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 중세에서 근대의 별을 본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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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네이버 파워라이터 코너를 통해 소개되어 오던 주경철 교수님의 <유럽인 이야기> 그 첫 번째 이야기가 드디어 책으로 엮어 나왔다. 모바일 시대가 드디어 코덱스(책)이라는 구세계의 체험을 능가해 버린 마당에, 요즘 청년들에게 역사 지식도 재밌을 수 있다는 발상에서 글을 쓰셨다고 했던가. 나도 저자의 근대세계를 연 유럽인들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군더더기를 빼고 핵심적인 내용을 저술한 내용이 아주 섹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 왔지만, 이번 책은 정말 재밌게 느껴졌다. 앞으로 주경철 교수님의 역사저술 항해가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란다.

 

저자의 역사평설에 등장하는 첫 번째 주자는 잔다르크다. 아쉽게도 밀라 요보비치가 주연을 맡은 지난 밀레니엄 시절의 블록버스터는 물론이고, 고전 칼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도 보지 못한 무지한 독자에게 신의 목소리를 듣고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느닷없이 나타난 시골처녀의 무용담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시대전환기를 상징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잔다르크가 무용을 떨친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두 국가 모두 중세에서 벗어나 민족국가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였다. 잉글랜드군의 파상공세에 밀리던 프랑스 샤를 7세는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마침내 대륙에서 잉글랜드군을 소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렇게 샤를 7세는 자신과 자신의 왕국을 회복하는데 헌신적이었던 남장 소녀 잔다르크가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되어 화형에 처할 위기에 처했어도 소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다시 한 번 정치의 세계가 얼마나 냉혹하다는 사실을 잔다르크의 수난을 통해 체험할 수 있었다.

 

프랑스 방계 가문으로 플랑드르에서 지금의 룩셈부르크 그리고 부르고뉴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4대에 걸친 부르고뉴 공작들의 활약을 저자는 무협지에 비유하기도 한다.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면서도 독립을 추구하며, 백년전쟁에서는 잉글랜드 편에 서기도 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현재 민족국가 개념으로 볼 때, 적군 편에 붙은 민족배신자 개념은 아닐 거라고 저자는 설명을 붙인다. 무수한 정략결혼을 통해 영지를 넓히고, 프랑스 국왕의 섭정도 경험했으며 정적을 암살하는 등의 모습은 격동의 시절을 보는 듯한 기시감을 보여 주기도 했다. 마지막 공작이었던 담대공 샤를이 영지 통합을 위해 로렌공략에 나섰다가 전투에서 패배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는 장면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힐러리 맨틀의 <울프홀>에 등장하는 잉글랜드 국왕이자 6명의 왕비를 들인 호색한 헨리 8세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튜더 가문 출신으로 십대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무소불위한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이야말로 최고 권위를 지닌 왕이라는 자부심으로 권력의 힘을 마구 휘두른 철혈독재자의 이미지를 엿볼 수 있었다. 원래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는 차자였지만 형의 죽음으로 왕세자가 되고, 형수취수까지 하면서 왕이 되어 자신의 왕위를 이을 후사를 기대했건만 왕자 생산에 실패하면서 그야말로 엽기적인 엽색행각을 마다하지 않은 난봉꾼에 가까운 왕이 바로 헨리 8세였다. 순전히 자신의 이혼 문제 때문에 자신의 잉글랜드 교회조직의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서 벗어나 신교개혁에 착수하기도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잉글랜드 각지에 산재해 있는 수도원이 보유한 막대한 재산을 국고로 돌리기 위한 음흉한 계책이 숨어 있었다. 자신이 총애하던 신하들도 하루아침에 대역죄인 신세가 되어 참수되기도 했다. 하긴 왕비도 대역죄인이 되어 참수 되는 마당에 무얼 더 바라겠는가. 어쨌든 그의 통치 시간을 거쳐 유럽의 이류국가에서 훗날 제국주의 최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저자의 평가가 마음에 들었다.

 

우연이 겹치는 상속으로 유럽대륙 서쪽의 스페인 국왕이자 동쪽의 합스부르크 가 출신으로 거대한 제국이 카를 5세에 수중에 들어갔다. 어마어마한 영지를 상속받은 카를 5세의 치세는 격동과 난제의 연속이었다. 광녀 후아나의 아들로 태어난 제국의 상속자는 그야말로 동분서주하면서 제국 통치에 여념이 없었다. 광활한 제국의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진압과 전쟁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신구교의 대립이라는 심각한 문제도 해결해야만 했다. 고귀한 귀족혈통 보존을 위한 근친결혼의 유전자 폭발이라는 부정적 면도 있었다는 점을 꼬집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재벌도 피곤할 수 있다는 역사의 방증이라고 해야 할까나. 한편, 저자는 중국식 제국이 아닌 느슨한 유럽식 제국의 분열과 경쟁이야말로 오히려 유럽사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카를 5세의 방대한 제국도 결국 서로 이질적인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으로 갈라지지 않았던가.

 

지난 3월에 읽은 <그해, 역사가 바뀌다>에서도 소개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야기는 이제 익숙하기까지 하다. 카스티야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받아 서쪽 아시아로 가는 대서양항로를 개발하겠다고 나섰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목숨을 건 모험에 나서게 된 이유를 경제적 이익이나 신분 상승 같은 성공보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풀어낸 저자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종교계에서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지구구형설은 이미 당대 지식인들에겐 상식이었고, 독학으로 학문을 접한 이들이 흔히 그렇듯 콜럼버스 역시 아집에 사로 잡혀 있었다고 한다. 정작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개척에서는 소외되고, 스페인 왕실에 외면을 받은 그가 말년을 점성술이나 이슬람 세력이 특정 시기에 멸망할 것이라는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혀 보낸 점도 특이할 만하다. 같은 맥락에서 콜럼버스에 이어 후발 식민주의자로 아즈텍 제국 정복에 나선 코르테스와 그의 통역사 말린체의 협력이 신세계에서 벌어진 폭력적 방식의 결합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즈텍 인들의 인신공희가 그들만의 우주관에 입각한 종교 철학이었다고 한다. 인신공희에 필요한 전쟁 포로와 노예를 마련하기 위한 “꽃 전쟁”을 유럽 기독교인들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런 점에서 말린체는 수많은 인간의 피를 접수한 케찰코아틀 신보다 에스파냐인들의 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라이벌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진정한 의미에서 르네상스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우리에게는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린 화가로 유명한 다빈치가 사실은 문화 및 예술은 물론이고 군사기술과 교량건축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였다고 저자는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경건한 결혼생활이 아닌 자유로운 연애에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이라는 점도 그의 천재성을 설명해 주는 한 가지 요인이었을까. 피렌체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운영하는 보테가(공방) 출신 레오나르도는 출중한 데생 실력을 바탕으로 스승보다 뛰어난 실력의 회화기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저자가 <최후의 만찬>에 대해 말했듯이, 우리가 흔히 컴퓨터 화면이나 화보로 보는 것과 웅장한 사이즈의 오리지널 감상은 확실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압도적이라고나 할까. 그의 동성애 애인이 그린 짝퉁 <모나리자>의 오리지널리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또다른 시대의 천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나 체사레 보르자와의 특이한 인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남긴 수많은 스케치들을 담은 코덱스들에 대한 가치는 경매장에서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리고 현실이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 중에 하나는 빌 게이츠가 소장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스포르차 가문이 지배하는 밀라노에서 활약하고 말년에는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와 1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에서 죽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야말로 르네상스 시대 세계인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경철 교수님이 마지막에 배치한 마르틴 루터야말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올해에 가장 적합한 시대인물이 아닐까 싶다. 가톨릭 수사 출신의 종교개혁가가 처음부터 가톨릭 질서를 위협하는 ‘멧돼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 건축되고 있던 거대한 베드로 성당과 독일내 주교들의 짬짜미로 이루어진 면죄부 판매가 시행되면서,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엄격했던 수도사는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가톨릭 내부개혁을 위한 비판은 1세기 전에도 교황청에 이단으로 화형당한 얀 후스의 전례가 있지 않았던가. 왜 얀후스는 실패했고, 루터의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결정적 차이 중의 하나는 바로 인쇄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있었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보급으로 지식인은 물론이고 대중까지도 좀 더 체계적인 방식으로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 파문당한 루터가 현명공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거하는 동안 독일어로 저술한 성경 그리고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칭의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야말로 종교개혁의 분기점이 되었다. 물론 종교개혁에 대한 촉발은 루터가 시작했지만, 나머지 시대적 흐름은 그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독일 농민들에게 루터의 종교개혁은 가톨릭 종교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지만, 루터가 주창하는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엄격한 개인의 수양은 또 다른 족쇄에 불과했다. 그 결과 루터는 농민반란에서 귀족 편에 서게 되었고, 반유대정서를 부추기는 저술까지 발표하는 반동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던 건 간에 종교개혁은 시대의 대세가 되었고 근대로의 전환기를 상징하는 일대 사건으로 자리매김에 이르렀다.

 

숨 가쁘게 오늘날의 유럽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혹자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전쟁터와 바닷길을 누볐고, 엄청난 규머의 대제국의 상속자는 동분서주하며 통치를 했고, 어떤 공작들은 자신의 영토를 넓히고 왕국으로 승격하기 위해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무려 6명의 왕비를 둔 국왕은 무자비한 통치를 일삼았지만 궁극적으로 제국의 초석을 닦는데 성공했다. 어떤 르네상스 지식인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위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종교개혁에 나선 수도사가 과연 천국에 갔을까하는 저자의 마지막 질문아 갖는 함의의 무게는 적지 않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다양한 군상들의 총합이 오늘날 세계를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늘의 세계를 만든 또다른 이들의 이야기들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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