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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스 형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어떤 책을 만나면 만사 제쳐 두고 그 책부터 읽어야 하는 책들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지난 주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신간 <버지스 형제>가 나에겐 그런 책이었다. 책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영어로 된 리뷰들을 찾아 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투브로 저자의 대담이 담긴 동영상도 찾아봤는데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소설은 메인 주의 셜리폴스를 떠나 뉴욕에서 형사사건 변호사로 성공한 버지스 가의 두 형제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특히, 짐 버지스는 부유한 유산을 물려받은 헬렌과 함께 세 명의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그야말로 모든 이가 선망하는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정된 직장과 월리 패커를 변호하면서 얻게 된 드높은 명성,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소득 그리고 아내 헬렌이 정성들여 꾸미는 브루클린에 자리잡은 정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다. 반면 같은 변호사이지만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법류보조원(legal aid)인 동생 밥은 아이도 없고 처량하게도 한때 사랑해 마지 않았던 아내 팸과 이혼한 상태다. 그럭저럭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가던 버지스 형제에게 큰 위기가 휘몰아 닥치는데 그것은 고향 셜리폴스에 남은 밥의 쌍둥이 동생 수전의 아들 재커리 올슨(19세)이 이슬람 모스크에 얼린 돼지머리를 던져 넣은 인종범죄 사건이 전국적인 매스컴을 타면서 시작된다.
코네티컷 출신 헬렌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시누이 수전의 일에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런 모습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녀와 달리 ‘조카 일병’을 구해야 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버지스 형제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믿음직한 삼촌 짐은 자신이 직접 나서는 대신 유능한 지역 변호사를 고용해서 조카의 변론에 나서고, 만날 얼뜨기라고 부르는 동생 밥을 셜리폴스에 파견한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멍청이 행세로 대중의 동정을 받아야 하는 판에 자신을 구하기 위해 도착한 밥 삼촌에 의지해서 히죽거리는 사진이 대중에 노출되면서 사건을 악화시킨다.
작가는 버지스 집안의 내밀한 사건들에 접근하는 한편, 지독한 내전을 피해 셜리폴스에 살기 시작한 소말리족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같은 무게로 다루고 있다. 시리아 내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험난한 지중해 바다를 건너 오늘도 꿈과 희망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유럽으로 향하고 있지만, 이미 안전과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진 민족의 디아스포라는 오래 전에 시작됐다. 문제는 새로 이주해온 이방인들이 원래 살던 사람들과는 다른 피부색, 종교 그리고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9-11 테러 이래,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이방인들에게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으로 빗장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셜리폴스에 터전을 잡은 소말리족들이 미국을 그들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시 고향인 모가디슈로 돌아갈 궁리만 한다는 일부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 소말리족들의 전통인 여성 할례를 여성의 성적 결정권을 중시하는 미국 사회에서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난민들을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들을 자신들의 사회에서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실을 작가는 정말 리얼하게 그려냈다.
다시 버지스 형제 이야기로 돌아가 삼남매는 모두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어이없는 죽음 때문에 발생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원인제공자였던 밥은 어려서부터 잘난 형의 온갖 구박을 들으며 살아야했다. 물론 이렇게 좋은 소설적 ‘장치’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는 소설의 후반에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해 두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던 잭은 왜 그렇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증오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단 말인가? 수전과 이혼하고 스웨덴으로 떠나 새살림을 차린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살가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수전의 트라우마가 유전된 게 아닐까. 험난한 세상으로부터 자식을 지켜 주어야할 아버지라는 존재의 울타리는 처음부터 없었고, 삼촌들마저 멀리 뉴욕에서 자신들의 커리어를 쌓는데 정신이 팔려 고향땅을 등지지 않았던가.
모두가 대도시의 화려한 삶을 구가하며 고향을 떠나는 장면은 동서양이 따로 없는 모양이다. 변변한 일자리도 없고, 칙칙한 모습의 고향에 진저리를 치는 버지스 형제의 모습이 수도권 집중화라는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네 그것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해결사를 자처하며 고향에 돌아온 짐이 오히려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경범죄로 처리될 수도 있을 잭의 문제가 짐이 셜리폴스의 지역인사들(시장과 지방검사)을 자극하면서 기소처리되고, 연방검사가 개입할 정도로 사건이 확대된다. 동시에 완벽해 보이던 짐과 헬렌의 사이에도 균열이 가면서 파경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2006년 7월 3일, 미국 메인 주의 루이스턴에서 브렌트 매튜스라는 청년이 실제로 저지른 증오범죄에서 소설 <버지스 형제>의 주요한 모티브를 따왔다. 실제 사건은 매튜스의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소설에서는 완벽할 수 없는 가족의 봉합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의 행복은 스스로 찾는 것이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자수성가했지만, 어떤 방식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본질적 행복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이야기를 작가는 훌륭하게 이끌어낸다. 새로운 밀레니엄에서 즈음해서도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말리족의 가족에 대한 관념과 느슨하기 짝이 없는 미국식 가족 제도를 비교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요즘 소송 같은 사법 제도가 등장하지 않는 미국 소설을 보기 힘들 정도인데, 작가로 데뷔하기 전 로스쿨에 다녔다가 중단하기를 반복했다는 작가의 경력도 이번 소설에서 빛을 발했다. 부유하고 부족할 것 없는 미국 사람들은 비관용적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탕아 잭을 용서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어리석은 증오범죄를 저지른 소말리족의 원로였다. 구체적으로 이게 옳다는 식의 제안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작가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용서와 화해 그리고 관용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답게 정교하면서도 촘촘하게 짜인 내러티브(작가는 스스로를 slow writer라고 표현했다)를 바탕으로 해서, 가족 간의 갈등 그리고 미국에 살게 된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점에서 <버지스 형제>를 수작으로 꼽고 싶다. 전작 <올리브 키터리지>에서도 그랬듯이 밉상으로 보이던 캐릭터(이번 작품에서는 명백하게 짐 버지스였다)에게 애정을 갖게 만드는 기법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본능에 반해서 글을 쓰라’는 작가의 조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