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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평점 :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강력한 결말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히틀러의 부상, 나치의 참혹한 홀로코스트를 다룬 많은 책들을 읽어 왔지만, 오늘 읽은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처럼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책은 그동안 만나 보지 못한 것 같다. 중편 수준의 분량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천페이지 짜리 소설을 능가한다고나 할까.
시대는 1932년, 독일 슈바벤 지방의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16세 한스 슈바르츠는 대대로 독일에서 살아온 유대인 집안의 소년이다. 괴테보다도 횔덜린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문학소년은 으레 그렇듯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고, 우정에 대한 로맨틱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중이다. 정말 마음에 맞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노라고. 물론 본격적인 세상살이를 해보지 않은 소년의 치기 어린 상상일지도 모르겠지만, 히틀러의 집권과 동시에 벌어질 비극과 대비된 순수함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심한 소년 한스의 조용한 세계는 어느 날, 콘라딘 폰 호엔펠스라는 동갑내기 백작 가문의 후손이 전학을 오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바바로사와 마르틴 루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수한 가문의 후예는 범접할 수 없는 우아함을 배경으로 ‘선천적 자부심과 후천적 오만함의 참호’ 속에 버틴 거인 같은 존재였다. 당연히 학급에서 잘 나가는 캐비어 패거리는 콘라딘에게 접근했고 보기 좋게 거절당하는 장면을 한스는 유심히 지켜보면서 콘라딘과의 아직 시작되지 않은 우정에 대해 상상한다. 그랬으니 콘라딘이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 마치 첫사랑의 짜릿한 감정의 교류만큼이나 외톨이 한스를 자극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한스가 자신의 집에 초대했을 때, 제국 철십자 훈장 수상에 빛나는 의사 아버지가 아들 뻘 콘라딘에게 쩔쩔 매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 순간, 콘라딘과 동등한 우정을 쌓으려고 했던 한스의 동심에 쩍쩍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어쨌든 유대인 소년 한스와 귀족 출신 콘라딘의 우정은 순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문제는 한스의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의 개’라고 불렀던 총통의 등장이었다. 총통의 등장에 이어 나치즘의 세뇌작업과 선전선동이 다른 곳도 아닌 신성한 교육의 현장인 김나지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역시 큰 의미로 다가왔다. 아리아인의 한 갈래인 그리스 도리아인의 도래 이래 본격적인 그리스 문명이 시작되었고, 르네상스 역시 게르만족의 황제들의 등장에서 비롯되었다는 프로이센 출신 역사 선생님의 견강부회에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하긴 21세기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도 국정교과서 문제로 필요없는 사회적 비용을 소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현재진행형으로 말이다.
아직 크리스탈나흐트(수정의 밤)나 홀로코스트 같은 본격적인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 건 아니지만, 순진했던 한스의 주변에 어둠의 세력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아무런 차별 없이 지내던 한스의 동급생들은 소년에게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고 결국 주먹다짐과 난투극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보니 한스의 아버지는 유대인이면서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에 대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했던가. 어떻게 보면 홀로코스트 이전에 한가한 타령일 지도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합리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다툼의 원인제공자였던 동급생을 나무라지 않고, 한스에게 유대인으로 인내를 기르라는 폼페츠키 선생의 말에 소년은 좌절한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콘라딘에게서 위로와 도움을 바랐지만, 이미 히틀러에 경도된 친구는 곁에 없었다.
점증하는 독일내 유대인의 압박에 심각성을 느낀 한스의 부모님은 한스를 미국의 친척에게 보내기로 결정한다. 아들을 참화가 닥치기 전에 피신시킨 대처는 옳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 독일을 위해 싸운 당신들에게는 다른 피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한스 아버지의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한스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동급생들로부터 두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하나는 터무니 없는 모욕적인 편지로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지만 콘라딘이 보낸 편지는 로맨틱한 우정을 이상으로 삼은 한스에게 큰 상처를 남겨 주었다.
미국으로 건너나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한스는 과거에 집착하는 대신 현재와 미래를 위해 살았다. 자신의 조국 출신 사람들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모국어인 독일어 대신 제2의 모국어가 된 영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의 삶이 어땠을까.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고, 독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다고 했던가. 자신이 나고 자라 그렇게 사랑했던 슈투트가르트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웃고 또 웃는 남자의 비애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렇게 나름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한스에게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독일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으로부터 도착한 인명부의 한 이름을 확인하는 것으로 소설 <동급생>은 막을 내린다.
다시 한 번 어떻게 해서 괴테와 횔덜린의 조국이, 그렇게 빛나는 인문정신을 담은 나라가 파멸적인 전쟁을 일으키고 인류사에서 지울 수 없는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을 창조해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그 바탕에는 프레드 울만이 주목하는 대로, 교육의 현장 그리고 우정 같은 밑바닥 인성을 파괴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1930년대 독일의 십대 소년들이 유신론에 대해 논쟁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리의 교육현장에서도 그런 의제에 대한 토론이 있었던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32년으로부터 자그마치 85년이 지났지만, 그런 모습은 볼 수 없는 삭막한 교육현실에 한숨부터 나올 따름이다.
한스의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의 개’라고 부르는 희대의 독재자를 발할라에서 부활한 위대한 조국의 영도자라고 생각하고 러시아의 대초원에서, 열사의 아프리카 사막에서 수없이 죽어간 수백만 독일 청년들에 대한 모습과 홀로코스트를 진행한 수많은 아이히만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나만의 상상이려나. 스탈린 대신 히틀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하는 콘라딘의 입장은 선거라는 방식으로 독재자를 선출한 독일 시민의 원죄에까지 다다른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 한스 슈바르츠가 알게 된 결말의 진실은 작가가 준비해둔 회심의 카드였다.
<동급생>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