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인형 모중석 스릴러 클럽 23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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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링컨 라임 시리즈의 저자 제프리 디버의 이름을 많이 들어봤다. 이미 영화로 만났던 링컨 라임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본 컬렉터>에서 시작된 범죄 스릴러는 링컨 라임이라는 탁월한 천재 법의학자라는 캐릭터를 독자에게 선사해 주었다. 그리고 시리즈의 7번째로 소개된 <콜드 문>에서 등장한 캐트린 댄스라는 출중한 프로파일러를 따로 독립된 주인공으로 삼은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잠자는 인형>(2007)이다. 놀랍기만 하다, 한 명의 빼어난 캐릭터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거기서 분화된 제 2의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작가의 능력이!

장장 700쪽에 달하는 이 ‘슈퍼 스릴러’ <잠자는 인형>은 희대의 연쇄살인범 찰스 맨슨의 아들로 불리는 다니엘 펠이 기발한 방법을 사용해서 탈옥하면서 시작된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이자 동작학의 대가로 범죄자의 심리를 파악해내는 캐트린 댄스는 그 전에 펠이 탈옥하기 전에 그를 만난다. 자신에게 경도된 일단의 ‘패밀리’를 이끌던 펠은 8년 전 일가족 몰살사건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잠자는 인형>은 도망가는 범죄자와 그를 좇는 법집행관이라는 전형적인 스릴러 구조에, 존 스타인벡의 문학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 해안의 몬터레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올해 처음으로 스타인벡의 작품인 <통조림공장 골목>을 읽었는데, 캐너리 로 같은 익숙한 지명이 등장할 때마다 아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 스릴러는 자신의 뒤를 좇는 경찰의 허를 찌르는 신출귀몰하는 빼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다니엘 펠과 정확하게 딱 한발씩 늦는 캐트린 댄스의 추리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 하긴, 초반에 그렇게 맥없이 범인이 잡히리라고는 얼추 한눈에 봐도 엄청 두꺼운 책의 구조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다니엘 펠의 탈옥은 피라미드의 정점으로, 캐트린과 캘리포니아 연방 수사국(CBI)이 그의 뒤를 좇으면서 드러나는 과거의 그의 행적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는 소통 부재로 인한 가족의 해체에 고통 받는 젊은이들을 포섭해서 철저하게 자신이 통제하는 ‘패밀리’의 일원으로 삼고자 한다. 그는 마치 중세 하멜린의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감언이설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어느 산 속에 자신만의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망상에 젖어있다. 그래서 자신의 목표에 장애가 되는 건 가차 없이 제거해 나간다. 수십 건의 각종 범죄를 저지르면서 용의주도하게 법망을 빠져 나가던 그는 실리콘 밸리의 천재 프로그래머 윌리엄 크로이튼 일가를 습격했다가 그만 영어의 몸이 되고 만다.

제프리 디버는 유능한 법집행관 캐트린 댄스와 신출귀몰한 범죄자 다니엘 펠이라는 구조에, 그가 이끌던 컬트 집단의 트리오, 범죄의 원형을 파헤치는 르포 작가 모튼 네이글 그리고 크로이튼 가 참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잠자는 인형’인 테레사 크로이튼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플롯에 다양성을 제공한다. 게다가 다니엘 펠의 도주를 돕는 제니 마스턴에 이르기까지 악당을 동정하는 워너비들까지 캐릭터의 일거수일투족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소설의 초반부가 다니엘 펠의 탈옥과 도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중반부는 퍼즐조각을 맞추듯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캐트린 댄스의 프로파일링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소설 중간에 제프리 디버는 댄스와 자신의 다른 시리즈 링컨 라임과의 짧은 조우도 빼놓지 않고 친절하게 배치한다. <잠자는 인형>은 정말 마지막 장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그만큼 반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비트랩처럼 곳곳에 치밀하게 잠복해 있다.

사실 <잠자는 인형>을 통해 ‘동작학’이라는 학문에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작가는 소설에서 묘사되는 심문의 과정을 하나의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 올린다. 프로파일러는 질문을 통해, 상대방이 보이는 반응으로 범죄자의 사기와 기만을 폭로한다. 제프리 디버는 특히 피심문자의 스트레스 반응에 주목을 하는데, 상대방이 말할 때 보이는 동작의 패턴을 통해 심리의 저변을 속속들이 파헤친다. 아울러, 프로파일링을 자신의 공적인 업무뿐만 아니라, 자기 아이들과의 관계 그리고 데이트 상대에까지 적용하는 캐트린 댄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한다. 이렇게 제프리 디버는 소설적 재미와 휴머니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개의 돌로 사냥하고 있었다.

범죄자 다니엘 펠에 동조해서 그의 범죄를 도운 ‘패밀리-컬트집단’에 대한 문제 제기도 빼놓지 않는다. 왜 그렇게 젊고 일견 똑똑해 보이는 이들이 컬트 리더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통제 받으면서 범죄마저 저지르게 되는가. 희대의 범죄자 다니엘 펠은 취약한 가족의 연결고리를 공격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족이라고 받아들여진 컬트집단으로부터 버림 받지 않기 위해 범죄마저도 마다하지 않는 개조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한편, 다니엘 펠의 희생자들은 하나 같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의 협박을 순순히 따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잠자는 인형>의 속편 격인 <노변의 십자가>가 작년에 발표되었고, 3탄인 <심문>이 2013년에 출간예정이라고 한다. 캐트린 댄스라는 이렇게 멋진 캐릭터를 가만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할리우드에서도 곧 영화화에 착수할 전망이라고 하는데, 과연 이 슈퍼 스릴러의 아우라가 어떻게 실버스크린에 옮겨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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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별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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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 열린책들에서 로베르토 볼라뇨 전집 시리즈로 잇달아 출간되고 있는 <부적>과 <먼 별> 두 권이 나왔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과 <칠레의 밤>에 이어 이 두 책도 단박에 다 읽어 버렸다. 앞으로도 9권의 볼라뇨 책이 출간 대기 중이라고 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배어나는 그의 책이 기대된다. 다만, 대중적이지 않은 게 흠이라고나 할까. 난 개인적으로 로베르토 볼라뇨의 팬이 되어 버려서 전작주의에 도전하겠지만.

<부적>에서 볼라뇨 자신이 살았던 멕시코로 잠시 문학적 외유를 떠났던 작가는 <먼 별>로 다시 조국 칠레로 복귀를 선언한다. 이미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의 마지막 장에서 선보였던 이야기를 확대한, 영화로 치자면 스핀오프 형식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먼 별>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의 얼터 에고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아르투로 벨라노가 화자로 등장한다.

칠레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1973년 9월 11일 전, 남부 콘셉시온에서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라는 이름의 독학생에 대한 소개로 소설 <먼 별>은 시작한다. 후안 스테인이 운영하는 시 창작 교실에서 그를 알게 된 ‘나’의 서술이 이어진다. 나와 죽마고우 비비아노 오리안은 창작교실의 스타 가르멘디아 자매와의 친교 때문에 그를 운명적으로 질투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잔잔하게 고백한다. 십 대 소년의 치기라고나 할까.

자유로운 삶이 절정에 달했을 때,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고 ‘탈주’가 시작된다. 이제 루이스 타글레에서 소설의 주인공 카를로스 비더로 진화한 연쇄살인범은 가르멘디아 자매와 그들의 이모를 끝장내고 잠적해 버린다. 한편, 쿠데타 이후 체포되어 임시 수용소에 갇혀 있던 나는 누군가 메서슈미트를 몰고 공중에 시를 쓰는 기발한 퍼포먼스를 목격한다. 그것도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창세기를 비행기에서 발산하는 연기로 쓰는 것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하신 FIAT LUX(빛이 있으라)가 창공에 아로새겨진다.

여기서 로베르토 볼라뇨는 다시 나중에 <칠레의 밤>에 등장하게 될 이바카체 신부의 평론 활동을 짚어준다. 바로 이 재미일까? 자신이 발표하는 작품에 교차해서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이 반갑기만 하다. 언제나 정력적인 활동가로 온갖 무모해 보이는 혁명의 대오에 앞장섰던 후안 스테인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주인공이 될법하다는 벨라노의 평이 이어진다. 그와는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디에고 소토는 생면부지의 남을 돕기 위해 나섰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그와 함께 소개된 페트라 이야기는 더 기묘하면서도 흥미를 자극한다.

쿠데타 이후 공군 중위의 타이틀을 달고 양지의 세계로 화려한 부활을 한 카를로스 비더의 기이한 행적이 이어진다. 예술이기보다는 곡예에 가까운 그의 비행 시 퍼포먼스와 파티장에서 자신이 개입한 끔찍한 사건에 대한 사진 전시회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하지만, 카를로스 비더는 종적을 감추고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범죄자라는 낙인이 아니라 오히려 미지의 예술가라는 칭송과 전설이 태동한다.

다시 아벨 로메로라는 전직 경찰관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를 매우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세계에서 영국 경찰에 버금가는 뛰어난 조직으로 칠레 경찰을 꼽는데, 문득 볼라뇨와 같은 나라 출신인 루이스 세풀베다의 단편소설 <악어:야카레>가 떠올랐다. 칠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후원자로부터 거금을 받고 신분을 감추고 계속해서 활동 중인 카를로스 비더를 찾아내라는 밀명을 받은 로메로는 벨라노를 찾아와 그의 행적을 수소문한다. 그들은 과연 꼭꼭 숨은 카를로스 비더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볼라뇨 전집을 앞두고, 볼라뇨에 대한 <버즈북>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워밍업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처음 접했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같은 유머보다는 문학과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글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먼 별>도 초반에는 그야말로 까끌까끌한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카를로스 비더라는 인물의 행적을 좇는 추리물로 전환된다. 그리고 화자 벨라노처럼 나도 본격적으로 책에 몰입되기 시작했다.

사실 소설의 곳곳에서 줄줄이 등장하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칠레 출신 문인들의 이름 행진에 그만 주눅이 들었다. 그만큼 칠레라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FTA를 맺고 있을 정도로 굉장히 가까우면서도 문학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반증이 아닐까. 로베르토 볼라뇨 전집을 통해 좀 더 칠레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로베르토 볼라뇨는 자신의 작품에서 뚜렷한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칠레의 어두운 과거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그런 차원에서 권력에 부합해서 고문과 살해를 저지른 카를로스 비더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할 대상이다. 작가 자신의 얼터 에고로 작용하는 아르투로 벨라노는 이제 더 이상 악당이 해악을 끼치지 않으니 그냥 내버려 두자고 로메로에게 말한다. 그는 우회적으로 과거와의 화해를 종용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작가는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과거는 이미 다 알고 있을 테니, 나머지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는 것일까? 작가가 그렇게 탈정치를 노래 부르지만, 굳이 정치적 연결을 하는 나는 우매한 독자인가 보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호흡이 짧은 볼라뇨의 글을 읽어 왔는데, <야만스러운 탐정들>이나 <2666> 같은 메가톤급 대작들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기만 하다. 어쨌든 나의 로베르토 볼라뇨 도전기는 순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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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버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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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도미니크 아벨, 피오나 고든 그리고 브루노 로미 트리오의 <룸바>(2008)를 봤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전작인 <빙산>(L'iceberg)(2005)이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아주 어렵게 구해서, 원어로 자막도 없이 <빙산>을 접할 수가 있었다. 아쉽기만, 대사가 나오는 부분들은 모두 패스하고 봤다. <룸바>처럼 그다지 대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도미니크 아벨과 피오나 고든의 마임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지라 영화를 보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던 것 같다.

패스트푸드 가게의 매니저로 일하는 피오나(피오나 고든 분)는 어느 날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깜빡하고 냉동고에 넣지 않은 물건 생각이 난다. 바닥 청소를 다 마친지라, 바닥에 신발 자국을 내지 않기 위해 천조각 위에서 낑낑대며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이 희화적으로 그려진다. 어이없게도 목에 두른 목도리 때문에 그만 피오나는 냉동고에 갇히게 된다. 




그 다음 날, 극적으로 동료 직원들에 의해 구조된 피오나. 하지만, 그녀의 남편 쥘리앵(도미니크 아벨 분)과 아이들은 그녀 없이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하루를 잘 보낸다. 아주 평온해 보이던 피오나 가정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확실히 냉동고 사건 이후, 피오나는 변했다. 피오나는 침대에서 울먹이며 남편과 대화를 시도해 보지만, 진지해 보이지 않는 쥘리앵!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가족들은 깜짝 파티를 준비하지만,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목숨을 잃을 뻔했던 냉동고가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가게 앞에 서 있던 냉동고 트럭에 갇힌 채 어디론가 떠나는 피오나. 그 냉동고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들이 마구 나타난다. 알고 보니 불법체류자들과 함께하게 된 그녀는 “YES"와 ”NO"로 나뉘는 체험도 하게 된다. 한편, 또다시 피오나의 부재를 알아차린 쥘리앵과 아이들은 그녀를 찾아 나서지만, 그녀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다. 망연자실해진 아빠 쥘리랭을 대신해서 딸아이가 대신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피오나는 단체 관광객 틈에 끼어서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와 함께 바닷가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천국보다 낯선 마을에서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요트 “Le Titanique"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 생활을 하는 르네(필리페 마르츠 분)다. 바다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르네는 세상사가 덧없기만 하다. 아내를 잃은 쥘리앵은 마침내 수소문 끝에 그녀를 찾는데 성공한다. 고생 끝에 피오나를 집으로 데려 오지만, 그녀는 다시 르네에게 돌아간다. 




피오나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가 싶었던 르네는 돌멩이에 자신을 매달고 등대에서 삶을 마감하려고 한다. 그 때 등장한 피오나. 르네와 피오나는 요트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들의 뒤를 필사적으로 쫓는 쥘리앵, 과연 이 얽히고설킨 그들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도미니크 아벨과 피오나 고든은 브루노 로미와 함께 연기는 물론, 직접 연출까지 맡았는데 그들은 내러티브 보다는 마임이 중심이 되는 행위의 미장센에 더 초점을 맞춘다. 하염없이 긴 롱테이크와 결합된 주연 배우의 연기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쥘리앵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피오나가 바닷가 마을에서 채소에게 물을 주는 장면을 보면, 르네가 바닷가에서 죽은 애인에게 줄 꽃다발을 들고 그녀 앞에서 몇 번이고 망설이고 화면을 들락날락하는 장면은 오해와 동시에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잘못 읽은 콘텐츠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관객의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다. 다시 화면에서 사라졌다가 등장해서, 비석을 껴안고 울부짖는 르네, 애달픈 감정의 고갱이가 바로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마을의 식당에서 르네를 발견한 쥘리앵은 가차 없이 그를 구타한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자신의 사랑만큼은 양보할 수 없노라는 보통남자의 진심이 느껴진다. 정말 피오나를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 가겠다는 작정이다. 옥신각신 끝에 바다에 빠진 두 남자가 구명정 하나를 잡고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장면은 참 가관이었다.

한편, 피오나는 자신이 동경하던 ‘빙산’을 찾기 위해 르네와 무작정 떠나지만 그를 잃고 만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다시 빙산을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빙산과 조우하게 된 피오나, 하지만 빙산이 녹으면서 그녀를 다시 현실세계로 복귀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 삼각관계 이야기를 브루노 로미 트리오는 잘도 풀어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과 매너리즘에 빠진 관계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피오나는 홀가분하게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찾고, 갯벌에서 흥에 겨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쁜 감정에 빠져 진흙에 엉망진창이 되면서도 즐거워한다. 연출자들이 말하고 싶었던 건 바로 그런 감정이 아니었을까. 물론, 피오나의 남편 쥘리랭의 눈물겨운 순애보도 빼놓을 순 없다. 늘 하는 말이지만, 좀 있을 때 잘할 것이지.

불어를 좀 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이 영화를 보면서 딱 하나 그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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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엄마 찬양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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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전작주의에 도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명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새로운 책 <새엄마 찬양>이 출간됐다. 지난겨울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가 나왔다는 소식에, 그날로 총알 배송을 해서 단숨에 읽어 버렸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우연히 <새엄마 찬양>이 나왔다는 소식이 비슷한 코스를 거쳐서 읽었다. 해체된 가족의 흐뭇한 회복을 예상케 하는 제목과는 달리 발칙하고 도발적인 바르가스 요사의 신화와 그림 이야기 그리고 에로티시즘을 적절하게 반죽한 <새엄마 찬양>은 모름지기 글쓰기는 이래야 한다는 전범(典範)처럼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페루의 아레키파 출신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십 대의 끝 무렵에 자신보다 무려 13살이나 나이가 많은 훌리아 아주머니가 결혼해서 가족을 경악시키기도 했던 범상치 않은 커리어의 보유자다. 타고난 작가인 그가 이 좋은 소설의 소재를 그대로 썩힐 리 있겠는가.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라는 제목으로 1950년대 페루 라디오 방송국을 휩쓸었던 드라마 열풍과 자신의 러브 스토리를 조합한 창작을 선사한 바 있다. 1957년부터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바르가스 요사는 1990년에 페루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 중에서 그만큼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경험한 작가도 많지 않을 것 같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리고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계의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새엄마 찬양>(Elogio de la madrastra)을 1988년에 발표했다. 이 책에 실린 모두 14개와 하나의 에필로그는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중층적으로 연계되어 있어, 에로틱한 상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은근하면서도, 때로는 도발적이고 발칙하기까지 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글에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아내를 잃고 최근에 새장가를 든 리고베르토 씨, 그의 새로운 여신이자 삶의 활력소인 루크레시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의붓아들 알폰소(폰치토)가 <새엄마 찬양>의 세 주인공이다. 이 세 명의 캐릭터는 제 나름대로 선이 굵은 특징을 독자에게 선보인다. 우선 아버지 리고베르토 씨는 일주일에 매일 자신의 신체 부위를 사랑하는 마음에 세정식이라는 이름의 일면 경건해 보이는 의식을 엄숙하게 진행한다. 그의 이 의식은 자신의 에로틱한 상상에 불을 지르는 음화를 몰래 보면서 새로 얻은 아내와의 뜨거운 밤에 대한 즐거운 상상에 전초전이다. 리고베르토 씨는 이제 막 마흔 살이 된 아내 루크레시아의 둔부, 특히 궁둥이에 대해 리디아의 왕 칸다울레스 만큼이나 주체할 수 없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뭐 여기까지는 좋다, 법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상상일테니까.

문제는 당장에 죽을 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주변의 나방을 유혹하는 듯한 아름다움의 화신 루크레시아다. 완전하게 실패로 끝난 첫 번째 결혼의 트라우마를 가진 그녀에게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알폰소의 존재는 껄끄럽기만 하다. 하지만, 폰치토의 거침없는 새엄마를 받아들이겠다는 사랑 고백으로 한시름 놓는다. 그러던 어느날, 하녀 후스티니아나의 어처구니 없는 고변을 듣고 루크레시아는 충격에 빠진다. 어린 천사 같은 얼굴의 폰치토가 자신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 본다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리에, 루크레시아는 후스티니아나의 고발을 애써 무시한다. 사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인 법, 폰치토의 가늠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를 알게 된 그녀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뒤범벅이 된 가운데 미래에 파국을 불러올 관능의 고갱이를 뽑아 올린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대로 이야기는 점점 그 흥미를 더해간다.

리고베르토 씨와 루크레시아 그들이 얽힌 삼각관계에 정점을 찍는 것은 바로 아들 폰치토다. 책을 읽으면서 놈은 천사의 얼굴을 한 타락천사 루시퍼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됐다. 제목만 보고 파편화된 가정의 화목한 재구성을 상상했었는데, 이야기는 그 반대로 치닫기 시작한다. 결국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아버지와 아들의 파워게임은 이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의 치밀한 계산과 조종에 의해 일탈을 거쳐 파국을 정조준한다. 은밀한 에로티시즘의 행복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권력의 본질을 슬쩍 건드린다. 캐릭터 중에서도 특히 공을 들여서 창조해낸 폰치토는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철저하게 통제한다. 이 오만한 녀석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경이롭다 못해 외경감이 들 정도다.

훔쳐보기 다시 말해서 관음증(voyeurism)으로 시작된 관능에로의 유혹은 아슬아슬한 경계마저도 훌쩍 뛰어넘는다. 요즘 한창 유행인 막장드라마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자제의 울타리를 부순 주체할 수 없는 관능은 활화산에서 지금 막 터져 나온 용암처럼 뜨겁게 분출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금기(taboo)는 깨어지기 마련이고, 그럴수록 더 자극적이지 않은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바로크 혹은 로코코 양식의 회화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의 본질을 해석하고, 전설과 신화의 이야기를 들줄과 씨줄로 엮어서 명징하면서도 곤욕스러운 중층적 텍스트를 빚어낸다. 그렇게 얼기설기 짜인 텍스트의 이중성(duality)은 참 매혹적이다. 손대면 그 빛나는 아름다움에 타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 정도로.

<새엄마 찬양>의 고갱이는 은근한 즐거움으로 귀착된다. 너무 재밌어서 당장에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또 한편으로는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에로티시즘 미학이 주는 당혹감 때문에 주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양가적 감정이 상충하는 <새엄마 찬양>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에, 번역을 맡아준 송병선 교수의 깔끔한 번역까지 어우러져 그야말로 최고의 재미를 선사해줬다. 초강력 슈퍼울트라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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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트 로커 - The Hurt Lock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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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를 하기에 앞서 솔직히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은 하지만, 영화 포스터에서 말하는 대로 “전 세계를 전율시킨 위대한 걸작”급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최우수 감독상으로 연출을 맡은 캐서린 비글로우가 전 남편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문제작 <허트 로커>를 이제야 보게 됐다.

70년대 월남전이 미국에게 큰 상처를 안겨 주고, 영화소재로 줄창 우려먹게 했다면 새로운 천년에 비슷한 역할을 이라크 전쟁이 맡게 됐다. 이제 더 이상, 미국의 명분도 없는 비도적적인 전쟁의 발단과 원인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허트 로커>에서는 그렇게 이라크에 파견된 폭발물 처리반에 대한 일상을 그린다.

최첨단 시대의 전쟁답게, 군인이 직접 폭발물에 접근하지 않고 로봇을 사용해서 폭발물을 점검하는 영화 초반부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땅개가 고지에 깃발을 꽂아야 비로소 전투가 완료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결국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은 사람이 해야 한다. 로봇이 끌고 가던 폭발물 수레바퀴가 부서지자 브라보 중대 폭발물 처리반의 톰슨 하사가 직접 방호복을 입고 현장에 투입된다. 거의 완료하고 돌아오려는 순간, 이라크 저항군으로 보이는 거수자가 핸드폰으로 폭발물을 날려 버린다.

현장에서 폭사한 톰슨의 후임으로 윌리엄 제임스 하사(제레미 레너 분)가 부임되어 온다. 그는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샌본 병장(안소니 마키 분)과 스페셜리스트 오웬 엘드리지(브라이언 게러티 분)와 함께 이라크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탄 테러 처리에 나선다.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는 왜 저항군들이 미군에 저항하기 위해 폭발물을 설치하고 저항에 나서는지에 대한 이유를 캐기 보다는 그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일반 병사들의 순찰도 그렇지만, 항상 죽음의 위험이 도사린 폭발물 처리반의 엄청난 스트레스 가운데서도 제임스 하사의 일견 무모해 보이는 도전에 샌본 병장은 분노의 주먹을 날린다. UN 건물 앞에 이중으로 교묘하게 설치된 폭발물을 솜씨 좋게 처리해낸 제임스를 찾은 대령은 그의 노고를 치사한다. 아프간에서부터 자그마치 837건에 달하는 폭발물 처리 기록은 아무나 세우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부대 앞에서 짝퉁 DVD를 파는 이라크 소년 베컴과 친해진 제임스는 소년과 축구를 하며 내기를 하기도 한다. 한편, 제임스의 팀원인 엘드리지는 톰슨 하사의 죽음에 자신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군의관 존 캠브리지(크리스찬 카마고 분)는 엘드리지에게서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제임스 팀은 작전 중에 현상수배 중인 이라크 포로들을 잡은 일단의 용병들을 만난다. 타이어가 펑크났다는 팀 리더(랄프 파인즈 분)의 말을 듣고 그들을 돕던 중에, 보이지 않는 이라크 저항군 저격수의 총격을 받고 3명이 KIA(killed in action) 당한다. 저격용 총인 바렛으로 그들을 소탕하는데 성공한 제임스와 샌본 그리고 엘드리지는 비로소 팀으로 서로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계속되는 임무 중에, 군의관 존 캠브리지도 작전에 함께 합류하게 된다. 제임스는 어느 버려진 건물에서 인간폭탄으로 사용되기 위해 죽은 소년 베컴을 발견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항군의 교묘한 위장 폭탄으로 존 캠브리지가 폭사하고, 그의 헬멧만이 나뒹군다. 제임스는 베컴의 복수를 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가지만 다음날 다시 부대 앞에서 베컴을 만나고 자신이 죽은 소년과 베컴을 착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 작전에서 원격으로 폭발을 유도한 저항군을 잡기 위해 무모하게, 적진에 뛰어 들었다가 엘드리지가 다리에 총을 맞게 되고 또 마지막 미션에서는 인간폭탄이 된 이라크 민간인을 구하려다 죽을 뻔하기도 하면서 샌본은 더 이상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365일 로테이션을 마치고 이혼한 와이프와 아들에게로 돌아온 제임스는 다시 이라크를 찾는다.

역설적이지만 적어도 독재자 후세인의 통치 하에서는 이 정도로 극심한 혼란을 겪지 않았던 이라크는 미국의 침공 이래 거의 내전에 가까운 수준의 폭력이 일상화되었다. 미군을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인식한 저항군의 끊이지 않는 총격과 폭탄공격에 민간인을 비롯한 미군의 인명 손해는 날로 치솟고 있다. 이라크에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는 미국의 공언은 공염불이 되어 버렸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출구전략을 세우겠다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대선공약 역시 요원하기만 하다.

극심한 사회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세계 2위의 원유대국이 물자부족으로 시달리는 이라크의 참담한 현실 대신 캐서린 비글로우는 현지 미군의 일상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미군 험비 차량에 돌을 던지는 이라크 아이들의 모습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다. 잘못 시작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성찰 대신 국가와 할리버튼  같은 군수업체를 위해 오늘도 이라크에서 피 흘리고 있는 미군 병사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반전 메시지를 던지려고 했던 걸까? 하긴 연출자가 누구나 다 마이클 무어처럼 노골적일 필요는 없을 테니까.

진짜 메시지는 집에 돌아온 제임스가 아들래미를 얼르면서 한 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장난감이나 동물인형 같은 것에 반응하는 아들을 보며, 어렸을 적에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들이 참 많지만 자신처럼 나이가 들게 되면 그런 의미 있는 것들은 한두가지로 줄어 들게 된다고. 제임스 자신처럼, 가족이나 따분한 일상보다도 전쟁에 미친 전쟁광(warmonger)에 더 동정을 하게 된다고 암시한다. 그리고 가족을 뒤로 하고 다시 군복에서 방호복으로 바뀌면서 폭발물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전체보다는 다시 한 번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그네들의 관점이 부러웠고, 반전 메시지를 담은 영화가 인정받는 현실은 더 감명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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