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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한 권으로 독파하는 우리 도시 속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ㅣ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함규진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7월
평점 :
옛 수도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30개 도시에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지안[集安 혹은 輯安, 국내성], 백제의 수도인 공주, 신라의 수도인 경주, 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락(駕洛) 혹은 금관가야[김해], 발해의 수도인 닝안[寧安, 상경용천부], 후백제의 수도인 완산주(完山州) 혹은 전주(全州), 고려의 수도인 개성, 조선의 수도인 서울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가 빠진 것이 의외였고, 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라(加羅) 혹은 대가야[고령]은 포함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옛 수도들 가운데서 아무래도 시선이 가는 곳은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지안]과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닝안]다. 먼저 지안[集安 혹은 輯安]은 졸본(卒本) 혹은 홀본(忽本)에 이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424년이나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지만, 당대(當代)의 사서(史書)가 전해지지 않은 탓에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지안설이 대세이며, 이 책에서도 지안을 두고 국내성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유적 때문이다. 국내성 유적과 환도성 유적 외에 구 외곽에 있는 태왕릉,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광개토대왕릉비 등 오늘날 고구려 문화유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안의 유적들은 수백 년 동안 잊혀 있다가, 20세기 초 뒤덮은 나무와 잡초, 흙 등을 제거하고 무너진 부분을 복원하고 나서야 제 모습을 드러냈다. [p. 636]
<신당서>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려에 더부살이하던 것들로서, 성은 대씨다[渤海 本 粟末靺鞨 附高麗者 姓大氏)]’이라는 기록 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가 아닌 중국사의 일부로 본다. 그들은 발해를 ‘당(唐))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粟末靺鞨)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연호와 고구려라는 정체성을 가졌으며, <신당서>보다 앞선 <구당서>에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渤海靺鞨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는 표현 등을 감안하면 발해는 한국사의 일부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장기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즉 닝안[寧安]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서술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지안에 이어 닝안 부분을 펼쳐봤다.
오늘날 발해 상경 유적지는 보하이진[渤海鎭]에 있다. 그곳에 가면 상경유지(上京遺址) 박물관이 있어서 1930년대 이래 발굴되고 조사된 발해 유적지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진열실 첫머리부터 발해를 설명하는 문구는 “당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계가 왕실을 구성하며 고구려의 후계국가로 존립했다는 진실과 당에 형식적으로 조공했더라도 결코 속국이라 할 수 없는 독립국가 해동성국이었다는 사실, 보다 나아가 발해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깡그리 부정하는 문구인 것이다. 이는 동북공정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기 전부터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곳을 들르는 한국 연구자와 관광객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고, 발해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때마다 ‘발해사는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를 두고 두 나라의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거듭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엉뚱하게도 러시아 쪽에서 두 나라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중재한다며 발해사는 중앙아시아 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와 만주의 삼림 지대는 생활환경, 문화환경이 모두 판이하건만, 그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중앙아시아의 맹주가 러시아라는 의식 때문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만주 땅 전부가 일본의 터전이라 여긴 일본의 만선사관처럼 말이다. [pp. 685~686]
거란, 즉 요(遼)나라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28년 상천용천부의 주민을 이주시켜 상경용천부가 급격히 쇠락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 부흥 운동을 전개하다가 수만 명의 백성과 함께 고려로 망명했다. 이런 가운데 발해 유민들은 점차 응집력을 잃어버렸고, 이들을 대신해서 흑수말갈의 후예, 그 가운데서도 건주 여진이 이곳을 그들의 발상지인 ‘닝구타[寧古塔]’로 기억한다.
옛 수도이지만 우리가 가기 힘든 도시로는 평양과 개성도 있다. 여기서 가장 흥미 있는 도시는 ‘붉은 워싱턴’, 평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훨씬 뛰어넘는 무지막지한 폭격으로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휴전 뒤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평양이 건설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평양과 비슷한 도시를 꼽는다면 어디일까? 서울? 아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자 혈맹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 그렇지 않다. 지구상에서 평양과 가장 비슷한 도시는 미국의 워싱턴이다.
누군가 워싱턴을 “죽은 사람들을 위한 도시”라고 폄하했었다. 과언이 아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오벨리스크를 본뜬 워싱턴 기념탑을 중심으로 넓고 긴 도로가 마름모꼴을 그리고, 마름모의 꼭지점마다 국회의사당, 백악관, 링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이 있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 정치권력의 두 정점이며, 링컨과 제퍼슨 기념관은 건국의 아버지와 현대 미국의 아버지이자 노예 해방자를 모신 신전이다. 고고한 백색으로 빛나는 건물을 넓고 푸른 잔디밭과 포토맥강이 둘러싸고 있다. 전후 평양시를 재건할 때 이 워싱턴을 참고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동강이 도는 도시 공간을 일정하게 구획하고 거대 기념물들을 배치한 점에서 이만큼 짝을 이루는 도시도 없다. [pp. 553~554]
이 곳도 한국사에 등장하는 30개 도시인가요?
이 책에 소개된 ‘30개 도시’ 가운데 가장 의아했던 곳은 ‘제주’와 ‘대마도’다.
우선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이 책, 아니 이 시리즈가 숱한 세월 속에서도 그 자리에 남아 축적된 도시 속 숨은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를 풀어내고자 하는 의도라고 알고 있는데,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밀어 넣은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로 본다고 하더라도 ‘대마도’의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바로 대마도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하느냐의 문제다. 만약 대마도의 역사를 한국사의 일부라고 한다면 독도(獨島)를 다께시마[竹島]라고 하면서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 혹은 극우적인 사고 방식의 산물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저자도 여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지, 11장 대마도 편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마도를 이 책의 일부로 넣는 일은 많이 망설여졌다. 지안이나 단둥 등은 한때는 분명 한국의 영토였지만, 대마도는 ‘확실히’ 영토였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칫 이 책이 ‘낭만적 민족주의’를 부추긴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어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불확실하게’ 영토였던 적은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비롯해 한일관계사, 한국이 일본과 겪은 여러 애증의 역사에서 대마도가 중심에 있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이 장을 썼다. [p. 287]
라고 서술했다. 도대체 언제 대마도가 ‘불확실하게’나마 한국의 영토였을까?
대마도가 신라 땅이었다는 말은 조선 초에도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듯하다. 바로 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 당시, 대마도주에게 보낸 유시문(諭示文)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해 있던 섬이니, 본래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느니라. 다만 그 땅이 매우 좁고 바다 가운데 있어서 오가기 힘든 관계로 백성들이 살지 않았다. 이에 왜노 중에 본국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자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어 소굴을 만들어놓고, 수시로 약탈을 자행하면서 약한 백성의 처자식을 잡아가거나 백성의 살림을 분탕질하기도 하니, 그 흉악한 만행이 여러 해 이어져 오고야 말았다.
종합해서 추정해 보면, 신라가 대마도를 내륙의 고을처럼 세를 거두고 법을 집행하며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방관도 주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군사적 거점 같은 것은 있었을지 모르며, 백성이 살지 않거나 별로 없지만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런 모호한 영토권은 왜의 입장에서도 주장할 만했다. [pp. 296~297]
1246년 백제계 아비루[阿比留] 가문에서 일본계 소[宗] 가문으로 대마도의 지배자가 교체되었고, 일본에서 ‘분에이[文永]의 역(役)’이라 부르는 여몽연합군의 1차 일본원정(1274년)을 계기로 모호한 경계선에 있던 대마도인들은 일본인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아예 일본의 한 지방으로 확정되었다.
왜란 이전까지 일본 지도나 일본 행정 체제에 대마도는 없었다. 그러나 왜란 이후로는 일본의 한 지방으로 인정된다. [p. 308]
이 책에는 조선시대 8도를 대표하는 도시 가운데 독일풍의 도시로 재건된 함경도의 함흥, 평안도의 평양, 황해도의 해주,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경주, 강원도의 강릉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사라는 요소만 고려한다면, 고려 왕건을 지지하면서 후백제 견휜(甄萱)의 배후를 노리는 비수 역할을 했으며 전라도의 또 다른 대표도시였던, 나주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제외되어 아쉬웠다.
독일 태생으로 북한에 유학해 북한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빈 대학의 뤼디거 플랑크 교수는 현대의 함흥을 “독일풍의 도시”라고 말한다. 그렇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잿더미가 된 도시의 전후 복구 과정에 동독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진 이 동양의 고도(古都)는 근대 서구의 도시처럼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도시로 재탄생했고, 동독에서 유행하던 노란색 타일을 붙인 건물이 즐비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새로 닦은 가로의 이름을 빌헬름피크대로로 붙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슬그머니 그 이름을 바꾸고, 전후의 재건도 천리마운동 등 자체 노력의 산물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pp. 592~593]
어쨌든 이렇게 28개의 도시와 2개의 섬을 둘러보면서, 단순히 무슨 왕이 어떤 일을 했느냐 혹은 **년에 무엇이 일어났느냐를 외어야 했던 한국사에서 벗어나 여행하듯이 각각의 도시들이 간직하고 있는 얘기들을 듣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면의 10% 이상을 서울이 차지하고 있고, 30개 도시라는 제한으로 한국사에서 한 몫 했던 도시 모두가 포함되지 못해 다소 아쉬운 점은 있지만 한번쯤 읽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가 직접 가기 힘든 북쪽 땅과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도시들의 경우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면 쉽게 만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 이 리뷰는 다산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