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꿈꾸는 책들의 미로
발터 뫼어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더 센 놈이 돌아왔다. 우리가 사랑하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을 잿더미로 만들고 자신의 고향 린트부름 요새로 튀었던 77세의 젊은 디노사우르스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가 다시 일어선 부흐하임에서 도착한 편지 한 통을 받고 건강염려증으로 단련된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초심으로 돌아가 도보여행길에 올랐다. 그 편지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림자 제왕이 돌아왔다. 이하 리뷰에는 발터 뫼어스의 부흐하임 시리즈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들어 있으니 아직 책과 만나보지 못한 분들의 심근경색을 염려하여 이만 읽기를 권한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읽었다면 발터 뫼어스가 대환영해 마지않는 모험자일 테니 군말은 더 필요 없을 것이다.
자그마치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이 사악한 피스토메펠 스마이크의 음모에 맞서 장렬한 불꽃으로 산화한 그림자 제왕 호문콜로스 때문에 발생한 대화재로 파괴된 지 말이다. 그동안 우리의 작가지망생 미텐메츠는 문학적으로 찬란한 성취와 그에 따른 명성을 즐기며 여유작작한 생활을 해왔다. 물론 그동안 다양한 먹거리들을 섭생하면서 그의 체중이 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무거운 엉덩이를 도보순례의 험난한 길로 인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발신자가 자신인 편지였다. 성공에 도취한 미텐메츠에게 이미 ‘오름’의 순간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고, 장년기에 도달한 이 공룡은 다분히 자기파괴적인 분열적 증상을 즐기며 린트부름 요새에 안주하고 있었다. 모든 작가들에게 찾아오는 병력처럼 빈곤한 창작의 소재는 미텐메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이성과 계몽을 선도하며, 다시 한 번 불꽃같은 오름의 순간을 몸소 느끼고자 미텐메츠는 잡다한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부흐하임 여행길에 오른다. 아, 이제는 누구나 알법한 저명한 작가가 된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두건과 망토는 필수다.
젊은 시절의 미텐메츠는 이미 우리가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의 거의 전부를 체험했기에 두 번째 여행에서는 신중에 신중을 더한 모습을 보여준다. 역시 나이를 먹었다는 방증이려나. 그렇게 도착한 부흐하임은 대화재 이전의 모습을 되찾고 보다 발전한 모습으로 장엄한 도시를 찾은 순례자를 맞이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잿더미가 된 패전국에서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기적을 일군 현대 독일의 모습이 떠올랐다. 현대화와 독재를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만든 민주주의야말로 세계를 호령하는 제조강국 통일독일을 가능하게 만든 주역이 아니었던가. 획일화된 전체주의에서 벗어나, 기존의 풍부한 인문학적 베이스를 바탕으로 해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부흐하임의 이미지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로 전진하는 현대 독일의 그것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책들의 도시조차도 전 세계를 휩쓰는 자본주의 열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더 이상을 오름을 체험할 수 없는 상업작가가 되었다는 비판을, 다른 사람도 아닌 절친한 친구로부터 듣는 미텐메츠의 심정을 상상해 보면 간단히 연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보니 전편에서 최고의 악당 역을 수행했던 피스토메펠 스마이크(그 유명한 메피스토펠레스의 애너그램이었던가)의 운명 역시 독일 민족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희대의 독재자 아돌프 ‘그 새끼’와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온갖 권모술수로 권력을 행사하며 사실상 부흐하임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스마이크의 최후 역시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독재자의 말로를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꿈꾸는 책들의 도시>의 대화재의 결말에서 스마이크와 그림자 제왕의 최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정확한 언급이 없었다. 확인해 보시라, 이런 앙큼발랄한 작가 같으니라구.
어쨌든 다양한 건강염려증과 다이어트의 압박에 시달리는 우리의 주인공 미텐메츠는 잃어버린 200년이라는 시간을 따라 잡기에 여념이 없다. 전작에서도 독자들은 신기한 것들로 넘쳐흐르는 책들의 도시의 포로가 되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발터 뫼어스는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부흐하임이 선사하는 새로운 변화들의 단면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대화재 이후,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에서는 화재를 피하기 위한 최신 유행으로 공중 도서관이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살아 있는 역사 신문’이 고전활자체로 관광객을 유혹하기에 이르렀다. 미텐메츠는 수다쟁이 역사 신문을 고용해서 지난 시간 따라잡기에 나선다. 끊어진 시간을 이어주는 결정적인 인물은 담배 한 대를 태우기 방문한 ‘자욱연기소’에서 만난 동료 공룡 오디디오스 폰 베르스슐라이퍼였다. 기억하시는가? 전작에서 성공을 구가하며 린트부름 요새를 떠났지만 잊힌 시인들의 공동묘지의 구덩이에서 관광객들에게 시를 팔며 연명하던 그 오비디오스 말이다. 놀랍게도, 부흐하임의 대화재를 통해 별들의 알파벳을 목격하고 마침내 오름의 순간을 관통한 오비디오스는 예의 광경을 그린 연작시를 발표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단다. 자욱연기소에서 값비싼 옷에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미텐메츠가 받은 충격을 상상해 보라. 바로 이 장면에서 발터 뫼어스가 어쩌면 오비디오스의 이야기를 통해 누구나 단박에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현대 문단 시스템을 비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반갑게 해후한 오비디오스는 부흐하임을 휩쓸고 있는 이른바 온갖 종류의 비블리오 주의에 대해 다양한 썰을 풀어준다. 그리고 예전에 책 사냥꾼이라 불리던 이들이 도서항해사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말도 오비디오스는 빼놓지 않는다. 도서항해사의 이미지는 기존의 책 사냥꾼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지만 말이다. 정체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약초들의 향기를 마음껏 흠향하고 오랜만에 만난 오비디오스의 이야기에 더해, 부흐하임산 책 와인까지 마셔 기이하기 짝이 없는 메타 와인학적 체험까지 하게 된 미텐메츠는 자신이 왜 이 도시에 오게 되었는가를 깨닫고 마침내 오랜 친구 아이데트족 키비처와 슈렉스 이나제아를 만나러 나선다.
친구인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해오던 키비처가 알쏭달쏭한 지하미로의 지도를 남기고 죽고, 유언 집행인으로 임명한 슈렉스 이나제아가 장례 절차를 처리한다. 그리고 미텐메츠와 이나제아는 부흐하임에서 대유행이라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인형극으로 관람하러 나선다. 미텐메츠는 인형극이 아이들이나 보는 거라며 툴툴대지만, 막상 거장 코로디아크가 연출한 인형극이 자신이 전작에서 직접 체험한 모험을 인형극으로 재현해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그대로 재현될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노련한 작가 미텐메츠는 실제와 연출을 꼼꼼하게 비교해 가면서 냉소와 찬탄 그리고 흥분에 사로잡혀 관람을 마친다. 어쩌면 발터 뫼어스는 부흐하임이 부활하는 과정에서 인형중심주의가 담당했던 일련의 문화 활동을 전후 독일 문학의 재건에 연결시키고 싶었던 건 아닐까.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로써 승전국에 제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독일 문학인들의 원죄를 고발한 W.G. 제발트의 냉철한 비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다음은 수순은 당연히 거장과의 만남일 것이다. 어, 그런데 장님 인형술사의 얼굴이 오래 전 지하미로에서 마주쳤던 하고프 살달디안 스마이크와 빼닮지 않았는가 말이다. 능구렁이 같은 작가 발터 뫼어스는 부흐하임 주민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마에스트로 코로디아크가 하고프 살달디안의 쌍둥이 형제였다는 클리셰이를 선언한다. 예술 창조를 위해 시력마저 잃은 코로디아크의 아우라에서는 필생의 역작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다가 시력을 잃은 콜린 매컬로 여사가 연상되기도 했다. 천재성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가혹하지 않냐고 작가는 되묻고 있다. 어쨌든 마에스트로 코로디아크가 인터뷰 중에 언급했던 <보이지 않는 극장>은 또 무언가. 어지간한 미스터리 소설 따위는 찜쪄먹을 법한, 판타지 장르 특유의 무궁무진한 이야기 보따리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자 이제부터가 문제다. 여기까지 읽었어도 이제 <꿈꾸는 책들의 미로>를 마무리할 수 있는 분량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촉 빠른 독자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꿈꾸는 책들의 미로>는 아직 미텐메츠와 그를 따르는 독자들을 지하미로로 인도할 준비로 끝을 맺게 된다. 나머지는 언제 출간될지도 모를 차모니아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할 <꿈꾸는 책들의 성>에서 다룰 예정이란다. 하긴 이것조차 확인된 바 없다. 엄청난 분량의 차모니아 어로 구성된 미텐메츠가 남긴 자기분열적 기록들을 번역하고 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삽화까지 도맡아야 하는 작가의 입장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피니쉬라인을 향해 처절하게 달려 왔는데 저 멀리 그림자제왕, 아니 호문콜로스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채 끝나다니 안타깝지 그지없다. 발터 뫼어스가 출판사로부터 법적 대응 운운하는 협박을 당해도 싸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헤르타 뮬러의 <숨그네>의 경우에서도 그랬지만, 독일 작가들의 조어(造語) 기법이 우리말로 번역되는 순간 특유의 말맛을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독일어를 전혀 모르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전편에서도 등장했던 비루한 존재를 가르키는 오리개구리나, 부흐링의 가죽동굴, 노루개 레겐샤인 그리고 상어구더기 스마이크 같은 경우가 생각난다. 그런 점에 비해, <꿈꾸는 도시들의 미로>에 나오는 공공 끽연소를 지칭하는 자욱연기소 번역은 정말 멋지지 않은가. 우리네 도심 변두리에 자리 잡은 끽연소에도 이런 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한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
<꿈꾸는 책들의 도시>와 <꿈꾸는 책들의 미로>를 다 읽고 나서, 기존에 출간된 발터 뫼어스의 책 사냥에 나섰다. 판권 소유자가 바뀌었는지 슬슬 절판과 품절의 운명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사 모으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으로 공식 차모니아 사이트도 방문해 보았는데, 부흐링들의 실사 이미지에서부터 미텐메츠의 집필 장면까지 정말 다양한 이미지들을 만나볼 수가 있었다. 그런 건 모두 부수적일 따름이고, 어서 빨리 나머지 모험을 들려주길 바랄 뿐이다.
[리딩데이트] 2015년 9월 23일 ~ 25일 1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