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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수필 - 새로 가려 뽑은 현대 한국의 명산문
방민호 엮음 / 향연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마치 그릇 전시회 같다. 장자는 그릇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우리가 물을 직접 먹어볼 수 없다면 차선의 방법은 그릇을 보고 물의 용도를 짐작하는 방법일 것이다. 글 또한 그렇다. 적어도 아직까지 독자는 작가의 감정을 그대로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읽고 문체를 파악하며 작가의 감정에 전이되는 방법을 택한다. 그것이 글읽기라면 이 책 모던 수필은 그릇 전시회라는 수사가 썩 잘 어울린다. 다양한 작가들이 만든 제각기 아름다운 문체들의 그릇이 적당한 자리에 들어서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편집자 방민호 교수가 노력한 탓이다. 자연히 이 책을 감상하는 요령은 그릇에 담겨 있는 그들의 생각을 잘 짚어보는 것일 테다.
방민호 교수는 이렇게 짚는다. "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 깊이가 있다. 김기림의 산문은 예지적이다. 정지용의 산문은 단소한 가운데 독한 기운이 있고 이태준의 산문은 부드럽고 엷은 거죽 속에 강잉한 신조가 담겨 있다. 채만식의 산문은 포즈로 가장한 속에 진실을 숨겨두고 딴청을 부리는 묘미가 있다." 나는 여기에 내가 짚었던 것을 늘이고 덧붙이겠다.
우선 백석부터다. 백석은 전개의 묘를 아는 작가이다. 가히 의식의 흐름 소설의 대가인 제임스 조이스에 필적한다고 말하면 과찬일까. 그의 산문들에서 사물은 확장되고 옮아가며 결국에는 다시 의식의 맹점을 가리킨다. 마구잡이로 흘러 써서는 이런 글이 나올 수 없다. 흘리되 결코 방탕하지 않게, 마치 정교한 추상화가 이럴 것이다. 그의 시 '여승'-"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 냄새가 났다."로 시작하는-도 훌륭한 예가 될 것이나 이 책에 있는 '나와 지렁이'나 '편지'에서 나는 새삼 그것을 느꼈다. '흙'과 '하늘'과 '이과책'을 가로지르며 '지렁이는 커서 구렁이가'되는 전설을 와닿게 하고 '지렁이의 밥과 집'을 부러워한다. 지렁이가 구렁이가 되게 하는 밥과 집이란 결국 찬란한 상상의 세계일 것이다. 상상의 세계를 밥으로 생명체는 더욱 훌륭한 생명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 굳이 생명체가 아니라 그것은 글일 수도 있고 상징이 아니라 그냥 지렁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것의 아름다움'이다. 그의 글 자체에 면면히 흐르는 기조가 또한 그것이다.
정지용은 자연에 대한 믿음을 써내려 가는 작가이다. '써내려 가는'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그는 결코 건너 띄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자연의 신뢰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파악하고 나서야 더 큰 부분인 자연을 사랑할 수 있다. 나무 하나 하나에 애정을 갖고 가꾸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숲을 조성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의 산문들은 그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산문은 '별똥이 떨어진 곳'이다. 끝에 있는 시구를 옮겨본다. "별똥 떨어진 곳/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별똥'은 '먹으면 오래 산다는' 영원불멸의 자연의 상징이라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자연과 합일하고 싶은데 세월은 자꾸만 흐르고 어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별똥별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꼽은 이 두 작가가 다른 작가들과 비교하여 우열을 평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나는 심미안이 아니라서 내가 가려 뽑은 그릇은 순전히 개인적 취향일 뿐이다. 어떤 작가의 어떤 글이 문학사적으로 더 훌륭한 글인지는 내 권한 밖이다.
그러나 어떠한 산문 정신이 잡히는 것만은 사실이라 하겠다. 내가 모던 수필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되뇌던 질문은 '산문정신이란 무엇인가?'이다 앞의 두 소박한 견해는 그릇 각각의 이야기일 뿐이고 수작 산문의 평가 기준인 동시에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산문의 전체적 특성, 산문 전체를 관통하는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하는 막연한 것, 그것이 산문정신의 개략일 것인데 방민호 교수는 서문에서 "산문은 모름지기 겨울에 살에 와닿는 눈송이처럼 구체적이고 감각적이고 새롭고 독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산문정신이란 산문이 사람의 훌륭한 축도 역할을 겸허히 수용할 때 나타나는 정신이 아닐까 한다. 훌륭한 산문은 삶의 통일장 이론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산문정신이란 삶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날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한 편의 짤막한 글 속에 그 사람의 신념과 사고 방식이 드러나야 한다. 꾸준히 추구한 이상이 없는 사람이나 자기 성찰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불가능하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독자의 감동을 이끌어내야 한다. 독자의 삶에 녹아나 독자의 삶을 정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감동을 위해서 정밀한 작문 기술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정의 방향이란 계몽된 세계를 일컫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제까지 이렇게 살았다. 바른 것은 이 길이다."가 아니라 "나는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지? 바른 길을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질문은 언제나 열려진 언어이고 작가를 비롯하여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는 세계의 진리를 닫힌 언어에 밀어 넣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던수필은 대개 내가 찾아낸 산문정신에 부합하는 책이었다.-이 책에서 찾아낸 정신으로 이 책을 재평가하는 게 우스꽝스러운 일 일수 있겠으나. 그러나 독자로서 아쉬운 점도 꼽지 않을 수 없다. 방민호 교수는 독자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일반 독자가 한 편의 글에서 작가의 세세한 신념이나 사고를 이끌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광범위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비평문형식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나 이 책을 닫힌 책으로 만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글을 쓸 때의 시대적 상황이나 작가가 처한 상황 등을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했으면 한다. 책 뒤에 작가들의 연혁이 제시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의미하다. 즉 그릇 밑에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전시회 감상문은 마치겠다. 원래 감상문이 그렇다지만 감정의 넝마에서 한껏 너울거리다가 끝나버린 느낌이다. 그만큼 모던수필은 황홀한 책이다. 단숨에 읽어버릴 그런 책은 아니지만 두고선 삶이 고될 때 한잔씩 마시는 술처럼 그렇게 읽기에는 좋은 책이다. 어떤 인문학자가 책은 인류경험의 집적체라고 하였는데 이 책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