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의 그리스신화 1 - 올림포스 신들 유재원의 그리스신화 1
유재원 지음 / 북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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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즐겨 읽었다. 천상의 신들이 인간들처럼 시기 질투하고, 또 애인을 두고 다투거나, 누가 제일 미인이냐를 두고 경쟁하는 장면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다 나중에 아주 오래 시간이 흘러, 그 시절에 읽은 그리스 로마 신화들은 오리지널 버전이 아니라 훗날 토마스 불핀치가 19세기에 새로 편집한 저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스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유재원 교수의 <그리스 신화>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불핀치 판보다 정교하면서도 원전 신화에 가깝다는 점에서 기존의 그리스 신화와 변별점을 가진다는 점을 평가하고 싶다.

 

최근 그리스에 대해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유로존 탈퇴와 구제금융 그리고 그렉시트(Grexit)라고 불리는 안건에 대한 국민투표를 감행한 치프라스 총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최악의 금융위기를 맞은 그리스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올림포스 신화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상황에서 읽는 그리스 신화 이야기는 카오스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 신화의 저자는 우주의 생성을 카오스(무질서)에서 질서로 이동하는 과정이 과학계의 설명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이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인들 역시 우주와 인류의 탄생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서였을까. 저자의 의견에 따르면, 올림포스 신화에 들어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당대 혹은 그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근동 지방의 신화들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스 올림포스 신화를 대표하는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우스 이전의 티타네스와 기간테스와의 전쟁은 아직 인류에 자연에 무기력하던 시절 이야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진이나 태풍, 해일 그리고 홍수 같은 무자비한 자연 재해로부터 여전히 인류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인류는 협력과 지혜를 바탕으로 자연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올림포스 신들은 인간을 돕는 수호자로, 때로는 징벌자라는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계에 간섭하면서 서로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미처 몰랐었는데, 두 차례의 거인 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제우스가 마지막 승부였던 티폰과의 싸움에서 한 때 패배해서 코너에 몰린 적도 있다고 하니 놀라웠다.

 

바로 이 거인 족과의 패권 다툼에서 결정적인 조력을 한 캐릭터로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한다. 자연에 무기력한 인간에게 불을 제우스 몰래 전달해 주고, 이모저모로 인간을 도운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미운털이 박혀 독수리에게 내장을 파 먹히면서도 죽지 못하는 가혹한 형벌에 처해지기도 한다. 그런 프로메테우스를 구출해내는 영웅이 제우스의 아들인 헤라클레스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렇듯 신과 인간의 관계는 고정불변의 그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타협과 교정이 가능하다는 점이야말로 훗날 르네상스와 근대의 동력으로 이어지는 인문주의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다음은 저자가 소개하는 신들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신은 바로 아름다움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라틴어로는 비너스라 불리는 신이었다. 보티첼리의 그 유명한 <비너스의 탄생>은 바로 그리스말로 거품을 뜻하는 아프로디테 탄생 설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코린토스는 바로 이 아프로디테를 모시는 도시로 유명했고, 사랑과 정욕을 갈구하는 모든 고대 남성들이 방문하고 싶은 장소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프로디테는 이미 기존에 존재하던 신으로서 후대에 거품에서 창조되었다는 이야기로 그리스 신화에 편입된 편입생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아프로디테는 그리스가 위세를 떨치던 시대에는 번식과 사랑의 신으로 제우스에 필적할 만한 걸출한 능력의 소유자로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 시스템/이데올로기가 확립되고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이전 그리고 결정적으로 기독교 사상이 서구 사회에 침투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아프로디테의 위상은 그리스의 쇠락과 더불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신의 생성과 융성기조차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전하는 저자의 예리한 분석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 분석은 돼야, 숱한 그리스 신화와 다르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독자 스스로 그 정도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이다.

 

다음 타자로 내가 읽은 신은 바로 헤르메스(라틴어로는 머큐리)였다. 한 때 인터넷 아이디로 삼을 정도로 매력적인 신 중의 하나인 헤르메스는 올림포스 정상의 주신인 제우스의 아들로, 제우스의 공적 권력을 위임받은 아폴론의 이복동생이다. 상인과 도둑 그리고 나그네의 수호신이기도 한 헤르메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특기인 도둑질과 뻔뻔한 거짓말을 장끼로 삼게 된다. 신들 하면 양지를 지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사에 어디 밝은 면만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신참내기 헤르메스에게는 어두운 면이 할당된 모양이다. 이 책의 저자는 헤르메스가 자신의 이복형 아폴론에게 도전하기 보다는, 타협과 협상을 통해 자신의 몫을 적당히 챙기는 전략을 발휘했다고 분석한다. 태양신이자 호남자인 아폴론이 꼬맹이와 다투는 장면을 상상해 보니 우습지 않은가. 게다가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부지런히 아버지 제우스의 메신저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특출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존재해야할 그런 캐릭터라고나 할까.

 

우리에게는 방탕한 주신(酒神)으로 알려진 디오니소스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우스가 인간의 딸인 세멜레와 관계해서 낳은 디오니소스는 태어날 때부터 헤라 여신의 질투로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멀리 오지에서 자라나고, 한 때 미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올림포스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인류에게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는 술[포도주]을 공급하고, 번식의 상징으로 수많은 마이나데스라는 광적인 팬들을 여신도로 거느린 디오니소스는 아프로디테와 마찬가지로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신앙으로 그리스 본토에 상륙하는 과정이 디오니소스 자신의 신격화와 유사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게다가 다른 올림포스의 신들과는 달리 디오니소스 신앙은 천신(天神)이 아닌 지신(地神)이고, 귀족 중심의 올림포스 신앙과는 이질적인 민중 중심의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 세계가 쇠락하면서, 왕과 귀족 중심의 올림포스 신앙은 자연히 몰락했지만, 올림포스 시스템 속에서 기묘한 공존을 하고 있던 디오니소스 신앙은 반대로 위력을 발휘해서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유사하면서 좀 더 체계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 신앙이 전도사 바울의 노력에 의해 지중해 세계를 석권하면서 디오니소스 신앙이 대표하던 고대 세계의 종말이 도래하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 1편에서 올림포스 신앙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신들의 향연이 펼쳐졌다면 후속편에 해당하는 2편에서는 인간 영웅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초반에서도 다뤄졌듯이, 그리스 신화는 오로지 신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과 상호작용 혹은 맞서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그저 단순한 흥밋거리 차원의 신화에서 이렇게 멋진 해석을 곁들여서 분석한 저자의 내공에 감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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