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낯선 것은 만드는 것이다.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있다. 조이스가 우리에게 제시했던 낯설기 짝이 없었던 글들이 바로 그가 만들어냈던 것들이라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그가 낯섦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의 노정을 그리고 있다. 흔히들 놓치게 되는 이 소설의 표사(表辭)에서 부터도 조이스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숨기지 않고 있다. 조이스는 신과 같은 예술가의 변신 후일담을 소개하려는 듯이, 제우스의 변신 신화에서 따온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소설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미지의 기술에 마음을 쓰고자 한다.” ‘미지의 기술’로 채워진 낯선 한 작품, 그리고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낯선 한 명의 존재자는 어떻게 탄생되는 것일까? 그리고 바로 나오는 1장의 문두부터, 디덜러스가 해방되고자 했던, 그러나 디덜러스의 몸과 같이 디덜러스를 끝내 묶고 있었던 한 무의식이 탄생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디덜러스 조차도 어렴풋하게만 기억하는 요람기의 이 서사는 그에 적합하게 단순한 어휘들, 의성어들, 단순한 노래들, 유아기 언어들(그 파얀 잔니꼬 피고)로 쓰여 있다. 이런 문체론적 실험들은 후에 조이스의 특기로 우리가 알아보게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세 장도 안 되는 분량으로 짧게 쓰여 있는데, 소설에서 예민한 독자를 기다리면서 내내 변주되는 주요 주제들이 결집해 있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나는 몇몇 장면에서만 그 변주를 확인할 것인데, 사실 더 많다. 우선 이 소설은 서두는 이렇다. “옛날에, 아주 살기 좋던 시절, 음매 하고 우는 암소 한 마리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단다. 길을 겅어오던 이 음매 암소는 턱쿠 아기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사내아이를 만났단다…….” ‘암소’의 이미지도 반복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예술가로서 디덜러스의 삶에 불을 댕긴 여러 사람들이, 모두 여자라는 것이 우선 그러하다. 디덜러스의 첫 벗째 타락이라 할, 화류계 여성을 찾아가는 장면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는 미궁처럼 널려 있는 좁고 더러운 거리로 헤매며 들어갔다.”(156) 알다시피 미궁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 소를 만나러 들어갔던 미로이다. 그리고 디덜러스가 예술가로서의 자기 삶을 확신하게 되는 그 유명한 해변에서의 에피파니 장면에서 그의 친구들이 불러대는 디덜러스의 별명도 “부스 스테파노포로스”(259)로 ‘희생을 위해 화환을 쓴 황소’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화환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호명은 자기 안의 암소를 불러내리라는 징조였다. 그러나 이것은 디덜러스가 모성에 대한 애착을 상징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디덜러스에게 어머니는 아버지 만큼이나 벗어나야할 대상으로 묘사된다. 또 “찰스 아저씨와 단티가 손뼉을 쳤다.”라는 문장이 있다. 찰스와 단티는 소설에서 잠시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찰스는 디덜러스에게, 아일랜드 민족에 대한 투사적인 애정 의식을 심어준 사람이고, 안티는 아줌마라는 뜻인데, 안티의 아이들 식 발음인 단티는 디덜러스에게 반대로 아일랜드에 대한 도피의식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손뼉소리가 디덜러스에게 각인되고 있는 장면이다. 이 애정의식과 도피의식의 결합은 조이스에게 아일랜드에 대한 애증어린 비판으로서 현현된다. 이러한 양가적인 비판 의식은 이 소설에서는 당연하고, 아일랜드, 더블린 사람들의 ‘마비’의식을 묘사하고자 하였다는 ‘더블린 사람들’ 뿐만 아니라, 후의 조이스의 모든 작품에서 드러난다. 이 이중성은 다음 문장에서 한 번 더 강조된다. “단티의 옷장 속에는 솔이 두 개 있었는데, 밤색 벨벳으로 등을 싼 솔은 마이클 대비트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고 녹색 벨벳으로 등을 싼 솔은 찰스 스튜어트 파넬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파넬과 대비트는 처음에는 절친한 정치적 동지였다가 후에 대립하게 된 아일랜드 주요 정치인이다. 잠시, 이 시점에서 이 소설 어느 곳이든 아일랜드 현실이 배면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려, 아일랜드의 정치사를 잠시 들여다보자면, 정치가이기보다는 사회운동가였던 대비트는 헨리 조지에 감동받아 지금도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대지세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게 되는데 이 시점에서 부터 파넬은 대비트와 대립하게 된다. 대비트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계기는, 대지세 부과를 핵심으로하는 조지주의라고도 불리는 조세이념의 창안자 조지 헨리를 실제로 만나서는 "진보와 빈곤"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현실에서의 실천의지까지 밝히자, 조지 헨리가 "아일랜드의 토지문제"라는 "진보와 빈곤"의 편저작이라고 할만한 책 발행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고, 이 책 발행 계기로 아일랜드는 대지세 논쟁에 휩싸이게 되는데, 여기에 파넬이 반대 입장에 선 것이다. 정치의 혁신과 안정이라는 이중의 목적을 읽을 수 있는 일화이다. 여기서 하지 않겠지만, 디덜러스, 즉 조이스의 현실인식이 누구에 더 가까웠는지를 중심으로도 이 소설은 해석 가능하다. 다음. “잠자리는 오줌을 싸면 처음에는 따뜻하지만 이내 싸늘해진다.” 요람기 디덜러스가 오줌을 싼 것이다. 1 장에서 특별히 부각되는 감각은 이에 맞춰서 촉각이 된다. 그렇다고 강박적으로 촉각만이 묘사된 것은 아니고, 다른 장보다 주요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디덜러스가 성장해가면서 부각되는 감각들은 촉각에서, 후각으로(2장 첫 문장, “찰스 아저씨가 검은색 노끈처럼 꼰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기 때문에 견디지 못한 조카는 아저씨에게 정원 끝에 있는 작은 별채에서 아침 담배를 피우도록 권했다” 95쪽), 그리고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된 청각으로 변한다.(3장은 아예 주교의 설교로 가득차 있으므로 청각이 중시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때 어머니는 그에게 ‘금지’에 대한 강고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오, 스티븐은 잘못을 빌 거에요.”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냉정한 단티가 말한다. “오, 만약에 빌지 않으면, 독수리들이 와서 눈알을 빼버릴걸” 그렇다 디덜러스에게 금지를 설정하여서, 욕망의 기반을 제시했던 ‘독수리들’의 세계는 학생 스티브에게 가장 달콤한 세계였던 동시에, 예술가 디덜러스에게 가장 잔인한 세계였다. 그러나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린 디덜러스는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이 성공적인 실패의 일화를 간단히 말해보자면, 디덜러스는 자전거 탄 문법1반 학생과 부딪쳐서 안경이 깨졌는데, 그것 때문에 수업을 받지 못하자, 선생인 신부에게 처벌받게 된다. 안경이 깨진 것, 그것도 문법이라는 규제의 표상과 맞부딪쳐서 파괴된 것은, 디덜러스의 세계가 상투적인 문장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리라는 한 징조이다. 그러나 이 징조는 아직 씨앗이다. 결국 그는 부당함을 호소하러 층계참까지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거기서 교장인 콘미 신부에게 그는 성공적으로 청원한다. ‘독수리’의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디덜러스가 성장한다는 것은 이러한 자기 무의식을 극복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굳이 이 앞부분에만은 자세한 해석을 삼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 존재자가 낯선 것을 만드는 사람으로 거듭나려면, 자기 무의식까지 깊숙이 침투해있던 친연적인 혈연의 세계와 협소한 국가의 세계와 종교적인 금지의 세계를 벗어나야했다. 이는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결말 부분의 이 문장으로 압축된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말해 주마.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 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379) 이것은 예술가만의 선언은 아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단지 한 욕망에 지쳐서 새로운 욕망을 갈구하는 식의 삶에 빠져있지 않으려면, 현재의 제 삶을 과감히 소진시켜야 한다. 누구도 그것이 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디덜러스는 만드는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이 거의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와 동생들의 삶을 버리고, 거의 방랑에 가까운 유학의 길을 택한다. 혈연의 세계가 부가하는 책임에 그는 일단 침묵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 안에 그는 가족을 책임지는 충실한 고위급신부가 될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언제나 새로운 삶의 실마리를 인류에게 던지는 ‘희생을 위해 화환을 쓴 황소’는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국가를 떠난다. 일제시기 지식인이 낯섦을 만드는 자로 거듭나려, 조국을 떠나서, 직접적인 민족운동과는 소원히 지내면서 예술적 수양만을 해나갔다고 생각해보라. 거기다 민족주의에 대한 조이스의 냉소적인 시선과 유사한 시각을 드러내는 작가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우리가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 떠올려보자. 결코 좋은 이야기만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조이스는 예술을 선택했고, 국가를 떠났다. 그는 예술의 영역 안에 유배(流配) 당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했고, 유배는 어디까지나 형벌이다. 물론 반드시 덧붙여야 할 것들이 있다. 조이스는 민족주의를 비난했을 뿐이지, 민족을 매도하지는 않는다. 매사를 조롱하는 조이스이지만, 불우한 아일랜드인에 대한 묘사에서만은 작가의 특징이라고 해도 될만큼 연민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반드시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를 부끄럽게하는 어떤 작가와는 다르다. 또 디덜러스가 벗어나야 했던 교회의 세계는 단지 한 종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 교회는 우리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체계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에게라면 이것은 자본주의이다. 여담이지만, 실제로 청교도만 아니더라도,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 윤리는 흡사한 점이 매우 많다. 어쨌든 우리가 우리 체계에 가지는 열정은 디덜러스가 교회의 강건함에 한 때 탐닉하여서 그것을 익히고 헌신하려고까지 하였던 그것보다 덜하지 않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계에 때로는 생계를 의탁하고, 그 편리를 누리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디덜러스와 다른 점은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조이스의 삶을 보건대, 조이스는 디덜러스와 더불어 거기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도 머니머니 해도 우리를 가장 망설이게 하는 것은 디덜러스의 절친 크랜린의 마지막 말이다. "친구 이상이 되어줄 사람, 가장 귀하고 가장 진실된 친구 이상이 되어줄 사람을 한 사람도 갖지 못하는데도?" 이것은 자신을 떠나려는 친구에게 우회적으로 자신이 지우를 어떻게 여기는지 고백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디덜러스는 단호하다. "너는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니?" 우리가 비정할 정도로 충분히 결연하고 자기창조에 민감하다면, 가족, 국가, 체계 모든 것과 단절을 성공적으로 선언했다면, 우리에게도 생긴다, 자기 존재의 근원적인 갈망을 탐지할 수 있는 자격이. 예컨대 우리는 이미 디덜러스에 앞서서 소크라테스가, 철학적인 영감을 ‘데몬démon’에게서 얻었다는 전승을 알고 있다. 예수 훨씬 이전에 태어난 소크라테스에게 데몬은 당연히 기독교적 의미의 악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기독교가 악령의 의미를 채색하기 전 지금은 잊힌 이 말의 원래 의의는 수호신, 정령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약간의 사악함과 관련한 어감이 없지는 않았다. 이제 이 전승을 다시 해석해보자. 소크라테스는 자기 생명력의 어떠한 부름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바람직한 철인, 유사 이래 모든 철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는 이 직관이 너무나 강력해서, 정령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자기 생명에서 진정한 새로움을 끌어낼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지금 그가 그렇게 폭발시킨 진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영혼을 씻기고 있는가! 단, 그토록 광활한 새로움은 지하와 천상을 향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졌으리라. 조이스의 소크라테스인 디덜러스에게처럼. “그는 자기를 살살 피해 다니면서 흥분시키고 있는 그 가냘프고 실신하는 듯한 자태를 꼭 붙잡으려고 두 팔을 펼쳤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목구멍 속에 억눌러 두었던 부르짖음이 입으로 발산되었다. 그 부르짖음은 수난자들로 가득한 지옥에서 들려 오는 절망의 비명처럼 그의 입에서 터져나와 분노에 찬 애원의 울음이 되어 사라졌다. 그것을 또한 사악한 자기 방기의 부르짖음이요, 어떤 변소의 질척한 벽 위에서 읽었던 음란한 낙서의 메아리에 불과한 부르짖음이기도 했다.”(156) “그는 나른한 졸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의 눈까풀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는데, 마치 대지와 대지를 지켜보는 천체의 광대한 회전 운동과 어떤 새 세상의 신기한 빛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의 영혼은 새 세상으로 정신 없이 빠져들고 있었는데, 그 바닷속처럼 환상적이고 희미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는 구름 같은 형상과 존재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하나의 세계인가, 한 가닥 번뜩이는 빛인가, 아니면 한 송이 꽃인가?”(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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