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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ㅣ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8
박영규 지음 / 들녘 / 199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저는 요즘에 일기를 씁니다. 하루하루 있었던 일을 들쳐 내어 써내려 가지요. 피곤에 지쳐 돌아 와서는 잠을 털어 내고 하루를 써내려 간다는 것이 그리 쉽지 만은 않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피곤에 지쳐 가면서 완성한 하루를 어떤 식으로든 남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비극적인 일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에는 저에게서도 잊혀질 것이고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 할 수 없는 하루가 될 테니까요. '역사는 다시 쓸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의 역사관이 역사의 이미지를 형성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개인이 역사의 부분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그 숭고한 작업을 실행 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저도 그 숭고한 작업을 담당 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지니며 일기를 씁니다 어떻게 압니까? 제 일기장도 조너선 스위프트의 〈스텔라에게 쓴 일기 The Journal to Stella〉같은 위대한 작품이 될는지...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은 그런 점에서는 조금 아까운 책입니다. 사관들의 개인적인 기록인 〈각사등록 各司謄錄〉등의 사초는 상당부분 삭제되었으니까요. 25대 472년간 기록을 한 권으로 기록하기 위해서 객관적인 자료만을 수집할 필요는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일반인들이 그 방대한 기록을 읽어 내고 또 거기서 감동을 느낄 만큼 숙련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오사화를 아십니까? 김일손 등 많은 사림들이 죽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기까지한 연산군 시대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입니다.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京山 : 星州)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숙박했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전한 말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 조의제문 입니다. 서초패왕 항우(項羽)를 세조에, 의제(義帝)를 노산군(魯山君)에 비유해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김종직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이를 사초(史草)에 기록하여 스승을 칭찬했습니다. 1498년(연산군 4)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노사신(盧思愼) 등이 왕에게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하는 내용이라고 알려 일어난 사화이지요.
이처럼 사관들은 목숨을 걸고 붓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성종실록 편찬 때의 사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건자체의 이루어짐은 어떠한 의미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건이 어떤 식으로 그 시대에 영향을 주는지 이고 그 후 세월이 지난 후는 그 영향이 어떻게 기록되어 이해될지의 문제입니다. 물 한잔을 마루에 엎었다고 하여도 아무도 모르게 그 물을 걸레로 닦아 버렸다면 그후 몇 일까지는 당사자는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몇 십 년이 지난 뒤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건이 되어버리고 사건자체가 묵살됩니다.
최근 일본의 역사왜곡 사건이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이 아직 까지도 그러한 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이유도 확립된 역사사관이 없어서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이 사건까지 일본은 왜곡할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걱정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사관들이 결단력 있는 역사관으로 작성한 조선왕조실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관들의 피와 땀의 집합체입니다. 솔직히 수 백권의 전집을 출판한다면 누가 읽을 까요.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었기에 저는 읽었습니다. 이 책은 대중들에게 우리의 역사관을 희미하게나마 확립해 주었습니다. 몇몇 고고학자 만의 역사가 아닌 그것이 우리의 역사였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