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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별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평점 :
이번 달에 열린책들에서 로베르토 볼라뇨 전집 시리즈로 잇달아 출간되고 있는 <부적>과 <먼 별> 두 권이 나왔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과 <칠레의 밤>에 이어 이 두 책도 단박에 다 읽어 버렸다. 앞으로도 9권의 볼라뇨 책이 출간 대기 중이라고 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배어나는 그의 책이 기대된다. 다만, 대중적이지 않은 게 흠이라고나 할까. 난 개인적으로 로베르토 볼라뇨의 팬이 되어 버려서 전작주의에 도전하겠지만.
<부적>에서 볼라뇨 자신이 살았던 멕시코로 잠시 문학적 외유를 떠났던 작가는 <먼 별>로 다시 조국 칠레로 복귀를 선언한다. 이미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의 마지막 장에서 선보였던 이야기를 확대한, 영화로 치자면 스핀오프 형식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먼 별>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의 얼터 에고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아르투로 벨라노가 화자로 등장한다.
칠레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1973년 9월 11일 전, 남부 콘셉시온에서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라는 이름의 독학생에 대한 소개로 소설 <먼 별>은 시작한다. 후안 스테인이 운영하는 시 창작 교실에서 그를 알게 된 ‘나’의 서술이 이어진다. 나와 죽마고우 비비아노 오리안은 창작교실의 스타 가르멘디아 자매와의 친교 때문에 그를 운명적으로 질투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잔잔하게 고백한다. 십 대 소년의 치기라고나 할까.
자유로운 삶이 절정에 달했을 때,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고 ‘탈주’가 시작된다. 이제 루이스 타글레에서 소설의 주인공 카를로스 비더로 진화한 연쇄살인범은 가르멘디아 자매와 그들의 이모를 끝장내고 잠적해 버린다. 한편, 쿠데타 이후 체포되어 임시 수용소에 갇혀 있던 나는 누군가 메서슈미트를 몰고 공중에 시를 쓰는 기발한 퍼포먼스를 목격한다. 그것도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창세기를 비행기에서 발산하는 연기로 쓰는 것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하신 FIAT LUX(빛이 있으라)가 창공에 아로새겨진다.
여기서 로베르토 볼라뇨는 다시 나중에 <칠레의 밤>에 등장하게 될 이바카체 신부의 평론 활동을 짚어준다. 바로 이 재미일까? 자신이 발표하는 작품에 교차해서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이 반갑기만 하다. 언제나 정력적인 활동가로 온갖 무모해 보이는 혁명의 대오에 앞장섰던 후안 스테인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주인공이 될법하다는 벨라노의 평이 이어진다. 그와는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디에고 소토는 생면부지의 남을 돕기 위해 나섰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그와 함께 소개된 페트라 이야기는 더 기묘하면서도 흥미를 자극한다.
쿠데타 이후 공군 중위의 타이틀을 달고 양지의 세계로 화려한 부활을 한 카를로스 비더의 기이한 행적이 이어진다. 예술이기보다는 곡예에 가까운 그의 비행 시 퍼포먼스와 파티장에서 자신이 개입한 끔찍한 사건에 대한 사진 전시회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하지만, 카를로스 비더는 종적을 감추고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범죄자라는 낙인이 아니라 오히려 미지의 예술가라는 칭송과 전설이 태동한다.
다시 아벨 로메로라는 전직 경찰관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를 매우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세계에서 영국 경찰에 버금가는 뛰어난 조직으로 칠레 경찰을 꼽는데, 문득 볼라뇨와 같은 나라 출신인 루이스 세풀베다의 단편소설 <악어:야카레>가 떠올랐다. 칠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후원자로부터 거금을 받고 신분을 감추고 계속해서 활동 중인 카를로스 비더를 찾아내라는 밀명을 받은 로메로는 벨라노를 찾아와 그의 행적을 수소문한다. 그들은 과연 꼭꼭 숨은 카를로스 비더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볼라뇨 전집을 앞두고, 볼라뇨에 대한 <버즈북>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워밍업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처음 접했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같은 유머보다는 문학과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글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먼 별>도 초반에는 그야말로 까끌까끌한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카를로스 비더라는 인물의 행적을 좇는 추리물로 전환된다. 그리고 화자 벨라노처럼 나도 본격적으로 책에 몰입되기 시작했다.
사실 소설의 곳곳에서 줄줄이 등장하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칠레 출신 문인들의 이름 행진에 그만 주눅이 들었다. 그만큼 칠레라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FTA를 맺고 있을 정도로 굉장히 가까우면서도 문학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반증이 아닐까. 로베르토 볼라뇨 전집을 통해 좀 더 칠레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로베르토 볼라뇨는 자신의 작품에서 뚜렷한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칠레의 어두운 과거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그런 차원에서 권력에 부합해서 고문과 살해를 저지른 카를로스 비더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할 대상이다. 작가 자신의 얼터 에고로 작용하는 아르투로 벨라노는 이제 더 이상 악당이 해악을 끼치지 않으니 그냥 내버려 두자고 로메로에게 말한다. 그는 우회적으로 과거와의 화해를 종용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작가는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과거는 이미 다 알고 있을 테니, 나머지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는 것일까? 작가가 그렇게 탈정치를 노래 부르지만, 굳이 정치적 연결을 하는 나는 우매한 독자인가 보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호흡이 짧은 볼라뇨의 글을 읽어 왔는데, <야만스러운 탐정들>이나 <2666> 같은 메가톤급 대작들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기만 하다. 어쨌든 나의 로베르토 볼라뇨 도전기는 순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