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감독
에비사와 야스히사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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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가 한창이다. 특히나 극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포스트시즌에서는 단 한 번의 실책이 승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그야말로 미친 활약을 보여 주었던 뉴욕 메츠의 대니얼 머피가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승리르 캔자스시티 로열즈에게 헌납하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렇다, 야구는 그렇게 만만한 경기가 아니다.

 

에비사와 야스히사 작가의 <야구 감독>의 원제는 간토쿠 그러니까 ‘감독’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뉴욕 양키즈가 있다면, 일본 야구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거성이 있다. 바로 이 팀에서 감독과의 불화로 쫓겨난 엔젤스라는 가상팀의 코치가 시즌 도중에 감독으로 승격해서, 패배주의에 물든 팀을 개선해서 V9에 빛나는 만년 우승예상팀인 센트럴리그의 자이언츠, 앞으로 교진이라고 호칭하겠다,에 도전하는 일종의 복수극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야구는 그렇게 만만한 경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미묘한 차이가 승리와 패배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곤 한다. 주심의 콜 하나가, 그리고 선수들의 실책 또는 정말 멋진 플레이 하나가 연패로 작동할 수도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 하나에 인생이 달렸다고 생각할 정도라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소설로 성공하기가 더 힘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보니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야구 소설이 있었나 싶다.

 

교진 출신의 과거 명유격수 히로오카 타쓰로는 올림픽건설이 모회사로 있는 센트럴리그 엔젤스의 코치다. 엔젤스는 만년 하위팀으로 같은 리그의 교진과 경기할 때나 간신히 원정팬들의 힘으로 구장을 채울 수 있는 그런 팀이다. 만연한 패배주의로 승리의 기쁨조차 모르고, 선수들은 경기에 집중하는 대신 술과 담배 그리고 마작할 궁리만 하고 있다. 심지어 히로오카의 전임 감독은 선발 라인업조차 점쟁이에 의존할 정도라고 하니 말 다했다. 그러니 엔젤스의 구단주 오카다 시로가 감독을 자르는 건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 히로오카가 감독이 되긴 했지만, 감독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시즌도 다 지나간 마당에 누가 신출내기 감독의 말을 따른단 말인가. 게다가 명색이 프로선수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선수들이 밥값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한 술 더 떠서 차기 감독자리를 노리고 있는 엔젤스 출신 선수이자 선임 코치인 다카야나기는 선수들을 조장해서 팀의 기강을 잡으려는 히로오카의 리더십에 번번이 반기를 든다. 그야말로 안되는 팀의 전형이다.

 

우리 SK 와이번스의 전 감독이었던 야신이라 불리는 김성근 감독의 경우가 보여주듯, 흔히 일본 야구는 관리야구라고 불린다. 특히 그 정점에 선수들의 개성보다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지휘하는 스타 감독이 즐비한 교진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선수들은 팀이라는 배를 지휘하는 감독이 조종하는 로봇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감독이 지휘하는 작전에 아무리 스타 선수라고 하더라도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 기본 룰이다. 물론 감독마다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모든 스포츠 경기는 이기는 것이야말로 지고한 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또 한편으로 야구는 공 한 개 한 개가 기록되는 경기이기도 하다. 시즌이 끝나고 성적에 따라 연봉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인 타이틀이 중요하다. 시즌 막판에 도루왕에 도전하던 다카하라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휘자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 타이틀보다 팀의 승리에 공헌하는 선수가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기지 못하면 매일 매일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 감독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히로오카의 본격적인 시즌은 다음 시즌이었다. 구단주와 회사 중역들을 통해 감독의 자리르 흔들려는 음모는 구단주 오카다 시로의 단호한 히로오카에 대한 지지선언으로 분쇄되고, 냉정한 고과산정에 따른 연봉재협상으로 선수들은 가히 충격과 공포 상태로 돌입한다. 아무리 주전선수라고 하더라도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트레이드 시켜 버리겠다는, 그리고 그동안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용병 허드슨 마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 시켜 버린 현실 앞에서 선수들은 감독의 지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출신 좌완 강속구투수 찰스 헤밍웨이를 영입하고, 2군에서 뛰던 하고를 유격수로 승격시키면서 히로오카는 다음 시즌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용병 선수들은 통역을 통해 대화를 시도했는데,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헤밍웨이의 에이스 선언에 다들 놀랄 따름이다. 사실 일본 야구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야구 감독>의 주석에 달린 나가시마와 왕정치 그리고 장훈 같은 대타자를 비롯해서 에가와 같은 투수에 이르기까지 일본 프로야구사를 주름 잡은 대선수들이 실명이 등장하는 재미는 기대이상이었다.

 

선수시절 동료였던 캐스터 출신의 와타카이까지 영입해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교진과의 개막 3연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엔젤스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리라고 했던가 팀의 중심이었던 다카하라가 부상을 당하고, 선수들이 히로오카의 지나칠 정도로 꼼꼼한 작전 지시와 사인에 질리기 시작하면서 팀은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한다. 연승 가도를 달리며 리그 수위 경쟁을 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막상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하니 아무런 대책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다카야나기가 히로오카를 침몰시키기 위해 승부조작 스캔들까지 일으키면서 엔젤스 호는 침몰 직전까지 내몰리게 된다. 과연 히로오카는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에비사와 작가는 거의 야구의 모든 것을 이 짧은 소설 한 편에 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이기는 팀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론과 실재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히로오카가 시즌 레이스 중에 경험했듯이, 어떤 순간에는 불가항력적인 요소들이 튀어 나오기 마련이다. 교진/자이언츠 같은 강팀은 어떤 방식으로든 꾸역꾸역 승리를 챙겨 가지만, 엔젤스 같은 약팀은 그런 위기상황에서 속절 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또 한편으론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의 성적만으로 감독을 경질하는 방법만은 능사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카다 구단주는 그렇기 때문에, 히로오카를 위해 방패막이를 자처하고 나서지 않았던가. 지속적인 투자와 꾸준한 인내는 어쩌면 바로 성적으로 직결되는 프로 세계와 상이한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광대처럼 저글링해야 하는 감독 자리야말로 바늘방석 같은 자리가 아닐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야구 감독 자리를 꿈꾸는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자리가 매력적이라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보통 야구 경기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부른다. 아무리 형편없는 스코어 차이로 지고 있더라도 결과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패배가 역력해 보이는 상황에서 극적인 역전에 성공했을 때의 기분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 때 야구에 미쳐 야구장 가는 낙에 살았던 사람의 증언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에비사와 야스히사의 정교한 야구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옛시절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응원하던 팀이 86년 짜리 저주를 깨고 난 다음에는 그전만큼 야구에 흥미를 가지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한 번 야구팬은 영원한 야구팬이다. 이제 곧 핫스토브 시즌이 시작되는데, 이번 비시즌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이 올드팬의 감상을 자극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리딩데이트] 2015년 10월 31일~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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