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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평점 :
한국어로 쓰다
-이희재, 번역의 탄생
“이 신발은 뒤꿈치가 까진다.”는 틀리지 않은 문장일까? (78)
저자의 이야기는 이렇다.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람의 관점을 고려해 이 문장을 고치면 가령 “이 신발을 신으면 네 뒤꿈치가 까진다.” 정도가 무난하겠지요. 더 한국어다운 문장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이 신발은 뒤꿈치가 까진다.”로 하면 능동성을 좋아하는 훌륭한 한국어 문장이 됩니다. “이 신발은 뒤꿈치를 까지게 한다.” 보다는 훨씬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문장은 틀린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사소한 것부터 언급하자. 입말로서야 이런 경우가 매우 빈번하지만, 아직도 문어에서 주격 조사 두 개를 나란히 제시하는 것은 한국어에서 어색한 일이다. 최소한 “뒤꿈치가 이 신발은 까진다.”로 써서, 앞의 주격 조사 ‘가’와 뒤의 주격 조사 ‘은’ 사이를 이격시키려는 노력이라도 했어야 한다.
그것을 허용하더라도 이 문장은 사실 이상하다. 이렇게 주격이 두 개가 나란히 왔다는 것은 당연히, 둘 중의 한 주체는 안긴문장의 주체이고, 한 주체는 안은문장의 주체라는 것일 텐데, 이렇게 쓰면 그 관계조차 매우 불분명해진다. 신발이 까진다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므로 ‘신발은’이 안은문장이고, ‘뒤꿈치가 까진다’가 안긴문장일 텐데, ‘신발은’을 닫는 서술어가 없다. 한국어에서 서술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문장의 핵심요소라서 이렇게 되면 독자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정말로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이 문장은 신발이라는 것에 뒤꿈치가 있어서 그 뒤꿈치가 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도로 저 문장을 썼다면 더 없이 옳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이 문장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일부러 혹은 자연스럽게 “이 신발은 뒤꿈치를 까지게 한다.”로 바꾸어야 한다. 꼭 안은문장으로 쓰려면, “이 신발은 뒤꿈치가 까지게 만드는 신발이다.”라고 써야 하는데, 영어에서 이런 식의 문장구조는 필연이지만 한국어에서 “이 신발은 ~신발이다.” 식의 문장구사는 세련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한다. 별다른 부가정보도 없이 동일 단어가 한 문장에 두 번씩이나 등장하는 것은 확실히 한국어에서는 이상하다. “그것의 문제는 ~다는 것이다.” 라고 쓰지, “그것의 문제는 ~문제이다.”라고 쓰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문장성분의 생략이다. 한국어는 문장성분의 생략이 자연스럽고, 이 문장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문장성분의 생략은 반드시 다른 어휘의 형태는 남겨두고서 자신만 생략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략이지 그렇지 않으면 아예 다른 문장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생략이라면, “뒤꿈치가 까진다.”는 이미 완결된 문장이므로, “이 신발은” 쪽이 생략된 것이고, 그 뒤에 어떠한 문장을 자연스럽게 복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문장은 관용구가 아니므로, 도무지 이렇게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아마 대화에서라면 “이 신발은 {너무 딱딱하여서,} 뒤꿈치가 까진다.” 식으로 아예 문장의 지형도를 재편하는 어떤 말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무리 없이 추측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신발은 {너무 부드럽지만,} 뒤꿈치가 까진다.”일지 누가 알겠는가? 상상을 통해 정보를 덧붙여야 하는 것은 생략이 아니다.
한국어의 서술어에 대하여 첨언을 하겠다. 이 문장이 만약 대화라면, 다 생략하고 서술어인 “까진다.”만 말해도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한국어에서 서술어는, 시제‘○다’, 존칭어‘●다’, 동사‘까지다’, 상‘ㄴ’ 등등의 정보를 모두 다 담고 있기 때문이다―사실 더 많이 축출해낼 수도 있지만 생략한다.
한국어의 거의 예외가 없을 정도로 문장에 서술어를 쓰고 또 강조하는 경향 때문에, 안에 담긴 문장이 얼마나 복잡하고 길든 상관없이, 맨 뒤에 꼭 한 개의 서술어를 써야 하고, 이는 한국어에서 안은문장과 안긴문장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바깥의 안은문장이 서술어를 끝으로 안의 안긴문장을 끌어안고 있는 듯한 모양을 취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안긴문장이 길 경우 “후각이 예민한 나는 비누 냄새를 풍기는 그를 좋아했다.” 대신에 “비누 냄새를 풍기는 그를 후각이 예민한 나는 좋아했다.” 식으로 안은문장의 주어를 서술어 앞으로 옮기거나 하는 요령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요령껏 이동시킨 것이지 이것이 본래 문장 정형은 아니다.
생각하기로는, 안긴문장을 닫을 때까지 안은문장의 일부가 문두에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므로, 영어에서 관계대명사 등으로 그렇게 하듯이, 따로이 완결된 문장들이 매달리게 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 같은데도, 신기하게 한국인들은 바깥의 문장이 엄청나가게 길어지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어에서도 정말로 문장을 안고 안기게 만든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신기할 때가 많다. 오히려 문어에서는 이런 것을 위에 들었던 예처럼 피하는 경향이 있다.
두서를 길게 썼는데, 그럼에도 이 책의 여러 고찰들은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내가 판단하기로 합당한 것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특히 한국어에서 주어의 생략이 한국어가 주체성을 강조하여서 그렇다고 보는 것은 곱씹어 볼만하다. 한국어는 어떤 언어보다 역동한다. 한국어 화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장담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꼭 학문양식으로 정립하여 알고 있지 않더라도 누구나 그러한 언어구조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바로 지적하듯이 한국어에서 특히 자유롭게 생략되는 어구는 주어이다. 다른 문장 성분도 생략 가능하지만 주어만큼 활발하게 생략되지는 않는다. 반면, 영어에서 주어가 없는 능동형 문장은 틀린 문장이다. 영어에서도 주어가 꼭 필요하지 않을 때는 목적어를 주어자리로 올린 피동표현을 쓴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능동이든 피동이든 상관없이 주어는 곧잘 생략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인 소설의 모든 문장이 ‘나는’으로 시작하는 것을 한국인은 자연스러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애초에 한국어는 능동형 중심으로 언어체계가 짜여 있다. 영어 단어에는 그 기본형이 '~게 하다'라는 사동형, '~되다'라는 수동형인 경우가 넘쳐나지만, 한국어에서 기본형 부터가 사동형이거나, 수동형인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있는 동사를 수동형으로 만드는 것도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영어를 번역할 때마다 항상 마주치는 문제이다. 질문하다를 의미하는 ask의 수동형은 be asked 인데 문법 상으로만 이야기하면, 이것은 '질문을 당하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해서 내어놓으면 십중팔구 비문이라는 지적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질문을 받는다'라고 옮겨야 한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받다', '받는다'는 결코 수동형 표현이 아니다. 무언가 사연을 암시하러 이 말을 다시 수동으로 바꾸어서 '받게 되었다'로 만들 수는 있지만, 특정한 목적 없이 이렇게 쓴다면 당장에 밑줄이 그어질 것이다. '받아진다'는 말할 것도 없다. 사실상 한국어에서 질문하다에 직접 대응하는, '질문 당하다'의 피동 표현은 없는 것이다. 더 깊게 생각하면 한국인들에게 질문은 주체가 원하면 받거나, 원하지 않으면 받지 않거나 하는 것이지, 누군가 때문에 주체가 받음을 당하게 되거나, 받음을 당하지 않게 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항을 보면서도,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한국어가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언어가 아니라, 상황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이기에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틀린 해석이다. 한국어에서 주어를 쉬이 생략하는 이유는 대화에서 많은 이야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체’의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문화라 개성이 함몰되어서가 절대 아니다!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고, 네가 하는 이야기는 상대가 자기자신의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한국어에서 대화는 ‘나’와 ‘너’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등한 두 주체 ‘나’와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본원과 한국인 특유의 평등의식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한국어에서는 주어를 쓸 때도 관념이 비생물을 잘 쓰지 않고, 생물체만을 그 자리에 넣으려는 경향이 짙다. (홍익인간?) 예컨대 한국어로 "아름다움이 나를 매혹했다."는 '아름다움'이 주어로 극대화하여 묘사한 문장으로, "아름다운 그는 나를 매혹했다."와 달리 특별한 느낌을 불러오지만, 불란서 사람들에게 관념이 주어자리에 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불어"아름다움이 나를 매혹했다."는 특별한 수사적 장치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문장이다. 어린왕자만 읽어보아도 이러한 문장이 정말이지 넘쳐난다. 그렇다고 한국어에서 한쪽 문장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듯이 불란서에서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는 다른 ‘나’, 그들에게는 ‘너’의 이야기를 옮겨 적을 때도, 대명사 정도를 달리 써서 분간할망정, 격을 달리하여 쓰지 않는다.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데, 영어에서는 삼인칭 단수가 주어일 때 동사에 s를 붙이는 식으로 아주 미약하게만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독일어, 라틴어, 특히 불어에서는 인칭에 따라 대명사는 당연히 달리 쓰는 것이고, 동사의 형태 자체를 다르게 써야 한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나’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내가 달리 받아들여야 하는 ‘너’의 이야기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타자는 나에게 닥친 하나의 상황이지만, 한국인에게 타자는 내 밖에 서 있는 다른 주체이다. 이 책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다루는 저서가 아니므로, 이러한 사유를 끌어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유거리이다. 이 이야기는 차차 덧붙여 보자.
이 뿐만이 아니라, ‘~되다’ 식의 표현 보다 ‘~하다’식의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것, 저자의 고찰대로 부사어의 발달 등등은, 한국어가 주체성을 유독 강조하는 언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영어의 폭격을 받는 동안, 우리는 이미 피동형 표현들을 너무나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건축되다’ 보다 ‘건축하다’가 더 자연스럽다는 것을 힘들게 생각해낼 정도가 되었지만, 문장을 고되게라도 바꾸어보면 많은 경우 능동형 표현이 문장을 생생하게 한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처음에 나만해도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에’라고 썼다가 고쳤다, 그밖에도 이 글에서 고쳐야 할 피동표현은 넘쳐난다, 손 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 내 경험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서술어만 바꾸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긴 문장일 경우 문장의 형태 자체를 뒤틀어서 바꾸어야 하므로, 쉽게 도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또 그렇게 하면 앞 뒤 문장을 동시에 다 손보아야하기 때문에, 차라리 그냥 두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최초의 한글세대 작가라고 자부하는, ‘이청준’, ‘김승옥’, ‘이문열’ 같은 대작가만 하더라도, 피동형 표현에 그렇게까지 큰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최인훈’의 경우는 조금 달라서, ‘광장’의 연거푸 해낸 개작들은 유명하다. 자기만의 문체가 있을 것이므로 강제할 사항은 아니지만 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