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부타이 - 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리처드 A. 가브리엘 지음, 박리라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서양 역사연구자가 기술하는 동양사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예일대 출신 조너선 스펜스 역사교수의 중국사에 관련된 책들도 부지런히 구해서 읽고 있는 중이다. 과연 서양 연구자들이 1차 사료인 한자로 된 서적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학문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지속적인 연구와 그 성과는 반갑다. 이번에 출간된 리처드 가브리엘 교수의 <수부타이, 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은 13세기 초반 전 세계를 강타한 몽골군단의 지휘관이었던 바투르(용사) 수부타이에 관한 저서로, 그동안 서방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수부타이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그려내고 있다.

 

수부타이는 칭기즈칸(이후 대칸으로 부르겠다) 수하의 네 마리 충견 중의 한 명으로 우랑카이 부족 대장장이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대칸의 막사를 호위하며 친형 젤메와 함께 대칸의 대업을 도왔다. 전래하는 <몽골비사>에 따르면, 사분오열되어 있던 몽골 부족을 통일한 대칸은 눈길을 동쪽의 서하와 남쪽의 대국 금나라로 돌리면서 비로소 정복전쟁을 시작한다. 초원의 기마민족이었던 몽골군단은 기병 편제 중심으로, 몽골 통일전쟁의 과정을 십진법을 채택하여 효율적인 군사조직으로 거듭나게 된다. 몽골군단은 야전지휘관에게 목표달성을 위한 독자적 재량권을 부여해서, 야전에서 신속한 판단을 내려 예측불허의 전장에 대응하게 했다. 바로 이 점이 몽골군단의 뛰어난 기동성과 더불어 그들의 세계정복을 가능케 하는 혁신과 창조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몽골군단은 바람 같은 스피드를 자랑하며 중원과 페르시아 그리고 서방에 자리한 정주국가들의 군사력을 압도했다.

 

수부타이는 이미 대칸의 야전지휘관으로 자리 잡은 형 젤메 덕분에 어려서부터 최고지휘관 회의에 참석하면서, 정교한 전략전술을 접하고 배울 수가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수부타이는 참모사관학교에서 간접교육을 통해 필드를 누비는 야전지휘관이라기 보다는 전쟁계획을 수립하고, 수행하는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 초원에서 치른 전쟁과 달리 몽골족에 비해 엄청난 인구(약 오천만 명)를 지닌 금나라와의 소모전은 몽골군단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임이었다. 서하원정에서 처음으로 몽골기병들은 공성전을 접하고, 기초적인 공성 전략을 배우게 되었지만 중원의 지배자였던 금나라 정복전쟁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리처드 가브리엘 교수는 몽골군단에게 전쟁은 정치적 전략의 종속 변수였다고 쓰고 있는데,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다. 물론 몽골군단의 파괴적인 약탈 전쟁이 페르시아 문화가 꽃피던 바그다드를 초토화시키고, 러시아 원정에서는 원주민 기술자들을 모조리 납치해 가는 바람에 러시아 토속 기술이 다시 자리를 잡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 외부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몽골군단 특유의 친화성이야말로 오늘 같은 디지털 융복합 시대에 걸맞은 자세가 아닌가 싶다. 그들은 금나라 정복 과정에서 서양의 발리스타 같은 공성기계들을 도입해서 이어지는 페르시아와 러시아, 서방원정에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화려한 궁정 생활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던 야전사령관 수부타이는 금나라를 정복하고 난 뒤에, 대칸의 뒤를 이어 칸의 자리에 오른 오고타이에게 중원에 사는 한족을 몰살시키고 대륙을 말을 키우기에 좋은 초원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백성이 있어야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다는 한인 관료의 진언으로 수부타이의 제안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비록 몽골족 출신은 아니지만, 철저한 보수주의자이자 몽골족보다 더 몽골족 같은 캐릭터의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정복전쟁을 계속하자는 현실주의자와 정복전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이상주의자 간의 논쟁에서도 수부타이는 몽골군단을 이끌고 세계정복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전파를 이끌며 결국 페르시아 원정에 이어 러시아와 서방 세계를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게 된다.

 

개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몽골군단의 서방원정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역시 서구 역사가여서 그런지 리처드 가브리엘 교수는 수부타이가 중심이 된 몽골군단의 서방원정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우선 중무장한 기사단과 농민이 중심이 된 보병대로 구성된 서방 기사중심의 연합군은 처음부터 경기병과 중기병으로 이루어진 몽골군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다양한 신무기를 도입하고, 새로운 전략전술을 가다듬은 몽골군단은 활발한 척후활동을 통해 적정을 탐지해서 생소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전래의 망구타이 전법 같은 기만술로 적을 유인해서 섬멸하는 작전을 선보였다. 러시아 침공 전에 이러한 치밀한 정보전을 바탕으로, 폴란드와 러시아 귀족들이 외세(몽골군단)의 침공에 대비한 연합전선 구축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예측해냈다. 그들은 부대의 기동을 비롯해서, 병참, 의료지원 등 현대전을 연상케 하는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신출귀몰한 전쟁방식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는 압도적인 병력 수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신속한 정보전달을 위해 제국을 관통하는 역참제도의 정비 또한 몽골군단이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예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서방원정 사실상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수부타이는 기만외교술에도 뛰어나 캅카스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몽골군단을 상대로 연합해서 대항했던 쿠만 족을 이간시켜 강력한 저항을 분쇄하고 마침내 러시아 평원에 도달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만성적인 병력부족에 대한 타결책으로 흐와리즘 왕국의 무함마드 샤와의 대결에서는 쿠르드 족을 포섭하여 군단에 편입시키는 수완도 보여주었다. 저항하는 도시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 작전은 충격과 공포의 전염이라는 방법으로 몽골군단에 저항하면 어떻게 된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을 널리 퍼뜨리는데 일조했다. 섬멸전 또한 치밀해서 적군 지휘부에 대한 끈질긴 추격전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미 몽골부족 통일전쟁에서 대칸의 타부족 섬멸전의 명을 받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수부타이는 정복지에서의 근원적 저항세력을 분쇄하는 방법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곤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덩케르크에 내몰린 30만 명에 달하는 영국 프랑스 연합군을 포위한 독일 기갑군단이 히틀러의 오판으로 섬멸전에 실패한 예가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학살과 섬멸전이 몽골제국의 때 이른 붕괴의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정복은 마상에서 가능하지만, 지배는 또 다른 문제였을 것이다. 순식간에 세계를 제패한 집단이 어떻게 해서 고작 1세기만에 다시 중원을 한족 명나라에게 뺏기고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야 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무시무시한 정복전쟁으로 대제국 건설에는 성공했지만, 지배에는 관용과 포용의 정신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하고 추론해 본다. 다시 말해 단기간의 세계정복에는 몽골군단 특유의 성공 요인들이 훌륭하게 작용했지만, 장기적인 세계지배 전략의 부재가 그들의 몰락하는 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고질적인 후계분쟁 역시 빠른 몰락의 한 원인이었다. 레그니차 전투에서 동유럽 연합군을 패퇴시킨 수부타이에게 독일과 프랑스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긴 했지만, 오고타이칸의 죽음으로 쿠릴타이가 열리게 되어 몽골군단의 화려한 유럽원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서방세계는 수부타이가 이끈 몽골군단의 침공에 대해 곧 잊었지만, 그 외부 세계의 침공을 몸소 체험한 러시아는 또 달랐다고 리처드 가브리엘은 적고 있다. 그 결과, 구소련의 후계자들은 몽골군단의 뛰어난 전략전술을 모태로 삼아 2차 세계대전 전에 뛰어난 기갑군단을 창설하게 되었다고 진술한다. 문제는 스탈린과 그의 동조자들의 무자비한 숙청으로 뛰어난 장군들이 모두 희생되고, 그 결과 1941년에 시작된 독소전 초반에 러시아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몽골비사>를 바탕으로 한 수부타이와 몽골군단의 세계정복 과정을 리처드 가브리엘 교수는 체계적인 역사기술 방식으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각 개별 전투뿐만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따른 세계정복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그리면서, 당대 무기와 장비, 전쟁 당시의 전개방식 등 다양한 방식을 소개하는 그의 저술방식은 인상적이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 파편화된 역사적 사실을 끌어 모아 수부타이는 걸출한 인물의 지휘 아래 시도된 대원정이라는 큰 그림을 그린 리처드 가브리엘 교수의 연구 성과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다만, 영역본에 근거한 연구 성과라는 한계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최후 승리의 영광은 언제나 최고지휘관에게 돌아갔던 것이 역사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몽골군단 내에서 빼어난 전과로 보여준 바투르 수부타이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정복자 칭기즈칸의 그것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리처드 가브리엘 교수의 바투르 수부타이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더 반갑게 다가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