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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다시 하루키다. 올해 출간된 하루키 상의 열 번째 단편집이 출간되기도 전에 예판만으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신형철 평론가가 진행하는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에서도 대대적으로 하루키 상의 단편집 소개에 나섰다. 그 방송을 듣고 나니 도저히 배길 재간이 없었다. 난 사실 하루키 상의 열혈 팬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의 책이 나오는 족족 사서 보고 있다. 누가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루이스 세풀베다와 로베르토 볼라뇨라고 할텐데.
신형철 평론가의 꼬드김으로 <빵가게 재습격>을 읽게 됐다. 2010년 멕시코 출신의 감독 캉를로스 쿠아론이 연출을 맡아 단편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해서 유튜브로 검색을 해보니 동명 제목 <The Second Bakery Attack>으로 수많은 패러디 작품들이 있었지만, 정작 본 영화는 구할 수가 없었고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두 주인공이 맥도널드를 터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단편집에서는 남자인 내가 이야기를 이끌어 갔는데, 영화에서 보니 실제적인 액션/행동은 여자 주인공 냇(커스틴 던스트 분)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단편에서는 맥도널드를 털기 전에 자동차 번호판까지 꼼꼼하게 가리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영화에서도 그랬는지 궁금하다. 뱀파이어 소녀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멋진 연기를 보여 주다니, 그릴에서 지글지글 굽는 햄버거 패티를 보며 참을 수 없는 공복의 표현인 던스트 양의 꿀꺽하는 목넘김 소리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신형철 평론가의 이야기를 빌어 하루키 월드를 분석해 보자. 하루키 상에게 1960-70년대는 영원한 이상향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 자유로운 의지로 이룰 수 있었던 시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그의 작품 곳곳에 묻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그가 매문(賣文)하여 먹고 사는 지금은? 어쨌든 이 매력적인 단편 <빵가게 재습격>의 이야기는 참을 수 없는 공복 때문에 한밤 중에 일어난 남자 주인공은 어린 시절 못다 이룬 빵가게 습격을 다시 성공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로를 이제 막 결혼한 그의 아내가 동조해서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레밍턴 산탄총에 스키 마스크까지 준비해서 빵집털이에 나선다는 얼개다. 그런데 왜 유독 빵집만 털어야 하지? 일본에는 빵집 말고도 오코노미야키라든지 맛있는 우동, 혹은 돈까스집도 많이 않은가.
소설의 서사 중에서 개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제 막 결혼한 와이프가 도대체 어디서 레밍턴 자동 산탄총을 준비했는지 너무나 궁금하다. 단편영화의 배경인 뉴욕 브루클린이라면 몰라도 도쿄 한 복판에서! 물론, 그건 오래 전에 못다 이룬 꿈(빵털이)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는 사나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하루키 월드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빵가게 습격에서 실패한 원인 중의 하나였던 바그너의 음악을 당당하게 재습격에 차용한 카를로스 쿠아론 감독의 재치가 인상적이었다. 라지 콜라 가격까지 지불하고 맥도널드 매장을 나서는 커플의 당당함이 과거에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을 해소하는 기폭제로 멋지게 작용한다.
<로마제국의 붕괴, 1881년의 인디언 봉기,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그리고 강풍세계>는 제목만 보고서 많은 기대를 했는데 그저 화자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습관처럼 하는 메모의 일부로, 세상을 기억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이라며 눙치며 빠져 나가는 스타일이 역시나 하루키 월드의 지배자답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은 어느 나른한 오후에 벌어지는 기담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을 그만 두고 아내를 대신해서 전업주부로 활동하는 주인공 남자에게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그의 세계를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에로틱한 상상은 어쩐지 넘어서는 안될 선을 위태롭게 넘나드는 그런 유혹이 진득하게 배어 있다. 법대에서 법학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는 꿈도 꾸었지만 어느 순간 일이 꼬여 이렇게 되었나 싶은 상념에 젖었다가 아내의 부탁대로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나서는 주인공. 고양이 수색 중에 우연히 만난 정체 불명의 소녀와 백일몽 같은 서사들이 이어진다. 결국 고양이는 찾지 못하고 아내와 대판 싸우는 남자. 아내는 고양이가 죽었을 거라고 단정하고 그의 탓이라고 비난한다. 화를 달래기 위해 맥주를 마시는 동안,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다시 울린다. 어느 나른한 오후의 여파가 빚은 갈등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최고로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바로 <패밀리 어페어>다. 이십 몇 년을 같이 산 여동생이 결혼을 앞두고 데려온 와타나베 노보루(태엽 감는 새의 실종된 고양이 이름도 와타나베 노보루였다)를 못마땅하게 생각나는 화자의 이야기다. 여름 베짱이 같은 그야말로 일본이 온 세상을 집어 삼킬 것 같이 잘 나가던 시절(1980년대)을 상징하는 주인공은 난봉꾼 혹은 자유연애주의자로 맥주와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LP 레코드 감상을 즐긴다. 생업을 위해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하지만 매사가 귀찮고 일도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를 재밌게 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역시 하루키 월드의 정예 멤버다운 성정이다. 여름 베짱이처럼 살면 뭐가 문제냐는 투의 하루키 상인 선사하는 간드러진 유혹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서로를 얽매지 않는 여동생과의 단란한 생활에 와타나베 노보루라는 혼다 500시시 오토바이를 즐겨타는 남자가 등장하면서, 오누이 간의 첨예한 갈등이 피어오른다. 세상을 좀 너그럽게 보라는 여동생에 말에, 시니컬한 오빠는 그렇게 생겨 먹을 걸 어떻게 하냐고 대꾸한다. 이런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의 배후에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맞이하는 다양한 군상의 모습을 하루키 상은 배치한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개인-가족 그리고 사회의 면모를 반추하게 해준다.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는 어떠한 변화도 원치 않는 나에게 땜질 인두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겠냐는 설득이 묘하게 다가온다. 물론 그 이면에는 노보루가 자신의 오디오를 고쳐준 고마움에 대한 화해의 일면도 담겨 있겠지만 말이다.
너무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서 하루키 상이 걷어 올리는 서사들은 가히 매혹적이다.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간단한 저녁 식사를 위해 바지락조개를 씻는 따위의 일상에서 상실한 추억을 떠올리고, 집나간 코끼리와 그 사육사를 생각하거나 내가 원하지 않는 LP판도 때로는 들어야 하는 삶의 의무 또는 소소한 관계의 확장을 통한 세상 보는 시각의 다양화 등이 하루키 월드에는 소소하게 담겨 있다. 물론 생뚱맞게 레밍턴 산탄총과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30개나 되는 맥도널드를 털러 나갈 때도 있지만. 이제 노장이 된 하루키 상의 새 단편집에는 또 무슨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지 궁금하다.