뿐이다. 어떤 작가의 어떤 글이 문학사적으로 더 훌륭한 글인지는 내 권한 밖이다.
 그러나 어떠한 산문 정신이 잡히는 것만은 사실이라 하겠다. 내가 모던 수필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되뇌던 질문은 '산문정신이란 무엇인가?'이다 앞의 두 소박한 견해는 그릇 각각의 이야기일 뿐이고 수작 산문의 평가 기준인 동시에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산문의 전체적 특성, 산문 전체를 관통하는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하는 막연한 것, 그것이 산문정신의 개략일 것인데 방민호 교수는 서문에서 "산문은 모름지기 겨울에 살에 와닿는 눈송이처럼 구체적이고 감각적이고 새롭고 독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산문정신이란 산문이 사람의 훌륭한 축도 역할을 겸허히 수용할 때 나타나는 정신이 아닐까 한다. 훌륭한 산문은 삶의 통일장 이론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산문정신이란 삶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날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한 편의 짤막한 글 속에 그  사람의 신념과 사고 방식이 드러나야 한다. 꾸준히 추구한 이상이 없는 사람이나 자기 성찰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불가능하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독자의 감동을 이끌어내야 한다. 독자의 삶에 녹아나 독자의 삶을 정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감동을 위해서 정밀한 작문 기술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정의 방향이란 계몽된 세계를 일컫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제까지 이렇게 살았다. 바른 것은 이 길이다."가 아니라 "나는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지? 바른 길을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질문은 언제나 열려진 언어이고 작가를 비롯하여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는 세계의 진리를 닫힌 언어에 밀어 넣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던수필은 대개 내가 찾아낸 산문정신에 부합하는 책이었다.-이 책에서 찾아낸 정신으로 이 책을 재평가하는 게 우스꽝스러운 일 일수 있겠으나. 그러나 독자로서 아쉬운 점도 꼽지 않을 수 없다. 방민호 교수는 독자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일반 독자가 한 편의 글에서 작가의 세세한 신념이나 사고를 이끌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광범위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비평문형식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나 이 책을 닫힌 책으로 만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글을 쓸 때의 시대적 상황이나 작가가 처한 상황 등을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했으면 한다. 책 뒤에 작가들의 연혁이 제시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의미하다. 즉 그릇 밑에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전시회 감상문은 마치겠다. 원래 감상문이 그렇다지만 감정의 넝마에서 한껏 너울거리다가 끝나버린 느낌이다. 그만큼 모던수필은 황홀한 책이다. 단숨에 읽어버릴 그런 책은 아니지만 두고선 삶이 고될 때 한잔씩 마시는 술처럼 그렇게 읽기에는 좋은 책이다. 어떤 인문학자가 책은 인류경험의 집적체라고 하였는데 이 책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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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복수 - 시스티나 천장화의 비밀 반덴베르크 역사스페셜 4
필리프 반덴베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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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나만의 비밀이 한 가지 씩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비밀이 많은 편이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비밀이 생명력을 가질 때는 두사람 이상의 입속에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요. 아니 어쩌면 비밀의 진정한 역할은 비밀이 아닐 때일지도 모릅니다. 비밀이 아닐 때에서야 우리는 그 비밀의 심각성과 아울러 중요성을 깨닫게 되니까요. 하지만 비밀이 금기가 될 때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교권으로 대변되는 교황청의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을 교황청으로부터 이른바 이교도로 단정된 세력에게서 은밀히 전수 받은 미켈란젤로의 비밀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비밀로 간직하여야 하는 추기경의 어쩔 수 없이 간직하는 비밀 이 세 가지의 금기의 축은 독특한 알레고리를 형성합니다.

미켈란젤로는 교화청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주문을 받지만 자신은 조각가지 화가가 아니라며 거절합니다. 하지만 교황청은 포기하지 않고 미켈란제로는 작업을 착수하지요. 잇따르는 새로운 교황들에게 착취당하며 미켈란젤로는 순응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애당초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예술적 고심과 종교적 확신을 쇠상자에 봉인해 두었을 뿐입니다. 애제자 콘디비에게 맡겨둔 쇠상자가 역사의 격랑을 타면서 문제는 복잡해집니다. 시스티나 천장그림에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예레미야가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가 되지요. 늙은 예언자의 멜랑콜리는 천국과 지옥의 풍경을 직관하는 절대자의 능력을 빗댑니다. 한편, 바티칸의 비밀서고에서 하나씩 들추어지는 문서들은 교황들의 목숨쯤이야 가볍게 날려버리는 치명적인 위력을 드러냅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교황청 내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 전개의 순서까지도 기독교의 주요 축제일인 주현절에서 부활절까지의 시간 순서로 줄거리 전개의 상징성과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지요. 한마디로 이 책의 주인공 옐리녝 추기경이 서있는 곳은 교황까지 있는 교권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교권이 가장 철저하게 지켜지는-시간 까지도-완벽한 교권 하 입니다. 이 점은 이 소설을 풀어 나가는데 중요한 단서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천장에 교묘히 숨겨둔 글자들은 교황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이 곳에서의 작업에 대한 소리없는 반발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가장 근본적 교리에 대한 부정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근원적인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요. 하지만 더욱더 우울한 것은 모든 것을 다 밝혀 내고도 침묵하는 옐린녝 추기경의 태도입니다.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는 비밀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세상 사람이 다 알 정도로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이지만 아무도 그에 대항하여 말을 꺼내 놓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잘못 된지 알면서도 그 이데올로기 속에서의 이탈은 두렵습니다. 이탈은 곧 새로운 곳에서의 시작을 뜻하니까요. 내가 그 동안 이 사회에서 빚어 놓았던 결실들은 다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일 결코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 일탈 할 용기가 없는 개인은 어쩔 수 없이 합리화된 이데올로기에 순응 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모든 것이 조용할 것만 같은 교황청 내부. 그 속에서 풀어놓는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이데올로기의 허망함이 있었습니다. 비밀이 다 밝혀 진 것 같을 때에 여러분은 더 큰 비밀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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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8
박영규 지음 / 들녘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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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에 일기를 씁니다. 하루하루 있었던 일을 들쳐 내어 써내려 가지요. 피곤에 지쳐 돌아 와서는 잠을 털어 내고 하루를 써내려 간다는 것이 그리 쉽지 만은 않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피곤에 지쳐 가면서 완성한 하루를 어떤 식으로든 남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비극적인 일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에는 저에게서도 잊혀질 것이고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 할 수 없는 하루가 될 테니까요. '역사는 다시 쓸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의 역사관이 역사의 이미지를 형성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개인이 역사의 부분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그 숭고한 작업을 실행 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저도 그 숭고한 작업을 담당 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지니며 일기를 씁니다 어떻게 압니까? 제 일기장도 조너선 스위프트의 〈스텔라에게 쓴 일기 The Journal to Stella〉같은 위대한 작품이 될는지...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은 그런 점에서는 조금 아까운 책입니다. 사관들의 개인적인 기록인 〈각사등록 各司謄錄〉등의 사초는 상당부분 삭제되었으니까요. 25대 472년간 기록을 한 권으로 기록하기 위해서 객관적인 자료만을 수집할 필요는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일반인들이 그 방대한 기록을 읽어 내고 또 거기서 감동을 느낄 만큼 숙련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오사화를 아십니까? 김일손 등 많은 사림들이 죽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기까지한 연산군 시대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입니다.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京山 : 星州)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숙박했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전한 말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 조의제문 입니다. 서초패왕 항우(項羽)를 세조에, 의제(義帝)를 노산군(魯山君)에 비유해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김종직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이를 사초(史草)에 기록하여 스승을 칭찬했습니다. 1498년(연산군 4)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노사신(盧思愼) 등이 왕에게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하는 내용이라고 알려 일어난 사화이지요.

이처럼 사관들은 목숨을 걸고 붓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성종실록 편찬 때의 사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건자체의 이루어짐은 어떠한 의미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건이 어떤 식으로 그 시대에 영향을 주는지 이고 그 후 세월이 지난 후는 그 영향이 어떻게 기록되어 이해될지의 문제입니다. 물 한잔을 마루에 엎었다고 하여도 아무도 모르게 그 물을 걸레로 닦아 버렸다면 그후 몇 일까지는 당사자는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몇 십 년이 지난 뒤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건이 되어버리고 사건자체가 묵살됩니다.

최근 일본의 역사왜곡 사건이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이 아직 까지도 그러한 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이유도 확립된 역사사관이 없어서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이 사건까지 일본은 왜곡할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걱정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사관들이 결단력 있는 역사관으로 작성한 조선왕조실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관들의 피와 땀의 집합체입니다. 솔직히 수 백권의 전집을 출판한다면 누가 읽을 까요.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었기에 저는 읽었습니다. 이 책은 대중들에게 우리의 역사관을 희미하게나마 확립해 주었습니다. 몇몇 고고학자 만의 역사가 아닌 그것이 우리의 역사였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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