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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래 책은 사서 읽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책 중에서 읽는 법이지. 소설가 김영하 씨가 인문 예능프로그램을 표방하는 <알쓸신잡>에서 한 말쌈이다. 게다가 그가 프로그램 중에서 언급한 프랑수아 사강의 케이스를 들며 말한 자신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내가 마침 서가에 가지고 있어서 집어 들었다. 그게 딱 한 달 전이었다. 백쪽 조금 넘는 분량이라 금방 읽겠지 하는 얄팍한 계산으로 달려들었는데, 조금 읽다 말고 완독에는 실패해서 어제 새벽에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를 읽고 나서 재도전에 나섰다. 읽은 지점부터 읽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래봐야 처음부터 읽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아 부담이 적어 다행이었다.
소설의 스토리보다 나는 소설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갔다.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 클림트의 <유디트> 그리고 백제 의자왕 혹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와 비슷한 경로를 겪은 바빌로니아 왕 사르다나팔의 이야기에서 작가는 죽음의 페이소스를 뽑아낸다. 소설 속 화자는 죽음의 안내자다. 오독이어도 상관 없다면 읽은 책을 다시 펴보지 않고 리뷰를 써보련다. 항상 하는 말처럼 책은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에게 읽히는 순간, 또다른 항해를 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소설 속 화자는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의뢰인들을 찾아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는 그들을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킬러인가? 직접 행위에 나서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를 킬러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 다음 그는 의뢰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여행을 떠난다고 했던가. 탄생이 내 의지는 아니지만, 그 반대인 소멸 다시 말해 죽음은 얼마든지 선택가능하다는 점에서 김영하 작가가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나”의 파괴할 권리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했다. 물론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는 아니지만. 죽음에 대한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 들여야 할까.
비디오 아티스트로, 그리고 총알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형제의 갈등에 끼어든 한 명의 여자 유디트(세연)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요란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유미미 모두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에게 의뢰를 맡긴다. 내게도 익숙한 과천-의왕 고속도로를 바람을 나는 듯이 달려가는 트랙의 레이서를 능가하는 실력의 총알택시 운전사의 고독과 회한 그리고 잘난 형에 대한 시기와 질투 등 다양한 감정이 날것 그대로 숨쉬는 것을 나는 느끼기도 했다. 형이 소중하게 여기는 나비 컬렉션을 태우다가 집에 불을 낸 것도 동생이었다. 형은 동생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생각 없이 앗아간다. 형제에게 팜므파탈처럼 보이는 유디트, 세연 역시 마찬가지다.
생일날 폭설이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달려 주문진으로 향하는 길에 나선 형과 유디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을 능가하는 낯설음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개별 캐릭터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극한의 속력까지 내달리는 총알택시를 운전하는 동생, 형제라는 관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유디트, 섬망 같은 이미지를 좇는 비디오 아티스트 형,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유미미 그리고 의뢰를 마치고 나선 비엔나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홍콩에서 온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화자에 이르기까지. 삶도, 죽음도 그들에게는 단지 선택의 문제였을까. 화자의 비엔나 에피소드는 영화 <비포어 선라이즈>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또 어느 장면에서는 최근에 읽고 있는 춘수 씨 장편소설이 떠오르기도 했고. 적어 놓았어야 했는데 미처 그러지 못해 망각 속으로 휘발해 버렸다.
엉뚱하게도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자신을 파괴할 혹은 소멸시킬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면 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그건 아니라며 결사반대에 나서야 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짧지만 강렬한 반향을 일으키는 그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읽게 된다면 또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