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그 거대한 행보 - 레이 황의 거시중국사
레이 황 지음, 홍광훈. 홍순도 옮김 / 경당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역사를 전공했다. 특히 어려서부터 중국 역사책을 열심히 읽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그런 열악한 상태의 조악한 번역물이었지만, 그래도 태사공 선생이 기술한 <사기> 같은 명저를 읽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한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많이 시간이 흘러 전공하고는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역사책 읽는 즐거움은 여전하다. 작년말부터 읽기 시작한 레이 황의 중국 거시사 책인 <중국, 그 거대한 행보>를 빨강원숭이해 벽두에 다 읽었다.

 

중국 역사시대의 돌입이라고 할 수 있는 은나라 시대를 필두로 해서 현대 중국에 이르는 유구한 세월을 거시사적 측면에서 망원경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최근 아날학파를 중심으로 한 현미경으로 역사를 관찰하는 미시사가 트렌드가 되었는데,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중국사에 관한 이야기들은 역사를 좀 접해본 독자들이라면 거의 모를 정도가 없으니, 생략하고 경제적 측면에서의 접근이 아주 신선했다. 서양에 비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이 비교적 일찍 들어선 진한제국을 통일 1제국으로 그리고 수당을 2제국으로 마지막으로 명청을 통일 3제국으로 분류하고 간기에 만이융적(아마 남만, 동이, 서융, 북적의 분류로 보인다)으로 대표되는 이민족 세력의 중원 정복을 도전과 응전의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특이한 사항이 별로 없어 보인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원동력이었던 중앙집권제와 특유의 관료제도가 오히려 중국의 역사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예리한 지적이다. 게다가 맹자가 일찍이 설파한 만백성을 즐겁게 하는 왕도정치 이데올로기는 어떤 왕조가 들어서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전통적 화이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비록 통일제국이 설립되긴 했지만, 근대적 화폐환산시스템과 신용거래 그리고 서비스 제도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규모 자영농 중심의 농촌경제에서 이룩된 잉여생산물을 통한 자본축적은 난망했고, 수량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어려웠던 점을 계속해서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초기에는 능률적인 시스템이었던 관료제도 역시 새로운 혁신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점에 수긍이 갔다. 한나라 시대에 도입된 대규모 교육 시스템 역시 새로운 개혁과 혁신을 담보하는 대신 왕조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역할에 머물렀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레이 황은 또한 최고권력자에게 일반적 시선의 도덕률을 요구하는 편견에서 벗어나라는 주문도 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다른 저서인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에서도 저술했듯이, 형과 아우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당태종 이세민의 경우에서 보듯 혈육과도 나눌 수 없는 최고권력 경쟁의 비정함을 볼 수 있긴 하지만 현대의 기준에서 골육상쟁이라는 도덕률을 절대군주시대에 적용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이긴 한 것 같다. 중국에서도 명군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당태종이 정착시킨 율령격식과 조용조 같은 시스템은 당시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제도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피해만 없다면, 최상위 권력층의 쟁투는 물론이고 이민족의 지배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한 왕조에서 다른 왕조로 바뀌는 과정에서 순국하는 케이스는 송나라나 명나라의 경우처럼 사대부 계층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집중했던 부분은 명청시대와 민국 시대의 이야기인데, 저자 레이 황 교수는 우수한 자원과 충분한 노동력을 가졌던 명제국을 비경쟁적이고 내향적인 제국으로 부르고 있다. 개국을 주도했던 태조 주원장에 대해서도 지독한 독재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해서 원나라 말기의 전란을 경험하고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에 대해 냉철한 분석을 시도한다. 수차례에 걸친 명태조의 숙청작업은 왕조의 기반을 닦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그의 뒤를 이은 영락제가 정복사업에 나서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급자족형 농촌경제에 만족하는 관료들은 기존질서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태생적으로 새로운 발전을 위한 중추역할을 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스템은 결국 부패할 수밖에 없었고 환관들의 발호가 이어지면서 왕조는 멸망의 수순을 밟게 됐다.

 

중국의 근대화는 아편전쟁 이후 숱한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며 정체되었고, 결국 제국의 해체와 중일전쟁이라는 전국적 규모의 전란과 국공내전이라는 폭력적 방식으로 오늘날의 중국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때 국민당군 장교였던 레이 황 교수는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투쟁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균형감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구한 장강의 물결 같은 역사의 흐름 속에, 등장한 역사인물들에게는 저마다의 역할이 주어져 있었고 역사발전은 지체될 수 있어도 결국 제 갈 길을 가는 법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 와중에 역사를 퇴행시키는 문화대혁명이나 천안문 사태 같은 반동적 체험이 빠질 수 없겠지만 말이다. 레이 황 교수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한 세기에 걸친 외세침탈로 인한 굴욕에서 벗어나 대국굴기에 나선 현대 중국의 미래전망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 특히나 인접국가로 하루가 다르게 중국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가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불투명한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 이웃나라 중국의 거시역사를 비교적 객관적 시각에서 다룬 레이 황 교수의 중국대역사는 일독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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