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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톰 포드 감독, 줄리안 무어 외 출연 / 미디어포유 / 2016년 8월
평점 :
한동안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책을 잡고 살았다. <베를린이여 안녕>으로 시작해서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싱글맨>에 이르기까지 국내에 출간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책은 모두 다 읽었다. 그래봐야 꼴랑 세 권 밖에 안되지만. <싱글맨>은 원서까지 구해서 번역판과 비교해 가며 읽기도 했다. 번역판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오역과 의역이 심해서 아쉬웠지만 원작가가 하고 싶었던 고갱이는 알아 들었으니 그 정도면 됐다 싶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원서에 한 번 도전해 봐야겠다. 그리고 나서 자연스레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최근 들어 거의 영화를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영화는 아주 많이 끌렸다. 탑게이 패션 디자이너로 죽어가던 구찌를 회생시킨 톰 포드가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그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첫 번째 연출작으로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자도 그렇고 감독 자신도 성적소주자이니 이 얼마나 훌륭한 조합인가 말이다.
이미 기존의 책 리뷰에서 <싱글맨>의 스토리를 다루었으니 아무래도 영화 리뷰는 원작과 영화의 비교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운명이다. 우선 영화는 원작에 상당히 충실한 편이다. 하지만 원작을 그대로 영화화할 수는 없었겠지. 영화는 또다른 창작의 세계 아닌가. 감독이 원작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은 과감하게 들어내고, 또 자신의 생각이 담긴 부분들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섬세한 감성을 가진 성적소수자답게 톰 포드는 슬로우모션 컷으로 주인공 조지 팔코너(콜린 퍼스 분)이 애인 짐(매튜 구드)이 죽고 난 뒤에 상실감을 멋지게 영상화하는데 성공했다. 원작에서처럼 영화에서도 조지의 파란만장한 하루를 그린다. 시대적 배경은 크리스마스를 한달 남짓 앞둔 1962년 11월 30일 금요일(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덴버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짐의 죽음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아마 소설에서는 짐이 오하이오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지.
자그마치 16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한 파트너 짐의 죽음 앞에 (영화 속에서) 조지는 모종의 결심을 한다. 사실 이 부분이 소설과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조지는 주변을 정리하고 자살을 결심한다. 소설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자살을 의미하는 권총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캘리포니아의 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조지는 메르세데스를 몰고, 바닷가에 자리 잡은 멋진 별장 같은 집을 가지고 있다. 기상하고 나서 일상의 조지로 돌아가는 과정은 소설의 흐름을 그대로 따른다. 잠깐 엿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의 일상을 일별하며 차를 운전해서 자신의 일터로 향하는 조지. 바로 이 장면에서 톰 포드는 슬로우컷으로 성적소수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거리가 얼마나 멀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관객에게 제시한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과 조지가 퇴근 후에 샬럿(줄리엄 무어 분)에게 사다 줄 술을 사러 가는 길에 만난 카를로스와의 담배피는 시퀀스가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톰 포드가 아니라면 도저히 잡아낼 수 없었던 그런 매혹적인 최고의 장면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아 하나 더 추가하자면, 자신의 일터인 대학에 도착해서 동료 교수와 이야기하는 동안 테니스를 치던 젊은 육체를 훑던 조지의 일별, 그건 어쩌면 주인공의 눈길이 아니라 카메라 연출을 지시하던 감독의 욕망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쉴새없이 떠들어 대며 쿠바의 미사일 위기를 말하는 동료 교수가 식구들과 함께 방공호에 지내는 모습을 상상하는 장면에서 감독의 유머감각을 얼핏 보기도 했다.
현재진행형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톰 포드는 조지와 짐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짐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지가 거의 정신이 나가 폭우 속에 샬럿을 찾아가는 장면 등의 플래시백으로 처리하는 컷은 일품이었다. 소설에서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공을 들여 조지의 상실감에 대한 심리묘사에 치중했다면, 톰 포드는 컷 단위로 이루어진 일련의 시퀀스를 통해 군더더기 없는 주인공의 심리를 간결하게 재현해낸다. 그게 바로 영화와 소설의 결정적 차이였을까. 굉장히 마음에 드는 신예 감독의 연출력이 아닐 수 없다.
소설에서는 정말 인상 깊었던 강의 장면은 영화에서는 상대적으로 아쉬웠다. 올더그 헉슬리의 소설 <After Many a Summer>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소수그룹에 대한 강의 내용으로 압축하고 건너뛰는 시퀀스는 소설의 참맛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대학 강의 시퀀스에서 충격적인 장면 하나는 교수님 바로 앞에서 대놓고, 그것도 강의 도중에 줄담배를 피워대는 로이스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대학 분위기가 자유롭다지만 아마 1960년대에는 그랬던 모양이지. 믿을 수가 없는 장면이었다. 한때 연적이었던 병실에서 죽어가는 도리스를 방문하는 대신 톰 포드는 리쿼 스토어에서 카를로스와의 만나 그리고 은행 방문으로 새로운 재창조했는데 나름 수긍이 가는 모디피케이션이 아니었나 싶다. 짐과 바위산 위에서 나누는 플래시백으로 처리된 대화도 마음에 들었다. 조지가 권총 자살을 연습하는 장면도 소설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부분인데, 침대 위에 침낭을 깔고 이런 저런 자세를 시도해 보는 장면이 웃프게 그려진다.
이즘에서 주인공들의 연기에 대해 품평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근 우리에게는 <킹스맨>의 비밀 에이전트로 비로소 널리 알려졌지만, 6년 전에 만들어진 <싱글맨>에서 그는 자신의 필생의 역작에 가까운 그런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느낌이다. 짐의 부고를 들었을 때, 보여준 그의 눈물 연기 그리고 폭우를 뚫고 샬럿을 집-내 예상대로 샬럿의 집에 대한 톰 포드의 공간설정은 정말 탁월했다-에 찾아가 오열하는 장면에 대해서 어떤 부연설명도 필요 없는 그런 절정의 연기를 보여 주지 않았던가. 샬럿의 집에 가서 춤추는 장면은 또 어떤가. 그동안 줄리언 무어가 연기를 그렇게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싱글맨>을 통해 그녀의 연기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짧은 분량에 등장하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시니컬하면서도 세상 희로애락을 한줄기 담배연기에 말아 허공으로 날려 보내는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조지의 제자 케니 포터 역을 맡은 니콜라스 홀트의 연기도 눈여겨 볼만하다. 전쟁이 끝난 1946년 조지가 짐을 처음 만난 스타보드 사이드 바로 술을 찾아간 조지는 케니를 만나게 되고 밤수영에 도전했다가 낭패를 당한다. 소설에 나오지 않지만 톰 포드는 이마에 난 상처를 케니가 치료해 주고자 밴드를 찾다가 짐의 누드 사진을 보고 중년교수의 비밀을 알게 되는 케니의 심리묘사를 예리하게 짚어낸다.
요즘 하도 영화를 보지 않아서 그런진 몰라도 영화 <싱글맨>은 기대이상이었다. 바로 직전에 원작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영화를 보면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다른 작품들도 빠른 시일 내에 번역돼서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원한 바람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