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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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의 조숙한 천재


저자는 <추사 김정희>에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하 추사’)의 일생을 각 시기별로 나눠, 당대(當代)의 시류(時流)와 추사의 학문 및 예술세계를 하나하나 들려준다.


먼저, 추사는 명문가인 경주(慶州) 김씨(金氏) 출신으로, 영조의 사위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의 양자인 김이주(, 1730~1797)의 손자다. 동시에 아들이 없는 백부(伯父) 김노영(金魯永, 1747~1797)의 양자(養子)이기에, 왕가와 이어지는 종손(宗孫)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여섯 살 때 쓴 <입춘첩>을 보고 북학파의 거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15)가 제자로 삼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추사는 거만하고 고집스러운”[p. 174]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젊어서부터 청()나라를 오가면 그곳의 명사(名士)들과 교류를 하다 보니 좋게 보면 국제적인 감각을, 나쁘게 보면 청()나라 문화에 기울어진 모습도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

첫 연경행(燕京行)에서 돌아오기 전, 그가 읊었다는 이별시가

나는 변방에서 태어나 참으로 비루해서[我生九夷眞可鄙]

중원 선비 사귐 맺음 너무도 부끄럽다[多媿結交中原士]” [p. 78]라고 시작되는 것은 그 일면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물론 추사만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미국 갔단 온 지식인들이 말끝마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며 남을 면박 주며 잘난 체하곤 했는데, 그런 오만과 치기가 추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추사는 그런 식으로 남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간혹 그것이 심하여 사람들로부터 미움도 받았다”[p. 73]. 어쩌면 향토색이 짙은 예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도 선진국의 물을 먹은 젊은 천재였기에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제자인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에게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그들의 화첩에 전하는 것은 한갓 안목만 혼란하게 할 뿐이니 결코 들춰보지 않도록 하게”[p. 230]라고 언급하면서 비친, 18세기의 진경 산수화[정선]와 남종 문인화[심사정]에 대한 평가도 그런 분위기가 엿보인다. 그가 제주로 귀양가는 길에 남긴, 향토색이 짙고 독자적인 서체를 추구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의 글씨에 대한 일화도 그렇다.



연경행(燕京行), 국제적인 안목(眼目)을 갖추다


추사가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게 된 계기는 연경행이었다. 1809년 친부(親父)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로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에 가게 되자 추사는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서 청()나라의 대학자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운대(芸臺) 완원(阮元, 1764~1849) 등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추사는 옹방강과의 만남으로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완원과의 만남으로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갖게” [pp. 67~68] 될 만큼, 그 두 사람은 추사의 평생 스승이 되었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추사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지었는데, 여기는 그는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나라, ()나라로 나눌 필요 없이,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p. 107]고 단언했다. , “한나라 유학은 훈고학이고 송나라 유학은 성리학이라 하여 그 정신과 방법이 다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깊이 따져보면 다를 것이 없다는” [p. 107]는 내용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주장했다.

이를 보면, 훗날 청()나라 경학(經學)과 고증학(考證學)을 연구하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 隣, 1879~1948] 추사를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이다”[p. 45]라고 평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제주 유배,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한 시련


1830년 생부인 김노경이 모함으로 유배되고, 이어 1840년에는 추사 본인도 모함을 받아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다. 이 제주 유배는 추사의 인생과 글에서 매우 큰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먼저,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 완당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 1555~1636)에 뜻을 두었고,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아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蘇東坡, 1037~1101)와 미불(, 1051~1107)을 따르면서 더욱 굳세고 힘차지더니 (…) 드디어는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면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구속 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했다.” [p. 346]라고 말했듯이 추사는 추사체를 완성했다. 그래서 마치 정()-() –()의 과정을 밟는 것처럼, 추사체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는 추사가 추구한 예술의 경지인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못되고가 가려지지 않는다)’을 이룬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동시에 이 세한도는 고졸한 풍경의 집 한 채와 그 좌우에서 대칭을 이루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그림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추사의 글씨까지 하나로 봐야 하는,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나 더하자면, 제주 귀양이라는 시련은 추사를 한층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8 3개월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가는 길에 해남 대둔사에서 자신이 쓴 현판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대웅보전현판을 다시 달라고 했다는 일화나 이삼만의 묘비문을 써주었다는 전설은 이를 보여주는 얘기들이다.


추사의 삶에는 제주도 해배(解配)이후 8년의 시간이 더 있다. 그 기간 중에는 북청으로의 유배도 있었지만, 그의 학문과 예술에 영향을 주는 큰 굴곡은 더 이상 없었다고 느꼈다. 아마도 추사가 <논어>에서 말하는 마음 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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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하는 제국 - 11개의 미국, 그 라이벌들의 각축전
콜린 우다드 지음, 정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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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체성은

 

흔히 미국이라고 하면 김동섭의 <미국을 만든 50개 주 이야기>처럼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50개 주(State)의 연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콜린 우다드(Colin Woodard, 1968~ )는 이 책, <분열하는 제국>을 통해 미국을 11개의 지역 국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지역 국민은 주(州)의 경계는 물론 캐나다나 멕시코의 국경까지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니 황당무계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럴듯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수 세기 전에 형성된 미국의 지역 국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이주해 온 무리들에 의해 그들이 가졌던 문화, 인종, 종교적 신념 등이 퇴색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류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윌버 젤린스키(Wilbur Zelinsky, 1921~2013)는 “주인 없는 땅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 혹은 원주민을 쫓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사람들이 독자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을 경우 맨 처음 거주민의 특성은 이후 그 땅의 사회, 문화지리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설령 그 최초의 정착민들이 아무리 소수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장기간 지속되는 영향력을 봤을 때, 수백 명 혹은 수십 명에 불과한 초기 정착민들이 몇 세대 후 이주해온 수만 명의 새로운 이주민보다 문화지리학적으로 훨씬 큰 의미를 지닌다.” [pp. 28~29]라고 대답한다.

 

 

미국을 구성하는 11개의 지역 국민(Regional Nations)

 

The 11 nations of North America

출처: 콜린 우다드, <분열하는 제국>, pp. 4~5

 

출처: https://www.businessinsider.com/the-11-nations-of-the-united-states-2015-7

 

 

1. 엘 노르테(El Norte)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유럽 문화의 전파는 스페인의 군인과 선교사에 의해 남쪽, 뉴멕시코 북부의 건조한 고원과 콜로라도 남부에서 시작됐다. 이들 스페인계 미국인들은 “17세기 스페인의 전통과 기술, 종교관습을 20세기까지 고스란히 보존”[p. 39]했다고 한다. 스페인인 여성이 부족했던 결과 1700년대 초가 되자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과 스페인계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를 중심으로 하는 히스패닉이 멕시코와 엘 노르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을 가장 미국인답지 않는 국민이라고도 한다.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 남부, 텍사스 남부, 아리조나 남부, 뉴멕시코 등이 미국에 편입되었지만, 이들은 멕시코 북부의 주들과 함께 ‘노르테뇨(norteno)’라고 하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미국도, 멕시코도 아닌 자신들만의 제3국가를 염원한다. 참고로 미국의 카우보이 문화는 이들이 스페인 남부에서 이식한 문화로 미국 최초의 카우보이는 인디언이었다고 한다.

 

2. 뉴프랑스(New France)

톨레랑스(Tolerance, 관용)가 살아있는 유토피아의 건설을 위해 신대륙으로 진출한 프랑스인의 후예다. 이들은 인디언을 정복하려는 스페인이나 쫓아내려는 영국과 달리 인디언을 포용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이곳에는 프랑스 문화만큼 원주민 문화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인종적으로도 캐나다 프랑스인과 북미 원주민 사이의 혼혈인 메티스(metis)가 형성될 정도로 거의 공생관계가 되었다.

 

3. 타이드워터(Tidewater)

영주들이 경제 사회 정치를 지배하는 반(半)봉건사회를 이식하고자 한 영국 남부 젠트리의 후손이다. 이들은 소수의 농장주와 다수의 계약 노예로 구성된 사회를 형성했지만, 훗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흑인 노예를 구입, 사유재산으로 삼기 시작했다. 스스로 ‘왕당파’로 규정한 이들에 의해 직접선거를 치르지 않고 의회가 임명하는 상원의원 제도와 선거인단 제도라는 귀족적 요소가 미국 헌법에 삽입되었다.

  

4. 양키덤(Yankeedom)

뉴잉글랜드 황야에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각 공동체가 자치 공화국으로 작동하는 종교적 유토피아를 세우겠다며 정착한 칼뱅주의자의 후예다. 따라서 종교가 다른 이들은 모두 추방할 만큼 종교적, 도덕적으로 불관용 정책을 펼쳤다. 이들은 젊은 비(非)숙련 남성 계약 노예 위주인 타이드워터 정착민과 달리 가족 단위로, 교육 수준과 경제 수준이 높은 중산층 가족 단위로 이주를 했기에 안정적이고 응집력이 높았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전파하는 ‘선교’를 위해 주변을 활발하게 정복했다.

 

5.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

1600년대 초반 지구상에서 가장 근대적이고 세련된 국가였던 네덜란드에 의해 형성되었기에 이곳은 종교적 관용과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다만 이들의 관용은 무역과 사업을 위해 다양성을 참고 견딘 것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다양성과 관용, 계층 이동, 민간 기업 육성은 바로 이들이 남긴 유산이다.

 

6. 디프사우스(Deep South)

17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였던 서인도제도의 바베이도스에서 미국의 남부 지역으로 이동한 농장주의 후예다. 노예제를 기반으로 소수의 백인 농장주에 의한 과두제 사회를 형성하였으며 인종에 따른 엄격한 카스트 제도가 적용되었다.

 

7. 미들랜드(Midland)

미국의 여러 국민 중 가장 ‘미국인’다운 혹은 전형적인 미국인에 가까운 사회가 영국 퀘이커 교도에 의해 건설된 미들랜드다. 이후 기근과 종교적 박해, 전쟁을 피해 독일에서 온 농부와 수공업자들이 합류해서 다수가 되었다. 정치에는 무관심한 편이지만, 이들의 영향인지 톱-다운 방식의 정부 개입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다.

 

8. 그레이터 애팔라치아(Greater Appalachia)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마지막 국민인 그레이터 애팔라치아는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려 온 영국 북부의 분쟁지대에서 계속 오르는 세금에 시달리다가 신대륙으로 이주한 스콧-아이리시인들의 자손이다. 거칠고 호전적이며 혈연에 집착하는 이들은 대중문화를 통해 ‘레드넥(redneck, 교육 수준이 낮고 보수적인 시골 사람을 일컫는 모욕적인 표현)’, ‘힐빌리(hillbillies, 두메산골 촌뜨기)’, ‘크래커(cracker, 남부의 가난한 시골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 ‘하얀 쓰레기(white trash, 가난한 백인을 뜻하는 은어)’라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배타적이나 개인의 자유와 주권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컨트리 음악, 스톡 카(일반 차를 개조한 경주용 차) 레이싱, 기독교 복음주의 등에 영향을 미쳤다. 특이하게도 자신들의 뿌리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 까닭에 “이름 없는 사람들”로 불리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미국인’ 혹은 ‘미국 원주민’이라고 말한다.

 

9. 레프트 코스트(The Left Coast)

뉴잉글랜드에서 온 상인, 선교사, 벌목꾼 무리와 그레이터 애팔레치아 출신의 농부, 채굴업자, 가죽 무역상 등으로 구성되었다. 덕분에 뉴잉글랜드의 유토피아 이상주의적 성향과 그레이터 애팔레치아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결합되어 근대적 환경운동과 글로벌 지식혁명의 산실이 되었다.

 

10. 파웨스트(The Far West)

미국이 가장 마지막으로 정복한 땅으로 “민족적 지역 문화가 아니라 외부 수요에 따라 정체성이 형성된 독특한 지역” [p. 336]이다.”이다.  광활한 황야지역이기에 대규모 산업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뉴욕, 보스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에 본사를 둔 대기업이나 영유권을 지닌 연방정부 주도로 (식민지 개척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이곳은) 해안지역 국민의 이익을 위해 착취되고 수탈당하는, 일종의 내부 식민지 취급을 받았다.” [p. 23].

때문에 이들은 개인의 자유에 극도로 민감한 자유지상주의자가 되었다.

 

11.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

새롭지만 가장 오래된 지역국민으로 북미 원주민들이 자리잡고 있다. 공동체 의식과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이 매우 강한 사회이다.

 

 

지역 국민으로 본 미국 역사

 

1. 미국 독립 전쟁

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독립 전쟁은 양키덤,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 그리고 북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가 군사동맹을 맺어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적 관습, 제도를 위협하는 영국을 물리치고 이에 동조했던 미들랜드의 평화주의자와 뉴네덜란드의 왕당파를 정복한 전쟁이다. 이로 인해 뜻하지 않게 “첫째는 국가적 지위의 특성을 가진 느슨한 정치적 연대체가 생겨난 것이고, 둘째는 각 국민의 지도자들이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p. 198]

그 결과 식민지 연합을 이룬 6개의 지역 국민은 내부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타협하여 새로운 헌법과 연방을 만들었다. 타이드워터와 디스사우스는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뉴네덜란드는 양심과 표현,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 장전을, 미들랜드는 각 주의 주권 보장을, 양키덤은 작은 주들도 상원에서 동등한 발언권 보장을 각각 반영시켰다.

 

2. 남북 전쟁

남북전쟁 시대는 오랫동안 ‘북부’와 ‘남부’ 사이의 투쟁으로 그려져 왔다. 하지만 이 두 지역은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남북전쟁이 과연 노예 해방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 게르만족 사이의 세력 다툼이었는지 여부를 놓고도 논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어떻게 분석해봐도 명확하지 않고 불만족스러운 결론밖에 도출되지 않았다.” [p. 311]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남북전쟁은 노예제 사회였던 타이드워터를 포함하는 디프사우스 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양키덤 세력의 충돌이라고 한다.

 

오늘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일상 생활과 경제 활동의 범위는 확대되었지만, “국민들 사이의 차이점을 약화시키기보다 오히려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2008년 언론인 빌 비숍(Bill Bishop, 1953~ )과 사회학자 로버트 쿠싱(Robert Cushing)은 <대분류(The Big Sort: Why the Clustering of Like-Minded America is Tearing Us Apart)>라는 책에서 1976년 이후부터 미국인은 자신과 가치관 및 세계관이 비슷한 커뮤니티로 각자 헤쳐 모이고 있다고 주장”[p. 29] 했다. 즉, 현재의 미국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여러 개의 지역 국민들로 재분류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미국사를 11개 지역 국민의  각축으로 보는  이 책의 관점은 독특하다. 그리고, 다른

국가를 살펴볼 때  우리가 무심코 가지게 되는 선입견에 대한 경고와 발상의 전환에 대한  단

서로도 유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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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 부산 근대건축 스케치
최윤식 지음 / 루아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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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근대의 기점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지만, 일본에 의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내적으로 근대화가 시작되고 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는 1876년도 주요한 후보 가운데 하나이다.

동래부(東萊府) 관할이었던 부산포(釜山浦)가 도시로서의 틀을 잡게 된 것이 앞에서 언급한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개항장으로 지정된 이후이니 어떻게 보면  ‘부산(釜山)’이라는 도시의 존재감은 근대도시로 형성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또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과정에서 근대도시 부산의 거리와 건축물은 훼손되거나 소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자는 “오래된 것이 낡은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은 것이 낡은 것이다. 그 낡은 것조차 얼마 남지 않았으니 뒤를 이을 부산 사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p. 5]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렇기에 1910년대 부산항과 1926년 무렵의 광복로, 1930년대 대청정 거리 모습에서 시작해 1943년 화재로 소실된 태평관,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된 옛 부산역, 공회당 그리고, 부산우편국, 1979년에 철거된 부산세관, 1983년에 헐린 상품진열관, 마지막으로 현재 보존되고 있는 석당박물관, 일신여학교, 임시수도기념관, 부산근대역사관 등에 대한 68점의 세밀화를 우리에게 건네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910년대 부산항

출처: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pp. 8~9

 

부산우편국

출처: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pp. 72~73

 

석당박물관

출처: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pp. 84~8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화되어 간다. 도시의 거리와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거리와 건축물에는 그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단순히 우리가 당장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러한 공간들을 계속해서 파괴하기만 하면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던 자연 파괴의 대가를 지금에 받는 것처럼 또 다른 형태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저자가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기에 있는 건축물, 잊혀진 거리를 세밀화의 방식으로 남기는 것은 벌목으로 더 이상 나이테가 생기지 못하는 나무처럼, 그 공간에 쌓인 추억과 이야기가 휘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는 건축에 관심 있거나 부산의 역사에 흥미를 느끼는 이에게는 큰 선물이 되리라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책등이 없는 누드 사철 제본으로 되어 있어 68점의 세밀화를 보다 편하고 제대로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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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 한국의 미를 세계 속에 꽃피운 최순우의 삶과 우리 국보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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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 최순우는 누구인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좋아하던 문학소년 최순우(崔淳雨, 1916~1984)의 인생에서 전환점은 우현(又玄고유섭(高裕燮, 1905~1944)과의 만남이었다개성부립박물관(開城府立博物館)에서 관장과 관람객으로 시작된 인연은 최순우가 고유섭의 제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그는 고유섭의 다른 제자인 메이지대학 정경학부 출신인 수묵(樹默진홍섭(秦弘燮, 1918~2010)이나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 출신인 초우(蕉雨황수영(黃壽永, 1918~2011)과 달리 송도고등보통학교 출신이었다때문에 진홍섭과 황수영과 함께 개성 3()’로 불리면서도 그는 승진이나 급여에 불이익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그가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의 서기로 있을 때, 2년 연하의 후배인 진흥섭이 개성분관의 관장으로 선임된 것이나 그가 1954년 보급과장(1961년 미술과장으로 명칭이 변경)으로 진급한 후 20여 년 간 만년과장이었던 것도 아마 그 탓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곡(兮谷최순우는 묵묵히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찾고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친 박물관인이 (되었다왜냐하면,) 그는 선조의 문화와 이 땅의 유산이 총체적으로 모여 있는 박물관이 왜 중요하고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그랬기에 일생을 바쳐 국립중앙박물관을 지켰고 발전시켰다.” [pp. 4~5]

이런 최순우의 삶은 제대로 된 나라라면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이라면 분명히 기억해야 할 만큼 의미 있다하지만많은 이들이 최순우에 대해 알지 못한다그나마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빛을 보지 않았다면그의 이름은 한 장의 깨진 청자 기와조각처럼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외로웠다지금은 우리 문화유산이 아름답고 자랑스럽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일제강점의 후유증인 식민사관과 해방 이후를 휩쓴 서구우월주의에 힘겹게 맞서야 했다오래되고 낡은 것에 볼 게 무엇이 있느냐는 냉소와 비웃음이 난무했다.

그런 시대에 그는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에 설레고 떨리고 사무치고새것이 아닌 옛것에 홀리고 미치고 취했다수탈과 전쟁을 빼앗기고 무너지고 파괴된 폐허의 시대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굴하고 지키고 보존” [p. 5]했을 뿐 아니라우리 문화재가 정당한 대접을 받도록 요구하고 이를 관철했다.

 

 

최순우를 기억하는 키워드

 

첫째한국미의 보존

최순우는 한국전쟁 중에 서울 국립박물관을 점령한 북한군의 문화재 반출 지시를 목숨을 걸고 지연시켜 소장 문화재를 부산으로 안전하게 피난시켰다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개관할 때마다 그의 공이 컸다. 198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을 구(중앙청 청사 건물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자 그 주역으로서 일하다가 제반 계획과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개관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또한 그는 1946년 고려의 정궁(正宮)의 터인 만월대(滿月臺)에 미군 막사를 세우는 공사를 막은 후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개발논리에 의해 흩어지고 버려지고 있는 문화재 발굴과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강진의 청자기와 가마터인천 경서동 녹청자 가마터광주 무등산 금곡요 등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진 채 쓰러져갔던 국보급 문화재와 유적의 발굴 답사출토유물 정리연구와 전시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그의 정성이 묻어있었다.

 

나아가 당시 국립박물관에 예산이 없어 구입하지 못한 주요 유물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해같은 개성 출신 사업가인 호림(湖林윤장섭(尹章燮, 1922~2016)에게 문화재 수집의 단초를 제공하고훗날 호림미술관을 설립할 때도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둘째한국 문화유산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다.

최순우는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그저 가난한 신생국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고유 문화를 가진 국가임을 세계에 알렸다.

1957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도자기목기회화 등을 해외에 전시하면서 그때마다 호송관과 전시담당 학예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1973년에  ‘한국미술2000년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시작했으나 서울 암사동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가 기원전 3000년 토기임이 밝혀진 이후에는 한국미술의 역사를 수정, ‘한국 미술 5000년전으로 변경해서 전시를 했다이러한 전시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의 서화도자기조각건축물의 독창적이고 찬란한 아름다움을 떨쳤다나아가 한국 미술의 이해와 보존·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7년 말부터 진행된 한국 국보 전시회관람객 중에는 우리나라 유학생도 많았다사실 유학생 사회에서는 전시회가 열리기 전 “누구 창피를 보이려고 시시한 것들을 가지고 왔느냐”는 뒷공론도 있었지만전시회가 개막되고 <뉴욕타임스등 여러 신문에서 한국 미술의 특색 있는 아름다움을 대서특필하자정말로 그렇게 좋은지 보겠다며 하나 둘 찾아왔다최순우는 훗날 유학생들의 그런 모습에 대해 “말하자면 학생들은 미처 몰랐던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을 외국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고따라서 저절로 우러나는 민족적인 긍지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p.206]

 

유럽 국가들의 요청으로 한국미술 5천년전을 진행할 때는 한국 국보에 대한 보험액을 국제수준에 비해 절반 정도로 산정하자 그는 보험액을 올리지 않으면 전시를 못하겠다면서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 정당한 대접을 요구했다그 결과이후 우리나라 국보는 해외전시 때 세계 최고수준의 대접을 받게 되었으니 그의 힘으로 국격(國格)을 올려놓은 셈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한국미술 5천년전’ 전시는 한류(韓流)’의 원조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셋째한국미의 아름다움을 글로 알리다.

아마도 많은 이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고 혜곡(兮谷최순우(崔淳雨, 1916~1984)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최순우가 남긴 글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문화재에 대한 척박한 인식 속에서 그는 1947 9월 [서울신문]에 발표한 ‘개성 출토 청자파편’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멋과 가치를 문화재 해설 280미술 관련 에세이 205논문 41사료해제 86편 등 모두 600여 편의 글로 남겼다.

또한 1950년부터 서울대고려대홍익대이대 등 여러 학교에 출강하여 미술사를 강의하면서 후학을 많이 길러내었다같은 박물관에 근무했던 진경시대 문화 연구의 대가이자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가헌(嘉軒최완수(崔完秀, 1942~ ), 불교미술의 권위자 강우방(姜友邦, 1941~ ), 6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소불(笑佛정양모(鄭良謨, 1934~ ) 등도 그가 길러낸 후학이라 말할 수 있다.

 

오직 박물관과 문화유산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삶이지만,

1963년 조선 백자와 반닫이 등 조선시대 목가구 수출을 저지했다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고, 1966년 석가탑 보수복원공사 때는 내부가 썩은 전보대로 인해 2층 옥개석의 모서리 한쪽이 조금 훼손되자 복원책임자라는 이유로 문화재 보호법 제60조 및 제70(파손과 관리소홀)를 위반했다고 형사 입건되어야 했다심지어 공무원 병가 허용기간이 두 달이라는 이유로 직장암으로 죽어가는 그에게 문화공보부에서는 사람을 보내 사표 제출을 독촉한 일화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 밖에 없었다.

 

최순우 같은 분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풍납동 토성 보존과 관련된 현실 등을 바라보면 왠지 답답하다심지어 최순우가 한국 전쟁 당시인 1952 1 <민주신보>에 문화재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아래의 글이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 듯해서 씁쓸했다.

우리 스스로의 무지와 무위무책(無爲無策)으로 무참한 파괴가 쉴 새 없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슬퍼하는 바이다.

중 략 ~

건축 이외의 문화재만 하더라도다행히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주요 문화재는 안전히 소개(疏開)되어 있다고 하나이 방대한 미술품의 보존관리를 담당한 기관에 최소한도의 소요예산과 인원도 배정되어 있지 못하여소개 문화재는 그 중요성에 반하여 현재 너무나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

무지와 무위무책의 악몽에서 어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무엇이 더 급한지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가릴 줄 모르는 한모든 연유를 전쟁에만 돌리는 한우리 문화재 보존의 앞날은 암담하다.” [p.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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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밑으로부터의 역사가 어려운 이유

 

과거에는 기득권층이 문자로 전승해온 텍스트를 그대로 기록하고 해석하는 소위 술이부작(述而不作)1)의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했다때문에 역사의 대부분을 왕이나 귀족 같은 지배층의 이야기가 차지했다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역사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여기에는 왕과 귀족 중심의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닌 민중 중심의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주장하고 싶어도 그 바탕이 될 텍스트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도 한 몫 한다.

<고양이 대학살>을 번역한 조한욱 교수가 옮긴이 서문에서 무명 인사들이 남겼거나 그들에 대해 서술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서술을 체념적으로 포기한 채 그들을 그늘 속에 남겨두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p. 8]고 말한 것도 같은 이야기인 셈이다.

 

 

<고양이 대학살>

 

여기서 이 책 <고양이 대학살>의 가치가 드러난다이 책의 저자인 로버튼 단턴이 <신데렐라>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사람들이 흔히 보아왔지만 지나쳤던 농민들의 이야기에 역사적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복원” [p. 8]시켰기 때문이다이 책의 1장 농부들은 이야기한다마더 구스 이야기의 의미는 바로 이런 점에 충실하다이 시대 민담에 대한 해석을 통해 18세기 프랑스 농민들의 물질적 여건과 생활그리고 정신세계에 대해서 일종의 복원’ 혹은 재구성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2장 노동자들은 폭동한다-세브랭 가()의 고양이 학살은 극히 드문 피지배층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1730년대 파리 생-셰브랑 가의 인쇄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던 니콜라 콩타는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기록했다우리에게는 단순한 동물 학대로 보이는 고양이 학살이 노동자들에게 재미있었던 이유는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즉 그것은 그들이 '부르주아'에게 반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던 것이다고양이 울음소리로 괴롭힘으로써 그들은 '부르주아'로 하여금 고양이를 학살하도록 위임하게 부추겼고다음으로는 학살을 이용하여 그를 상징적으로 재판에 회부하여 불공정한 경영을 이유로 단죄하였던 것이다그들은 또한 그것을 마녀 사냥으로 이용하였다그것은 여주인이 가장 아끼던 고양이를 죽일그리고 그녀 자신이 마녀였다는 것을 암시할 구실을 제공하였다마지막으로 그들은 고양이 학살을 샤리바리[Charivari]2)로 변형시켰다그것은 여주인에게 성적인 모욕을 줌과 동시에 남편을 오쟁이진 사람으로 조롱할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pp. 146~147]

조선 시대의 탈춤처럼 부르주아가 애지중지하는 고양이를 학대 혹은 학살하는 과정과 이를 재연하는 행위를 통해 지배층[부르주아/양반]과 피지배층[인쇄공/농민]의 갈등을 모욕과 풍자라는 수단을 통해 해소한 것이다따라서 지배층은 고양이 학살과 그 재연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이러한 갈등 해소 수단을 제제하다가 체제 전복으로 이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3장 한 부르주아는 그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텍스트로서의 도시는 <1768년에 만든 몽펠리에 시의 상태와 설명(이하 설명서’)>이라는 익명의 시민에 의한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설명서를 저술한 익명의 시민은 한 측으로는 귀족과다른 한 측으로는 평민들과 자신을 구분시켰다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기 주장에 공개적으로 집착하여 매 페이지마다 확인되고 있는 그의 공감대는 도시 사회의 중간 범위 어디엔가 그를 위치시킨다즉 그는 (‘구세대의 부르주아에 속하는의사법률가행정가금리 생활자 등 대부분의 지방 도시에서 인텔리겐치아를 형성하였던 자들에 동조하였던 것이다.” [p. 164]

뼛속까지 부르주아였다고 자처하는 익명의 시민은 대표자를 뽑거나 국가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자율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정치적 집합체를 상정할 수 없었다그는 집체적 집단이라는 틀 속에서 생각하였다따라서 그 지역에서 베르사유에 대표단을 파견하였을 때그 대표단은 신분별로 왕에게 말해야 했다는 것은 그에게 완전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하나의 신분으로서 귀족의 용도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는 사회의 자연적인 조직으로서 신분의 위계 질서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부르주아 계층이 상당수 작위를 받았던 것은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였다진정으로 그를 경악시켰던 것은 평민의 부르주아화였다왜냐하면 2신분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3신분과의 접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 [pp. 187~188]

이를 위협이라고 느낀 부르주아 가운데 하나인 익명의 시민은 신분간의 경계선을 강화시킬 것을 제안했다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폭동에 몰입하는 난폭한 무리인 대학생들은 매 학부마다 특수한 교복을 입어 정상적인 시민들과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공원과 산책로는 특정의 시간에 특정의 집단에게 예약되어야 한다 특정 직종의 장인들은 특정의 지역에 살도록 요구되어야 한다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인들은 그들의 의복 위에 특징적인 기장을 달도록 강요되어야 한다” [p. 195]와 같은 일이다.

이런 식으로 같은 부르주아 입장에서 바라 본 부르주아를 소개하는데의외로 진보적이라고 간주되는 18세기 부르주아가 복고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4장 한 경찰 수사관은 그의 명부를 분류한다문필 공화국의 해부은 서적 거래 수사관인 조세프 테므리가 1748년부터 1753년까지 파리의 문필가 501명에 대한 보고서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18세기 중엽에 문필 인구는 제어하기 힘들었을지는 몰라도 혁명적은 아니었다그 대부분은 <메르퀴르>의 서평이나 프랑스 국립 극단의 단원 자리나 학술원의 회원 자리를 얻으려고 애썼다.” [p. 2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필가에 대한 절대왕정의 입장은 무신론이 왕의 권위를 침해한다고 믿었다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자유 사상가들은 중상가들이나 마찬가지의 위협을 이루고 있었다” [p. 262]고 하는 조세프 데므리의 인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5장 철학자들은 지식의 나무를 다듬는다: <백과전서>의 인식론적 전략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백과전서>라는 텍스트가 아닌 그 안에 담긴 의도를 얘기하고 있다.

계몽 사상 최대의 텍스트인 <백과전서>는 모든 것에 대한 잡동사니 같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기에 이것이 왜 18세기에 그렇게 큰 반향(反響)을 일으켰는지 의아해하기 쉽다하지만 분류 정리를 한다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다.”[p. 272]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와 장바티스트 르롱 달랑베르(Jean-Baptiste le Rond d’Alembert, 1717~1783)는 인간 지식의 체계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방식을 통해 구체제와의 단절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6장 독자들은 루소에 반응한다낭만적 감수성 만들기에서는 라로셸의 부유한 상인인 장 랑송이 서적 도매상에 보낸 주문목록과 잡담을 통해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소설 <(엘로이즈>에 대한 반응을 보여줍니다여기에 장 랑송 이외의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추가해서 이들이 어떤 공통감정을 가졌는지 보여주는데소설 속 인물이 실존하는 것처럼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18세기 독자들의 몰입에 당혹스러우면서도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현대의 드라마 시청자의 모습이 겹쳐져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고양이 대학살>은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일부를 논한 6편의 논문을 엮은 책이다그래서 읽다 보면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다게다가 이 책이 두괄식 혹은 미괄식으로 결론을 내지 않아 다 읽고도 다 읽은 것 같지 않은 찜찜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구(口傳)되어 온 민담(民譚), 경찰의 보고서루소의 소설 등을 통해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갔는지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좀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일반 민중들의 삶과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는지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계급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나아가 지식인이 등장하기 시작할 무렵 공권력은 그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고계몽주의가 어떻게 기존의 것들과 선을 긋기 시작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가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사회를 분석하는 것은누구도 쉽게 다루지 않았던 것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신선한 자극이 된다비록 자료의 애매한 부분 때문에 저자의 모든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지만역사는 암기과목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머리가 생각하고 이해하기 위해 달려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1) 술이부작(述而不作): 옛 글을 인용하여 기록했을 뿐 스스로 창작한 것은 아니다.

2) 샤리바리(), 정치경제종교 등과 관련하여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가 생겼을 때 이것을 소란과 조롱폭력 등으로 처벌하는 유럽의 민중적 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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