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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75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평점 :

지난 주에 노벨문학상 발표를 듣고 나서 집 안에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려 가면서. 분명 몇 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모두 해서 어섯 권의 책을 찾아냈다. 그 중에 네 권을 읽지 않았더라. 좋아해야 하나. 그중에서 모던클래식 중에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인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골랐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 다른 책으로 읽기 시작했다면, 그렇게 열심히 장기간에 걸친 연휴 기간 동안에 이시구로 선생의 책에 몰입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리고 모던클래식은 왜 지난 2년 동안 멈춰 있는 거지. 민음사는 자신들이 이시구로 선생을 발굴해서 번역해 냈다고 자랑하면서 노벨문학상 특수를 맞아 증쇄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반성 좀 하시지. 자본이 모든 것에 우위를 차지하는 도금주의 시대에 출판사 탓만 할 건 아니겠지만.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이번에 새로 읽어낸 다섯 권의 책 중에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맨부커상에 빛나는 <남아 있는 나날>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이 좋다. 남태평양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패전한 지 어언 3년이 흐른 1948년 10월, 소설은 시작된다. 화단에서 은퇴한 오노 마스지 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스기무라 아키라의 대저택을 인수해서 조용하게 은퇴해서 살던 오노 씨의 숨겨진 비화들을 하나둘씩 밝히는 방향으로 소설은 흘러가기 시작한다. 결혼으로 출가한 세쓰코가 아들 이치로를 데리고 친정을 방문한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혼기에 다다른 둘째딸 노리코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상인 집안 출신의 오노 씨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주판알 튕기는 일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그림 그리기가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그 분야에 투신하기에 이르렀다. 다케다 장인 밑에서 거의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 그림 찍어내는 속도로 작업을 하며 도제 생활을 하던 오노 씨는 서양화를 일본화에 도입하려는 노력에 맹진하던 스승 세이지 모리야마의 휘하에서 새로운 출발을 도모한다. 술과 여흥 그리고 쾌락으로 점철된 ‘부유하는 세상’을 그리던 시절도 있었다.
이시구로 선생이 즐겨 사용하는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 기법이 소설의 전반을 아우른다. 자신이 이룬 성취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며 지내오던 오노 씨는 어느 순간, 그런 삶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계기는 혼기에 다다른 둘째딸 노리코의 혼담이 깨지면서였을까. 인근 가와카미 여사의 주점에서 쟁쟁한 후학들을 거느리고 잦은 술자리를 가지던 오노 씨의 주변인사들도 하나둘씩 존재를 감추기 시작했다는 것도 잊지 말자. 전후 구질서의 해체를 목도하게 된 은퇴한 거장은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기묘하게 생각했던 점 하나는 고풍스러운 스기무라 저택에 왜 대단한 성취를 이룬 오노 씨의 그림이 하나도 없을까하는 점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그런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솟기 시작한다. 혼담을 진행하는 가운데, 탐정을 고용해서 상대방 집안에 대한 조사를 하는 장면도 좀 우스웠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는 맏딸 세쓰코가 상대방 쪽에서도 탐정을 고용해서 자기 집안 내력을 조사해 볼 것을 고려해서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이시구로 선생은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오노 씨의 미심쩍어 보이는 과거행적에 대한 이런 갖가지 복선 같은 장치들을 배치하는 섬세함을 구사한다.
잠복해 있던 갈등은 전쟁 중에 만주에서 전사한 맏아들 겐지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면서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전전세대를 대표하는 오노 씨와 전후세대의 상징으로 직접 불의한 전쟁에 참여했던 사위 슈이치가 정면충돌하는 장면은 그래서 흥미롭다. 노리코와의 혼담이 깨진 미야게 청년과의 대화도 같은 연장선상에 서 있다. 여전히 다수의 일본인들은 태평양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오노 씨의 주장은 조국이 벌이는 전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자기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 절반이 전사했다고 말하는 슈이치는 어리석은 대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정작 죄인들은 무사태평하게 새로운 시절을 맞아 호의호식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세대들이 목청껏 외쳤던 대의에 의거한 정의란 말인가. 일본계 이시구로 선생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많은 나가사키 시민들에게 과연 이시구로 선생의 책은 읽어 보았는지 묻고 싶어졌다. 슈퍼마리오 코스프레 아베는 물론이고.
소설은 중반을 넘어가면서 오노 씨가 전쟁 중에 어떤 일을 하면서 성취를 이루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은 인사가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독자에게 알려주기 시작한다. 마쓰다 치슈에서 포섭되어 국무성의 예술 위원회 일원으로 만주 위기에 즈음해서 퇴폐적인 성향의 그림을 그리던 모리 스승의 곁을 떠나 본격적으로 부역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일왕에게 충성하고,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활약을 고무하는 예술이라기보다 추악한 정치적 선전선동에 가까운 그림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모든 이들의 칭송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부역 예술가는 전쟁이 끝나면서 반강제로 은퇴를 하게 된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위대한 조국의 예술혼으로 떠받들어지던 화가가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물론 <창백한 언덕 풍경>에서도 비슷한 정황이 등장한다. 전작에서 오가타 상이 반성하지 않는 일본 구세대의 대변인으로 등장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좀 더 나아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오노 씨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 딸 노리코의 혼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상견례장에서 억지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이 소설의 핵심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같은 패전국이지만 독일과 상반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본의 오늘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 강요에 의한 억지 사과, 이런 자세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아베 정권의 일본이 경제적 풍요 덕분에 부러움을 살지 몰라도, 존경받는 나라는 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 과거는 잊고 미래로 나가자고 외치고 있지만, 그 미래는 과거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제대로 된 과거청산 없이 미래만 외쳐대는 게 얼마나 허망한지 우리는 누구보다 역사를 통해 혹독하게 배우지 않았던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다 보니 문득 이모 작가의 <고시조>가 연상됐다. 예전에 참 그 소설을 좋아했었지. 순수한 예술에 목말라 하던 예술가가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그렇게 애타게 찾던 가릉빈가를 만나게 되었던가. 지금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그런 작가가 되어 버렸지만. 그의 영락한 모습에서도 보듯이 모름지기 예술가로서 진정한 용기란, 과거의 시대착오적인 행적과 잘못된 판단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