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로 산다
리즈 투칠로 지음, 김마림 옮김 / 미메시스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일단 책의 두께가 후덜덜했다. 아니 이걸 언제 다 읽지? 괜한 걱정이었다. 인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작가였던 리즈 투칠로의 <싱글로 산다>는 드라마 못지않은 그런 재미를 흠뻑 담고 있었다. 어떻게 소설판 <섹스 앤 더 시티>라고 해야 할까. 물론 드라마처럼 비현실적인 설정이 눈에 거슬리긴 했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 양은 400달러 짜리 매놀로 샌들을 신고, 소위 맨해튼의 핫한 플레이스에서 수십달러 짜리 브런치를 거의 매일 같이 즐기고, 가는 곳곳마다 로맨스를 불러 일으키지 않았던가. 이런 점이 아주 비현실적이었다면, 역시 맨해튼의 38세 독신녀 줄리 젠슨은 양반인 셈이다. 친구들과 걸스 데이 아웃(Girls Day Out)을 즐기던 어느날 줄리는 맨해튼의 독신녀 싱글 라이프를 다른 나라의 그것과 비교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자신이 일하던 출판사 사장에게 기획안을 제출하고 세계일주 항공권을 끊어 싱글 라이프 탐험에 나서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고스한히 <싱글로 산다>에 담았단다. 아, 참 할리우드의 빼어난 영화제작자들이 이런 재밌는 이야기를 그냥 놔둘 리가 없지. 이미 영화화되었고 올해 2월에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초반에 등장한 소설의 리더 줄리 젠슨을 비롯해서, 브라질 삼다 댄서와 바람난 남편과 이혼한 조지아, 법정의 노련한 파이터 앨리스, 실연의 상징 루비 그리고 채식주의자이자 영성을 갈구하며 스와미(힌두교 승려) 스와룹이 되겠다고 삭발까지 감행한 세리나의 이야기말 들어 보면 이건 영락없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재판이다. 하지만 능숙한 드라마 작가가 누가 봐도 빤한 클리셰이를 반복할 리 없다. 이제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가 된 삼심대 후반의 여성이 세계의 중심 맨해튼에서 싱글로 살아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고찰에 나서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정글 같은 세계 자본주의 무대에서 살인적인 주거비를 부담하면서 열심히 커리어를 쌓다 보니 어느새 이 나이가 되었노라고 줄리는 고백한다. 이제 운명의 짝을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해 보지만, 남자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나이를 절반으로 나누고 거기에 4를 더한 정도의 아가씨들만 눈에 들어올 뿐이란다. 아무리 판타지를 추구하는 작가라지만, 현실감각마저 상실한 건 아닌 모양이다. 수컷들의 본능적 레이더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줄리는 자신이 계획한 걸스 데이 아웃 프로젝트가 처참하게 실패하고, 채식주의자 세리나가 지나친 음주와 치킨윙 파워 덕분에 병원신세를 지게 된 상황에서 우연히 듣게 된 프랑스 여자들의 ‘자존감’에 대한 대화를 듣고 장대한 전세계적인 싱글 라이프 탐험 원정에 나서게 된다. 마음 한 켠에서는 도대체 지들은 어떻게 잘났길래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겠지. 그렇게 해서 유럽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를 순회한다. 파리에서 잘 나가는 사업가이자 타고난 로맨티스트 그리고 유부남 토마스와 만나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 미국식 청교도 도덕과 윤리의식은 줄리가 토마스와의 만남을 거부하게 종용하지만, 사랑하고 싶은 여자의 본능은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요즘 한창 즐겨 보는 <또! 오해영>의 오해영처럼 뒤늦게 사랑에 눈뜬 주인공의 사랑에 대한 맹렬한 돌진이라고나 할까. 결국 비밀의 도시 아모르(AMOR:애너그램으로 풀면 로마가 된단다)에서 토마스와 ‘피카’(피카로 끝날 줄 알았던 이벤트는 계속 진행되게 된다)를 치르게 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현실과 동떨어진 추체험이 등장하게 되는데 일반 여행자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인적 커넥션을 통해 파리와 로마의 사교계를 체험하면서 그 나라 싱글들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수박겉핥기식의 배낭여행객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다.

 

소설 구성상 재밌는 점 하나는 단순하게 줄리의 세계일주 뿐만 아니라 소설이 잉태된 뉴욕에서도 끊임없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줄리와 브라질 리우에서 합류했던 조지아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지만 자신의 운명을 짝을 만나기에는 아직 시간과 경험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스와미로 변신했던 세리나는 지난 4년 동안 끊었던 사랑과 섹스의 세계를 온전하게 체험하고 영성을 추구하는 승려들 역시 본능에 무력한 인간일 수밖에 없노라는 간단한 진리를 깨닫는다. 반려동물 입양으로 상실의 시련을 극복하려 유기견센터를 찾은 루비는 수많은 동물들이 안락사하는 비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인간관계의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무조건 해외의 싱글 라이프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추적뿐만 아니라 뉴욕에서는 현재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노라는 투트랙 전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줄리의 싱글 라이프 원정은 아직도 멀었다. 모든 여성들이 줄리의 핸디캡이라고 할 수 있는 셀룰라이트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던 리우를 거쳐, 이번에는 새로운 파트너 앨리스와 함께 호주 시드니와 태즈메이니아 호바트까지 날아간다. 다시 발리에서 토마스와 재회한 줄리는 나이 지긋한 여성(호주 출신 세라)과 발리의 제비족 남성 커플을 보고 놀란다. 세라가 자기가 좋아하는 마데이에게 오토바이를 사주고, 가족 생활비를 준 게 뭐가 문제냐며 줄리를 나무란다. 하긴 줄리의 친구 조지아는 리우에서 남창과 피카를 즐기기도 하지 않았나.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연애가 소용돌이치는 싱글 라이프 세계에서 도덕이나 윤리 따위는 집어 치워야 하는 모양이다. 다음 목적지였던 중국 베이징에서는 토마스의 아내 도미니크의 예상치 못한 등장으로 짧았던 풋사랑이 풍비박산이 나기도 하고, 연이어 찾은 인도 뭄바이에서는 짝짓기가 온전히 자신의 힘만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협력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사랑의 모습이 그렇듯, <인생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 과정 어떤 공식이나 패턴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싱글로 산다>의 핵심 주제가 아닐까.

 

리즈 투칠로의 재미난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니 한 가지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건 바로 소설 속 주인공 줄리가 만나는 이들이 하나 같이 그녀가 방문한 도시의 진짜 보통 싱글 여성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 나라의 대표도시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없는 그런 클래스의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선 뉴욕 출신 줄리와 의사소통을 하려면 영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페라하우스나 으리으리한 개인클럽이나 외국인전용클럽을 드나들려면 베이징의 농민공 같은 선수들은 일단 배제시켜야 할 것이다. 특정 클래스의 일반화라는 오류가 분명하다는 점을 나는 여기서 지적하고 싶다.

 

<싱글로 산다>의 최고의 장면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세리나가 일하던 유명배우 로버트의 집에서 집주인의 임종을 맞이하는 시퀀스가 아닐까. 악성종양으로 임종을 앞둔 로버트의 집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챙기는 일을 하면서 세리나는 이 모든 장면들이 인류가 시작된 이래 지속된 부족의 의례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 같이 유명한 셀리브리티들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부족원들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허무하기도 하고, 누구 하나 자신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슬퍼하기도 하는 양가적 감정의 주인공 세리나야말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초상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파리, 로마, 리우, 시드니, 발리, 베이징과 뭄바이를 거친 줄리의 인생의 사랑을 찾는 원정은 엉뚱하게도 앨리스가 신혼여행을 떠날 뻔 했던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꿈들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고, 새로운 환경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점 그리고 다섯 명으로 구성된 멋진 패거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덤으로 배웠다. 어때 이 정도면 사랑 찾아 세계일주를 할 만하지 않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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