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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랑 ㅣ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11
윤이형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12월
평점 :

나는 어쩔 수 없는 꼰대인가 보다. 윤이형 작가의 <설랑>을 읽으면서 주인공 한서영과 최소운의 사랑 타령을 보면서 계속해서 헤테로섹슈얼리티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화급하게 체할 것처럼 빠진 줄거리에 몰입하다 보니 누가 여자고, 누가 남자지? 뭐 이런 생각에만 집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둘 다 여자다. 한 명은 레즈비언이고, 다른 한 명은 바이섹슈얼이란다. 허허, 스토리가 어디로 가는건가 그래. 설상가상으로 <언더월드>에나 나올 법한 라이칸(늑대인간)까지 등장한단다. 그렇다면 장르물인가?

로베르토 볼라뇨를 좋아하시나요?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과감하게 예설!이라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쌍방 간에 작가와 팬으로 기묘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여인이 술잔을 나누며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야말로 소설 <설랑>에서 내가 단연 최고라고 생각하는 장면이다. 이제 막 독서클럽에 입문한 소녀감성 같은 설정이긴 하지만 우리 같은 책덕후들에게는 그야말로 절정의 로맨틱한 장면이 아니던가. 선수들은 선수들을 알아 본다고 상대방이 쓴 글로 상대방이 좋아하는 작가군을 추정해 가는 장면, 아 정말 압권이었다. 그렇다, 나는 줄리언 반스는 좋아하지 않지만 로베르토 볼라뇨는 정말 좋아한다. 다만 어느 책을 골라 시작하느냐에 따라 진입장벽이 문제가 될 거라고 경고장을 발부하고 싶다. 난 운이 좋은 편이었다.
참참, 자꾸만 이야기가 곁다리로 새는 구나. <설랑>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말이다. 한서영은 보름달이 뜨면 라이칸, 그러니까 늑대인간으로 변한다. 다만, 꿈속에서만. 그리고 사랑에 빠진 상대방을 난폭하게 잡아먹고 글을 쓴다. 그러지 않고서는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는 저주에 빠졌다. 그만큼 글쓰기가 어렵다는 은유일까. 어쨌든 당연히 자신보다 세 살 적은 최소운와 사랑에 빠진 뒤로는 글을 한 줄도 못쓰고 있다. 반면 연인 최소운은 사랑의 힘으로 엄청난 글을 생산해낸다. 수일만에 천 페이지씩, 관계는 가감하는 보합이라는 설정이려나.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좋은 세상이다. 책에 나온 노르웨이 혼성 3인조 디사운드(d'Sound)의 <If You Get Scared>도 유튜브로 해서 들어 보았는데 아무래도 상쾌발랄하긴 하지만 잘 모르는 곡이라 그런지 감흥은 그닥. 그럼 이제 서영의 라이칸 증세를 억제하기 위해 소운이 심은 투구꽃에 대한 나무위키 정보를 검색해 봐야 하나. 왜 이렇게 곁다리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지 모르겠다. 아, 검색해서 찾아보니 바로 시간차공격으로 보름달을 피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구만 그래. 그러니까 늑대인간에게 보름달만 보여주지 않으면 된다는 거구만 그래. 난 그것보다도 예전에 텔레비전 시리즈로 방영된 <늑대미녀>(She-Wolf of London 혹은 Love and Curses) 떠올라서 내친 김에 그것도 찾아봤다. 분장이 왜 이리도 유치해 보이는지.
그 다음 서사는 좀 진부하다. 작가 부모에게 버림 받은 아이 서영은 글쓰기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렸다. 그리고 어려서 방문했던 자연사박물관에서 만난 얼치기 박제사가 만든 늑대박제 때문인지 어쩐지 예의 라이칸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 내용이 나를 설득시킬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닌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저런 일들을 극복하고 두 사람은 사랑을 이어간다는 내용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메인 서사보다 자꾸만 소설을 완성해 가는 와중에 만난 주변부에 눈길이 간다. 서영과 소운의 좋아하는 소설가 이야기가 그랬고, 디사운드의 노래가 그랬으며 나무위키에서 찾은 라이칸의 흉폭해지는 것을 막는다는 투구꽃 등등... 진지한 소설이라기 보다 <스틸 라이프>라는 장르물에 집중하던 서영이 로맨스를 쓴 것처럼 그렇게 가볍게 읽으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