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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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가을 호에 실린 리뷰를 보고서 장강명 작가의 신작 <한국이 싫어서>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부터 도발적이지 않은가. 한국이 싫어서,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가 한국이 싫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 계나는 서울 아현동에 살며 재개발 신화를 기다리는 가정에서 세 자매와 복닥거리며 홍대를 나와, 증권회사 다니다 호주 행을 결심한다. 이유는 제목 그대로 한국이 싫어서란다. 사방에서 아우성이다. 먹고살기 힘들다, 대학 가기 힘들다, 그렇게 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돈을 벌기 위한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21세기 한국 사회의 성공 사다리 법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인턴 자리마저 상층부 카르텔 자녀들이 싹쓸이하는 마당에, 지잡대를 나와 내세울 것 없는 스펙을 가지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 이들을 위한 일자리는 한국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암담한 전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 계나는 한국을 버리고 호주로 떠났다.

 

장강명 작가는 주인공 계나가 호주로 떠나야 하는 절실한 이유들을 아주 정교하게 설치했다. 사실 갑갑한 현실은 계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2,500만 월급쟁이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문제다. 직장에서 합리적이지 못한 명령에 따라야 할 때도 있고, 인사고과를 담당하는 직장 상사의 눈치를 봐야하기도 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스트레스의 벽은 견고하기만 하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문제는 아무리 필사적인 노력을 해봐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나는 본능적으로 그 점을 깨닫고, 시원하게 호주 이민을 결심한다. 단돈 2,000만원을 들고 젖과 꿀이 흐를 것으로 생각되는 땅 호주에만 가면 만사형통되리라는 희망을 안고서. 과연 계나에게 호주는 그런 땅이었을까.

 

호주에 상륙하면서부터 유학생 신분이라기보다 워홀러에 가까운 그리고 그럴싸한 일자리를 잡기 위한 언어 실력조차 구비되지 않은 후진 발음으로는 언감생심이다. 게다가 한 푼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셰어하우스에서 각양각색의 인종들과 뒤엉켜 사는 삶은 계나의 환상을 처절하게 박살낸다. 과연 계나가 헬조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고생을 해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물설고 낯선 호주가 그녀를 반겨 주었을까? 수많은 이민자들이 낯선 땅에서 성공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고생을 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보다 덜 자고, 덜 먹고, 덜 쉬면서 그렇게 악착같이 고생하면서 이룬 성취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을지 나는 묻고 싶다. 어떤 점에서 보면 계나는 남들처럼 평범한 연애를 하고, 데이트와 문화생활을 즐기는 소중한 일상이 그리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주변 환경은 절대 그것을 범인(凡人)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호주에 가서도 회계사라는 번듯한 직업을 갖기 위해, 각고를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신화를 받들고 신대륙에 상륙한 그녀의 선배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바로 이 지점에서는 난 묻고 싶어졌다, 차라리 그런 노력을 한국에서 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물론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애당초 비교 가능한 가시적 행복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오랜 기간을 함께 보낸 지명이 애절하게 계나를 원해도, 계나의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4년간의 천신만고 끝에 밑바닥 쉐어러에서 랜드로드 혹은 마스터의 자리에 올라간 그녀의 삶은 미국 출신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한 때의 워너비 엘리의 일탈적 행동 때문에 엉망이 되어 버린다. 타인의 삶을 그렇게 망가뜨려 놓고도, 전혀 미안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엘리의 모습에서 서양인들의 이기적인 합리주의 정신의 본질이 언뜻 비치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착취당하던 이가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지만, 그 과정이 비합법적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보상도 없이 맨 손으로 쫓겨나야했다는 설정이 공수래공수거 인생의 교훈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이미 신문 지상과 블로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호주 워홀러들의 생생한 사례가 책에 담겨 있어 궁금했는데, 책의 말미에 작가가 호주 생활을 직접 체험한 이들과 인터뷰를 통해 사례를 발굴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한국이 싫어서>에는 비전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이십대 청춘들의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기 혹은 탈출기록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들을 예리하게 저격하는 장면들이 곳곳에 담겨 있다.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영어를 하지 못하는 한국 출신 워홀러들이나 다른 여타 동양인들의 처지는 도긴개긴이지만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식 인종차별주의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한국에서 옥외에서 맥주 한 캔 마시는 일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호주에서는 명백히 불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계나와 제인이 신세한탄을 하며 호주 생활 초반에 음주를 하는 장면도 단순무식함에서 비롯된 사소한 위법행위였다고 했던가. 그렇게 시작된 사소한 행위들이 창대해져서 결국 계나의 호주 생활을 송두리째 날려 버릴 수도 있는 그런 태풍이 될 뻔했다.

 

장강명 작가가 <한국이 싫어서>의 전개 방식을 계나가 마치 친구들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선택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그것은 마치 선생님이 학생들을 계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는 이런저런 체험을 해봤다네 친구라며 평범한 술자리에서 나누는 한담처럼 독자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런 점이 작가의 접근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계나는 한국 사회에 부조리한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방식보다, 차라리 다른 시스템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탈출을 도모했다. 그런데 예의 시스템은 단기간의 학습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출생과 성장 그리고 교육이라는 장기간의 프로젝트라는 점을 간과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계나는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었지만, 호주에 가서도 영원한 이방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느 시기의 특정한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귀화인이 어떻게 그 지위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작가는 그래서 계나가 아니 모든 이는 모름지기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설교로 소설의 말미를 뭉뚱그렸는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사회가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맴돌았다.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도 믿지 않지만, 모두가 미래를 두려워하며 사는 사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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