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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병사와 함께한 여름
베티 그린 지음, 권혜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연말인데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있다. 공쿠르 수상작인 리디 살베르의 <울지 않기>를 필두로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등등해서 이책저책 참 많이도 읽는구나.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베티 그린의 <독일병사와 함께한 여름>을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읽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주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소설 역시 전쟁 중에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해서 그런지 더 재밌게 읽을 수가 있었다. 예전에 중원문화에서 <독일포로와 소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운 제목과 번역으로 출간된 모양이다.
1940년대 어느 날, 주인공 퍼트리샤 앤 버건이 사는 1,200명 남짓한 사람들이 사는 아칸소 주 젠킨스빌에 일단의 독일군 포로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미국 남부 아칸소는 지독한 인종차별과 가부장적 시스템이 정착된 곳이다. 주인공 패티가 아버지 해리로부터 무자비한 가정폭력을 당하는 장면들이 소설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딱히 맞을 만한 이유도 없는데,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해리는 작은딸 샤론을 편애하면서 큰딸 패티에게 폭언과 매질을 해댄다. 올해 열두 살 난 소녀 패티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침례교 수련회에도 가지 못하고, 도서관도 여름방학을 맞아 문을 닫았기 때문에 마땅히 읽을 책도 없이 그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버지 해리가 운영하는 잡화점에도 자주 들르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귀찮아할 따름이다. 어머니 역시 딸에게 그다지 애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집안일을 도와주는 흑인 아줌마 루스뿐이다.
그렇게 외로운 생활을 하던 패티에게 잘 생기고 친절한 독일군 포로 프리드리히 안톤 라이커의 등장은 일종의 구원 같은 메시지였다. 농장에서 목화 딸 때 쓰기 위해, 밀짚모자를 사러 상점에 들른 독일군 포로들의 통역을 맡은 라이커와 이야기를 나누며 어린소녀는 그만 첫사랑에 빠져 버린다. 언어의 장벽을 피하기 위해 안톤 라이커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설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독일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던 시기라 보수적인 미국 남부 사람들에게 독일군 포로들은 그저 사악한 나치로 보일 뿐이다. 게다가 미국 해안에 특수임무를 띤 독일비밀공작원들이 상륙해서 비밀조직과 접선을 시도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도는 판국이었다. 미국 법무부에서는 적군을 도와주는 이들을 반역죄로 처벌하겠다는 공표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괴팅겐 대학 의과생 출신의 안톤 라이커는 기지를 발휘해서 포로수용소를 탈출하고 패티의 도움을 받아 패티네 버려진 차고에 은신하게 된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가족으로부터 사랑도 받지 못하는 소녀에게 은밀한 비밀이 생긴 것이다. 패티는 적극적으로 라이커를 돕기 시작한다. 아버지에게 선물했던 고급셔츠를 건네주고, 집에서 음식을 몰래 빼돌려 라이커에게 전달해준다. 나치와 상극일 수밖에 운명의 유대인 소녀가 동정과 연민에 젖어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위험한’ 적국 병사를 돕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었을까. 전시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철부지 소녀의 인도주의 정신의 발로라고 여길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FBI 수사관까지 동원돼서 심문에 나선 것을 보면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안톤 라이커의 운명도 그렇고, 나이 어린 패티가 그를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 해리가 그녀에게 가할 폭력의 수위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호기심 많은 우리 꼬마 숙녀는 지나가는 자동차에 돌멩이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깨는 사고를 내고, 아버지가 같이 놀지 말라는 프레디와 어울리다가 그만 사단이 나고 만다. 패티에게 행해지는 아버지 해리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격한 안톤 라이커는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패티를 구하러 나와 그만 신분을 노출시킬 뻔한다. 그 모든 것을 목격한 경험 많은 루스는 근사한 아침식사로 안톤 라이커를 대접하고, 더 이상 위험해지기 전에 떠나겠다고 선언한 안톤 라이커를 말리지 않는다. 아침식사를 하던 식탁에서 흑인이 없으면, 청소는 누가 하느냐는 루스 아줌마의 질문에 답하는 안톤 라이커의 대답은 인상적이었다. 라이커는 떠나면서 패티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남겨준다. 그렇게 홀로 남은 패티를 찾아온 운명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베티 그린 작가는 전쟁 중에 적국 병사와 자아도취적 사랑에 빠져 그를 적극적으로 도운 유대인 소녀의 이야기를 <독일병사와 함께한 여름>을 통해 비극적으로 풀어냈다. 주류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유대인 가정 내의 불화를 바탕으로, 전쟁이라는 큰 형태의 폭력을 가정폭력과 비교하면서 어떤 것이 더 문제일까 하는 문제의식에 도달한다. 안톤 라이커는 패티에게 히틀러와 그녀의 아버지 해리가 본질적으로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다만 누가 어떤 종류의 권력을 더 가지고 있냐에 차이일 뿐이라는 지적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소설에 등장하는 가정폭력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KKK단이 암약하던 시기 미국 남부에 살던 흑인들에게 공손함과 복종만을 요구하던 지독한 인종차별과 더불어 시대상을 보여주는 좌표로 작동한다.
개인적으로 주인공 패티 버건이라는 소녀의 철없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걱정이 됐다. 안톤 라이커에 대한 아련한 사랑을 그저 마음에 담아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가 떠나기 전에 준 반지에 대해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는 파커 언니에게 자랑한 것이 화근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빚게 된다. 열두 살짜리 소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걸까. 어린 소녀에게 반역죄를 물어 소년원에서 교화시키는 결말 부분은 정말 끔찍했다. 비이성적 애국주의의 광풍이라고 해야 할까. 고향에 남은 부모님과 그들이 운영하는 상점에 가해지는 린치도 인종주의 이슈와 결합되면서 인종차별과 역인종차별을 당하게 되는 케이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노출시킨다.
소설에 대한 상상력을 좀 더 확장해 본다면, 과연 6년이 지나 법적 성년이 된 패티는 바람대로 대학에 진학해서 기자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이뤘을까. 그리고 괴팅겐에 산다는 안톤 라이커의 부모님을 찾아가 그의 최후에 대해 어떻게 전해 주었을 지 궁금해졌다. 이 책의 후속작으로 <오랜 시간 뒤에 온 아침(Morning Is a Long Time Coming)>이라는 작품이 있다고 하는데, 그 책에 집으로 돌아간 패티의 또 다른 이야기들이 실려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