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喪人)인 신(臣) 최부(崔溥)는 제주로부터 표류해서 구동(甌東)에 배를 대고, 월남(越南)을 지나 연북(燕北)을 거쳐, 올 6월 14일에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여 삼가 전지(傳旨)를 받들어 이번 길의 일지를 편집하여 바치나이다.” 최부, 『漂海錄 譯註』, 박원호 번역, 25쪽.
최부의 표해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첫문장은 최부의 표해기를 가장 잘 요약한 문장이랄 수 있다. 조금더 세세한 정보를 연구서에서 얻어 보자.
“최부(1454~1504)는 조선성종 시기의 문신이다. 제주에서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로 근무하던 중 성종 19년(1488)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13일간의 표류 끝에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해안에 표착(漂着)하게 되었다. 최부 일행 43명은 온갖 고초를 겪은 다음 조선인임이 밝혀져 항주로 이송되었고, 이어 대운하를 거쳐 북경에 이르렀다가 요동(遼東)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표해록은 최부가 한양에 도착한 직후 성종의 명에 따라 쓴 보고서로서, 표류로부터 중국 여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일종의 중국견문록이다. 당시 조선인이 쉽게 가볼 수 없었던 중국의 강남의 견문에 대한 기술이 특히 조야의 관심을 끌었다.”
박원호, 「崔溥 漂海錄 硏究述評」, 『崔溥 漂海錄 硏究』, 19쪽.
“상인(喪人)”이면서 "신(臣)"인 사람이 있다. 상중에 있는 사람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예를 다 하여야 하지만, 한편 신하로서 “전지를 받들어 이번 길의 일지를 편집”하여야 하는 사람이다. 이 보고서의 작성은 죽을 때까지 최부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기도 하고, 어찌 보면 지금도 읽히고 있으니, 불멸의 지위를 선사하기도 한 수고였다. 이 예언적인 문구대로, 효를 받들어야 하는 ‘상인’으로서의 지위와 충을 받들어야 하는 일지 편집자로서의 지위는 표류가 끝난 뒤에도 육지에서 더 힘든 표류를 겪게 했던 것이다.
상인인데도 지위를 망각하고 이 일지 작성에만 매달렸다는 것에 대한 세간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도덕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꽤 심각한 논쟁거리였다.
“성종22년(1491)에 성종은 탈상한 최부에게 승의랑 사헌부 지평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런데 임명을 받고 한 달이 지나도 사간원에서 성경을 하여 주지 않았다. 서경이란 그러한 직책을 맡는 데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일종의 동의서이다. 성종이 사간원에 그 까닭을 물으니, 정언正言 조형趙珩은 서면으로 이렇게 아뢰었다. [최부가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여 제주에서 나오다가 중국에 표박하여 많은 시와 글을 지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자신이 살아날 길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그가 본국으로 돌아와서 비록 일기를 지어 올리라는 왕명이 있어도, 마땅히 글을 올려 슬픔을 말하고 바로 빈소로 돌아가야 했는데도 여러 날을 서울에서 묵으면서 태연히 일기를 쓰고 거의 애통한 마음 없이 명교에 대하여 부끄러운 일이 있었기에, 이 때문에 서경을 해주지 못하였습니다.] 성종은 사간원의 처사를 꾸짖었다. [나는 최부가 겪었던 어려움과 중국에서 견문한 것을 알고 싶어 일기로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최부는 어쩔 수 없이 나의 명령을 받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사간원에서 어찌 이것을 들고 나오는가?!]”
박원호, 『崔溥 漂海錄 硏究』, 282쪽.
사간원의 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사헌부, 나중에는 홍문관까지도 가세하여 최부를 좌천시키고자 하는데, 다행히 성종은 끝까지 최부를 두둔하면서 차차로 벼슬을 올려준다.―뒤에 밝히겠지만, 사실 이것은 불행이기도 했다.
표해록을 둘러싼 이러한 후일담은, 기록의 나라 조선 당대에 『표해록』 자체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우선 드러내고, 다음으로 성종기의 유래를 찾기 힘들만큼 강해진 사림과 왕권의 갈등의 일단을 드러낸다. 사림이 성종의 처사에 반대한 이유로서 최부의 처신은 표면상의 이유였을 뿐이다. 위 간에서도 미묘하게 드러나고 있다. 내면의 이유는 사림이 개혁적 성향의 이 표해록에 대한 성종의 관심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것일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최부에 대한 성종의 두둔이 의미하는 바는 그러한 비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성종의 의지였다. 그밖에도 많은 정국들이 얽혀있을 테지만, 내 깜냥으로는 여기까지에서 그치겠다.
어쨌든 최부는 승진하려할 때마다 돌아왔던 효를 멀리했다는 비난 속에서도 더 도타워지기만 하는 성종의 신임을 업고서, 고위직이라 할 수 있는 예문관 응교까지 오르게 된다. 처음에 나는 이것이 불행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성종의 최부에 대한 굄은 연산군 때 고스란히 화로 돌아온다. 성종의 권력의지를 대표했던 최부는 무오사화에 더불어 일어났던 갑자사화 때 보복 순위 앞자리에 쓰여서 연산군 10년(1504) 10월 24일 참형斬刑에 처해진다. 최부의 나이 51세 때였다. 그 머리는 다음 날 백관 앞에 효시되었다.
자신의 죽음까지 몰고 온 『표해록』의 이러한 파급력을 최부도 글을 쓸 때부터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가장 첫 단어를 喪人으로 쓴 것 아닐까. 최부는 이 뒤로도 지겹도록 자신이 상인의 도(道)인 효성을 품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여러 가지 일화 중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최부 일행이 해적에게 잡혀서 고초를 겪은 후에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뒤에, 다시 표류를 시작하는데, 이 때 누가 조언하기를 상복을 벗고 관복을 입으면, 관인인 것이 표시가 되니 이런 일을 다시는 겪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최부가 단도직입하여 말하길 자신은 상인이므로 그럴 수 없다고 한 예이다. 그러나 그가 이 표류하는 도중 내내 『표해록』 완성을 염두에 두면서 기록하고, 결국에 이것을 성종에게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충의 마음이 또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표류기에서 최부의 자아는 두 가지 축으로 찢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孝와 忠이다.
孝는 최부에게 자신의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자신을 만들었던 세계 자체에 대한 애정을 뜻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효가 그토록 중시되었던 까닭은 그것이 단지 가족규범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남에 대한 성찰이 효의 근본적인 의미였다.
『논어』를 살펴보자. 도올의 『논어한글역주1』의 번역을 따른다. “맹의자라는 공자 친구의 어린 아들 맹무백”이 [효를 여쭈었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이다.”](위의 책, 491쪽) 공자는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서부터 효는 출발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자각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매우 명쾌하게 설한다. 효, 그러니까 태어난 자기 자신의 돌봄은 부모에게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인간 존재의 공연성을 망각하지 않을 때에만, 허무맹랑한 구호가 아니라, 실천적인 윤리가 될 수 있다는 정언이다. 효는 자기애의 유교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동지들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인류를 사랑한다는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忠은 최부에게 자신의 임금뿐만이 아니라, 지금은 멀어져 있지만 자신의 좌표가 속해있던 세계체계와 더불어 민중에 대한 책임을 뜻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충은 단지 임금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쳬계로서 사유하며 자신과 민중을 진정 높이고자 하는 것이 충의 근본적인 의미였다.
충을 잊지 않은 최부는 끊임없이 조선의 추쇄경추관으로서 몸가짐을 가다듬는다. 충성스러움은 외지에서도 최부에게 조선에서의 자신의 벼슬을 밝히고, 가능한 공무적인 일로서 그곳 사람들을 대하게 한다. 무엇보다 최부가 계속 이방의 풍속을 기록하고, 조선 민중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충언하게 하는 원동력이 충이다. 자신의 보고를 통해 조선의 체계를 움직여서 민중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최부는 믿는듯이 보인다. 효만 받들고, 충은 받들지 않았다면, 『표해록』 이토록 세밀한 보고서 양식을 취할 수 없었다. 이 보고의 가치에 대해서는 위 언급한 도서를 비롯하여 다른 논문들을 참고하라.
문제는 이 두 자아를 억지로 구분하여 계급을 정하려는 데에서 생긴다. 일지를 보고한 최부는 충성만을 자랑하며 일지를 썼다고 공격받았다. 공자는 효가 충의 바탕이라고 사유하였는데, 아마도 조선 사림은 이를 아주 경직되게 해석하여 최부 공격의 빌미로 삼았을 것이다. 『논어』의 위정편에는 이러한 문장이 나온다. [계강자가 여쭈었다. “백성으로 하여금 경건하고 충직하여 스스로 권면하게 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자신을 장엄케 하여 사람을 대하면 백성이 경건하게 되고, 자신이 효성스러움과 자비로움을 실천하면 백성이 충직하게 되고, 능력있는 자들을 등용하고 능력이 부족한 자들을 잘 교화시키면 백성들이 스스로 권면하게 될 것이오.”](위와 같은 책, 562)
우리가 너무나 자주 보아왔고, 불행히도 앞으로도 다시 보게 될 지도자들의 행태, 실제 세계는 들여다보지 않은 채 지시만 잘 내리면 모든 것이 잘 진행되리라 믿는 태도와는 달리, 인본주의자 공자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이 곧 세계를 운영하는 일과 겹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것을 근거로 최부가 효라는 태어남의 돌봄도 행하지 않으면서 충이라는 세계 속 책임을 받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까지 오판하지 말자. 상인의 복장을 끝까지 고수하는 최부 본인 조차도 이러한 오해를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덧붙여진 변명들 아닐까? 나는 실제로 최부가 모든 선택의 사항 속에서 그가 기록한 것처럼 잘못된 효성만 고집하는 강박을 보이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많지는 않지만, 표류 중에 배 안에서 내리는 빗물을 모을 곳이 부족하자 짐 속에 있던 자신의 옷을 주면서 젖게 하여 쓰라고 내주는 식의 일화들도 있다. 우리에게 와닿는 최부의 문장들은 사실 그렇게 절실한 묘사들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효성스러운 것이다. 공자는 틀리게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공자가 말한, 자기자신이 효성스러움을 실천하여 백성의 충실함을 기도한 일이다.
자, 앞서 공자도 말했듯이 “잘” 살아남는 것이 효이다. 태어난 타인과 태어난 자신의 몸을 아울러 돌보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달리 말해 자비롭고 효성스럽게 살아남아야 한다. 사실 자비롭지 않았다면 일행 속에서 최부는 축출 당했을 것이다. 효성스럽지 않았다면 자신과 타인의 극렬하기 짝이 없는 생존에 대한 욕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부는 효성스러움과 자비로움을 실천한 것이다.
그 후에 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이 사회에서 영원히 공명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기록해야 한다. 최부는 『표해록』을 쓰는 것으로 그 치열함을 증명하였다. 최부는 『표해록』으로서 그 사람들과 자신의 모험을 조선사회에 각인하고자 하였다. 최부는 이국의 제도를 관찰할 수 있었던 자신이 겪은 일련의 경험을 고백하면서 조선사회의 폐쇄성을 자연스럽게 고발한다. 그것은 성종과 시대정신, 그리고 천심이 원했던 충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최부의 『표해록』은 현인이 갈파했던 대로의, 효행인 동시에 충직한 행위였다. 이로써 최부를 비난했던 사람의 논리가 틀렸다는 것이 드러났다. 최부는 충을 따르기 위해 효를 저버린 사람이 아니라, 기록하는 것만이 충과 효가 겹쳐져서 제대로 빛나게 되는 유일한 일임을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인(喪人)인 신(臣) 최부(崔溥)라고 썼다. 달리말해, 그는 잘 살았던 사람이었다.
여기, 활인(活人)이고자 하였던 최부의 호령은 조선사회 지배층에게 향하는 일갈 아니었을까? 지금까지도 여전히 울리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