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 개정판
이창래 지음, 정영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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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창래 작가의 책은 <척하는 삶>만 읽으면 완독이다. <네이티브 스피커>로 시작된 이창래 작가를 탐험하는 나의 독서 여정은 <생존자>(그의 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신작 <만조의 바다 위에서>를 거쳐 마침내 <가족>에 도달했다. 지금으로부터 딱 십년 전에 출간된 랜덤하우스 중앙 버전으로 구해서 읽었는데(절판됐다), 물론 작년에 재출간된 버전도 구입하긴 했다, 거진 읽는데 일년이 걸린 모양이다. 그 사이에 <척하는 삶>도 읽다가 말았는데, 이번 6월이 다 가기 전에 그 책도 마저 다 읽어야겠다.

 

<가족>의 주인공은 59세의 제리 배틀이다. 오십대의 마지막이자 이제 노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시기에 접어드는 주인공의 주변은 온통 위기 투성이다. 사실 제리가 가진 재력이라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평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언제나 그렇듯 타의에 의한 내 삶의 퍼레이드는 고단하기만 하다. 우선 양로원에서 지내는 85세의 아버지가 있다. 위기가 겹치는 상황에서 양로원에 거주하는 아버지마저 실종되다니, 설상가상이다. 하나 있는 딸 테레사는 비호지킨 림프종이라는 암에 걸렸는데, 임신한 상황에서 아기를 낳겠다고 고집한다. 유산하고 당장 암 치료에 나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이십년을 함께 산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자친구 리타는 잘 나가는 변호사 리치와 눈이 맞아 제리의 곁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가장 큰 문제는 삼대를 이어온 조경가업회사인 배틀 브라더스를 맡은 큰아들 잭의 파산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가장의 자리를 아들 잭에게 물려주고 은퇴를 선언했지만, 우리의 까칠한 남자 제리 배틀의 삶은 그렇게 고달프다. 그의 유일한 위안은 애기(愛機) 도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이다. 그렇게 지상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창공에 있다 보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인단다. 남다른 취미생활인 그의 비행은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현실로부터 도주하는 완벽한 방법이다. 그런데 얽히고설킨 그의 가족사의 내면에는 수영장에서 익사한 채로 발견된 한국계 부인 데이지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미국이란 사회는 이민자의 나라가 아니던가. 제리 배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유달리 가족애를 자랑으로 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제롬 바타글리아(제리 배틀의 본명)는 배틀 브라더스라는 조경회사를 차려 근교 부자들의 조경에 대한 고상한 취미를 만끽시켜 주면서, 자신들도 성공한 아메리칸 드림의 대열에 합류했다.

 

게다가 한국계 아내인 데이지와 결혼하면서 다인종국가 미국의 본질에 다가선다.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자식들인 잭과 테레사는 각각 가업을 이어 받고, 이름난 학교를 졸업하고 문학평론을 하는 엘리트 계급으로 거듭나는데 성공한다. 그들의 성취가 모두 부모 세대의 자본 축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어찌어찌해서 사업에 실패하고 재기를 위해서도 부모에 기대야 하는 상황은 우리가 어려서 줄기차게 들어온 자립적인 미국 청년들의 모습을 배반한다. 그들 역시 자립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부모의 조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민자 2세인 이창래 작가는 기존의 <네이티브 스피커><척하는 삶>에서 다뤘던 이민 1세대 이슈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오늘날 이민자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에 천착한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 세대와의 소통과 화해라는 주제를 부상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 가족소설이라는 형식이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주인공 제리 배틀의 시선에서 기술된 <가족>에서 이창래 작가는 굳이 미국 가족이 아니더라도 보편적 가족들이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의 일반화를 통해 가족이라는 사회구성체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제리 배틀은 아내 데이지의 죽음 이래, 핵심을 회피하는 전략으로 스스로 잭과 테레사로부터 멀어져왔다. 실질적인 새로운 아내라고 생각하는 리타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이자 아버지로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고, 그저 현상유지만을 목표로 하니 리타의 불만을 재울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암으로 죽어가는 딸 테레사는 아버지에게 랍스터가 먹고 싶다는 강력한 요청으로 비행을 함께 하면서, 파산한 아들 잭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처럼, 이미 돌아온 한 명의 탕자는 아버지에게 온전하게 투신해서 자신의 사후를 부탁하고 더 나아가 가업을 말아먹은 두 번째 탕자와 화해하라고 강권한다. 죽어가는 딸의 이런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문제의 해결은 역시 끈끈한 가족애의 재구성이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소설을 끝을 맺는다. 소설의 어디선가 나온 표현대로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이라는 퍼레이드야말로 이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내가 체험한 이창래 작가 소설의 호흡은 길다. 노블도 아닌 노블라가 유행하는 시대에 꽤 두꺼운 분량의 책을 읽어내기란 솔직히 쉽지 않다. 책이 아니어도 우리의 눈과 귀를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묵직한 내용의 그가 저술한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만이 가진 독창적 매력에 빠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계속해서 진화하는 작가의 책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울 뿐이다. 솔직히 최신작 <만조의 바다 위에서>는 작가가 그동안 보여준 스타일과 너무 달라서 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또다른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번에는 또 어떤 도전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완독의 만족스러움과 고단한 삶에 지친 나에게 작은 평안과 위로를 선사해주어 고맙다.

 

[리딩데이트] 2015531일 오후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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