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 지음 / 홍성사 / 2000년 11월
평점 :
품절
시골에 가면 예전에 밤길에 산을 가다가 중간에 사람을 마주치면, 많이 지나온 사람이 앞으로 갈 길이 많이 남은 사람에게 “금방 사람 지나갔는데, 빨리 쫓아가보시오”라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무서운 밤길 사는 사람에 대한 위로입니다. 거짓말이긴 하지만, 어둠속에 두려움을 갖고 갈 때 그 한마디 거짓말이 앞으로 어둠속을 갈 후행자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곧이듣는 사람이나 위로를 받지. 곧이듣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이게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57쪽 한국문학의 사생활, 김화영 엮음, 문학동네 폄>
우리는 따뜻해야 한다. 차가움은 가끔씩 느끼는 섬뜩함만으로 족하다. 그 따뜻함이 모순 속에 던져진 따뜻함이라도 따뜻하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본다. 지금의 나는 모순에 치를 떨며 나를 고쳐가고 있지만 행복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못할까?
역사상 가장 따뜻한 책이라는 성경도 받아들여야 따뜻한 것이다. 곳곳에 눈에 띄는 모순과 신비주의적 색체를 지적하다가는 자신이 행복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을 뿐 더 이상의 느낌을 지니기는 어렵다. 어느 중세 수도승의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라는 평범한 모순 어구를 쉽게 무시 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좀 더 넓게 생각해보면 읽기의 즐거움도 그러하다. 소설은 확실히 허구지만 그 허구가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생생히 다가와 내가 믿게 될 때 비로소 가슴에서 사는 글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소설이 허구임을 모를 리는 없다. 그러나 허구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한 모순의 마찰 속에서 홀연히 일어나는 불꽃이 읽기의 따뜻함의 시발점일 것이다.
“영혼”은 미심쩍은 개념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 범인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작가의 말을 빌리면 “영혼의 눈”이 떠가는 한 권의 과정이다. 영혼의 눈이 떠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과 견뎌내야 할 것들이 이 소설의 큰 기둥을 이룬다. 이청준의 소설을 몇 권 읽지 않았지만 -사실 감상문을 쓸 때마다 작가의 단편 몇 개나 장편 한 작품쯤을 읽고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몹시 부끄럽다- 이청준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갖췄다가 잃는 과정을 겪는다. 교과서에 실리기도 한 「눈길」의 주인공도 그랬고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상욱도 가진 것을 내려놓고서야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에서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자꾸만 낮은 곳으로 간다. 승승장구하던 “나”는 시력과 청력을 잃으면서 동냥하는 사람들이나 지하철에서 구두닦이 하는 소년들에게 마음을 열어놓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곳에서 생활을 한다. “나”는 그런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비로소 영혼의 개안을 이룬다.
나는 비로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 소명의 빛을 찾은 것 같았다. 그 소명으로 새로운 소명의 빛을 얻은 것 같았다.
내가 여태까지 그 빛을 만나지 못한 것은 위만 쳐다보고 온 내 허물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어느 높은 곳에서 나를 비춰 오기만을 기다려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빛은 어느 높은 곳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빛은 오히려 낮은 곳에서, 그것도 스스로 베풀고 비추려하는 곳에서, 그런 노력으로 자기 안에서 찾아지는 것이었다. 낮은 곳에서 스스로 찾아낸 소명의 불빛, 그것이야말로 참된 영혼의 눈뜸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주님은 일찍이 내게서 육신의 눈을 멀게 하고 그곳으로 나를 인도해 오신 것이었다. 낮은 곳을 보게 하고, 그곳을 찾아가게 하기 위해 그 낮은 곳에 필요한 작은 것만을 남기고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신 것이었다. 육신의 눈을 뜬 사람은 볼 수 없는, 영혼의 눈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육신의 눈을 뜬 사람은 볼 수 없는, 영혼의 눈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 그것을 보게 하기위하여, 그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하여 내 육신의 눈을 멀게 하고 나를 그곳으로 인도해 오신 것이었다. 그 서울역이 도대체 어떤 곳이던가. 그곳은 나의 흐름이 멈춘 곳이었다. 흐름이 멈춘 곳보다 낮은 곳은 있을 수 없었다. 그곳은 나의 흐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이었다.
그 어둠속의 흐름마저도 나의 우연한 뜻이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오묘하기 그지 없는 주님의 뜻이었다. 나는 이제 그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비로소 나의 눈멀음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었다.
<171쪽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 열림원 폄>
단순히 “눈멀음”이 눈 먼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미 육체라는 한계에 단단히 묶여 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언제인가 병으로 혹은 노화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한계가 가능성으로 발 돋음 하는 자리에 “소명의 빛”은 비추인다. 하지만 그 빛을 비추는 사람이 누구인가? 누군가의 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연출가 혹은 절대자가 있지 않고서는 소명의 빛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내가 “낮은 곳에서” 느꼈던 낯설음은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근대 철학자들은 하늘의 그를 죽이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다.
이러한 생각까지 해보았다. 별 난고 없이 생을 살아온 내가 신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건 과분한 일일까 하는 생각. 삶에 대한 내 경험은 그야말로 미천하다. 어떤 사람도 소설 분량의 사건을 지니고 산다는 명제가 내게서 오류가 입증된다. 끝에 가보지 않은 내가 신을 소원하는 인간은 비겁한 것이라고 따지는 일은 무의미 할 수도 있다. 마라톤을 해보지 않은 내가 마라톤을 뛰는 사람에게 왜 힘든 척 하냐고 힐난한다.
그러나 한 번 더 뛰어 넘어본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신의 의미는 신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공통의 믿음이 아닐까? 아주 차가운 사람이라도 아무것도 믿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만큼은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실존에 단단히 미친 이방인도 죽기 진전에 삶에 대한 황홀한 고백을 늘어놓지 않았던가? 이 소설에서 믿음은 그 정도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만약 사회구성체를 이끌어 가는 이데올로기란 믿음을 떠올린다면 이 소설은 충성을 바라는 저급한 소설이다. 오히려 믿음으로써 개인들이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하느님이다. 살고 있는 건 하나님으로써 충분히 입증되니 맘껏 믿으며 살아보라는 이야기다. 묶여있는 자유로움을 맘껏 누려보는 것이다. 물론 영혼의 눈이 똑똑히 지켜보는 가운데서.
정말이지 나에게 여태껏 읽었던 소설 중 가장 따뜻한 소설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소설을 꼽을 것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내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는 벅차다. 사람이 사람의 일을 포기하는 것만큼 던적스러운 일도 없다. 그러나 가끔씩 그러고 싶을 때에 이 소설은 아름다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