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이 소설 아주 재밌다. 어떤 책은 읽기 전에 감이 오는 책이 있다. 내게는 오늘 새벽에 다 읽은 김호연 작가의 <연적>이 그랬다. 연적? 서예할 때 쓰는 도구인 연적을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소설의 제목은 그 연적이 아니라 한 여자를 사랑한 연적(戀敵)이었다. 시나리오 작가, 만화 기획자 그리고 출판 편집자라는 다양한 직업군을 거쳐 마침내 2013년 데뷔작 <망원동 브라더스>를 발표하면서 본격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는 김호연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영화화 될 전망이라는 전작에 이어 <연적>도 비슷한 궤적을 그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했던 여자의 유골함을 들고, 그녀를 평안하게 보내 주기 위한 길에 나선 두 남자의 이야기. 듣기만 해도 존쿨하지 않은가 말이다.

 

네크로필리아도 아니고, 죽은 여자를 잊지 못해 낯선 여행길에 나서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로드무비 스타일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던가. 게다가 장소가 다 그림 같은 곳들이다. 어쩔 수 없는 작년 세월호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안산의 장례식장에서 출발해서, 남쪽바다의 대표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 남해와 여수를 거쳐 죽은 한재연이 그렇게 사랑하던 제주도의 이름 모를 ‘오름’을 찾는 여정은 상상만 해봐도 멋진 그림이 나온다. 어쩔 수 없이 영화화와 관련돼서, 이야기의 화자 고민중 역은 신하균에 제격이라는 느낌이다. 소설에서 고민중이 근육돼지라 부르며 짐승남에 가까운 앤디 강 혹은 강병균 역은 누가 맡으면 제격일지 아직 상상이 가지 않는다.

 

30평생을 모태솔로 살다가 자신이 다니는 출판사에 소설을 투고하러 온 한재연을 만나 짧은 연애를 즐기던 고민중은, 재연의 소설 출간이 엎어지면서 그녀와의 관계도 끝이 나게 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재연의 부고를 문자로 받게 된다. 아무리 간략화된 시절이라고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조차 문자로 처리된다는 처연한 사실이 문득 서글퍼졌다. 5년간 부지런히 다닌 출판사 팀장으로 회사일도 봐야 하는 그는 출근길에 부고 문자를 받고 잠시 결정장애에 시달린다. 문상 가고, 부의금을 내지 않으면 내내 새로운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겠지. 위의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내가 소설을 읽고, 재구성한 것이지 이야기의 진행은 순서가 다르니 이해하시도록. 어찌어찌하여 1년이 지나, 그녀의 기일에 다시 만난 앤디 강과 의기투합해서 그녀의 유골을 훔쳐내는데 성공하고 두 남자는 그녀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적과의 동침같은 여행길에 나서게 된다.

 

주인공은 이제 가고 없지만, 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내의 갈등은 뻔히 예고된 사실이다. 게다가 김호연 작가는 앤디 강은 근육질의 짐승남으로 주먹 쓰는 일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건달바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고민중은 먹물이라는 클리셰이로 설정해 두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언제라도 물리적 대결을 벌이지 않으리라는 최소한의 안전판이라고 해야 할까.

 

남해와 여수 그리고 제주를 돌며 고민중과 앤디 강은 줄기차게 술판을 벌인다.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된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과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공통적인 추억을 안주 삼아 조금씩 동질감을 느끼고, 공감대를 형성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연이 발표하려고 노력했던 <비 마이 고스트>의 시나리오가 문 감독이라는 악당에게 가로 채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선 복수에 나서게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사실 개인적으로 남해와 여수 그리고 제주로 이어지는 여정은 안정적이면서 소설의 핍진성을 제대로 짚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마지막에 해당하는 서울편은 좀 사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독자는 <연적>을 읽으면서 작가가 재연의 죽음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전해 주리라고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 부분은 블러링한 이미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대신 권선징악이라는 클래식한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그리고 그녀의 영전에 출간되지 못한 <비 마이 고스트>를 바친다는 클리셰이는 좀 아쉬울 따름이다. 결말에서 화끈한 한 방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된 소설의 원심력은 화자 고민중의 심리 변화를 따른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려낸다. 한 때 운동권으로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독립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유의 결정장애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그런 엉거주춤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던 고민중이, 회사를 땡땡이치고 옛 애인의 유골을 들고 튀면서부터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하는 모습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우리 모두가 내면에 그런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한 욕망 덩어리를 한 개씩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초면에 그렇게 경계해 마지않던 연적 앤디 강과의 관계도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참말로 마음이 편해지더라는 해탈의 경지도 선보여 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시종일관 그렇게 진지한 것만은 아니다. 문 감독에게 앤디 강이 보여준 인분테러 앞에서는 정말 빵 터져 버렸다. 중세 궁정에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던 저글러처럼 김호연 작가는 참 다양한 스타일로 독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연적>을 다 읽고 나서, 김호현 작가의 전작 <망원동 브라더스>가 읽고 싶어졌다. 시장의 반응이 좋았는지 연극으로도 제작되어 상연되었다고 하는데, 대강의 시놉시스를 보고 나니 왠지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이 떠올랐다. 소설-연극 그리고 영화화의 비슷한 경로를 거치지 않았나. 지난달에 이십 몇년만에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소설을 읽다 보니 보말해장국이니 갈치구이 같은 음식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 그리고 보니 재연이 사랑하던 오름 찾기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공천포 카페 숑은 실제로 존재하는 카페였다. 이런 장소를 통한 공감대야말로 외국 소설에서는 접할 수 있는 우리 소설의 힘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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